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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사유
박기원 글, 김은하 그림 / PageOne(페이지원) / 2010년 12월
평점 :
품절
얼근하게 오른 취기속에 오고가는 술잔, 애틋한 눈빛들, 정겨운 대화, 한장 사진으로 화化하는 추억들. 필름이 끊어질 정도로 과하게 마시는 스타일은 아니기에, 알코올 잘 받게 낳아주신 덕분에 대부분의 술자리는 정겹고 즐거운, 무엇보다도 그리운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추억의 페이지에는 마신 술의 종류나 양에 대해서 보다는 함께 했던 이들의 면면, 그들의 향기로운 내음, 라이브로 찍어댄 주옥같은 대사들이 단색으로 채색되어 가슴 한켠에 자리하고 있다. 어느날 문득 퀴퀴하고 습기 가득한 그 페이지를 들춰보았을 때 웃음을 타고, 눈물을 타고 뿜어져 나오는 것은 그리움, 또 그리움, 오직 그리움. 추억이라는 것은 <음주사유>의 저자 박기원이 말하듯 '사라진 사람들과 시간들을 꺼내보고, 그 때 소진한 삶의 에너지를 그리워하는' 것인가 보다.
단순히 술에 대한 에피소드와 카툰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깨고, 상당히 철학적이고 깊은 통찰과 향기로운 글을 맛보여준 <음주사유>. 음주의 사유事由도 있지만 대부분은 음주 사유思惟로, 읽는 재미와 더불어 속 깊은 문장력을 과시했다. 한잔 술을 앞에 두고 그 술을 함께 마셨던 이와의 추억을 회상하고, 즐겁고 황당했던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것은 '홍차에 마들렌 과자를 적셔 먹다 무한한 옛추억 속에 잠기는 것(마르셀 프루스트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비견될 만 했다. <시네마 천국>, <어린 왕자>, 나폴레옹 등을 끌어다 술술 넘어가는 재미난 이야기로 이끄는 솜씨도 좋았고, <사계>의 각 악장을 토대로 '술의 사계'를 풀어낸 장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중간중간 양념을 치듯 사이사이에 들어간 카툰은 제법 쓰디쓴 글을 들이켠 후에 먹는 안주 맛이었다고나 할까. 때로는 고갈비 처럼, 때로는 모듬전 처럼. 친근한 그림체와 재미있는 글로 긴장을 풀어주고 책 읽는 맛을 더했다. 책 속에 끼어들어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원래는 이 카툰을 먼저 기획했고 후에 글을 써 더해서 공저가 되었다고 한다.
술맛은 결코 쓰지 않다. 쓰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쓴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분에 따라, 함께 한 이들에 따라, 때로는 시간과 계절에 따라, 쓰기도, 달기도, 무미無味하기도 한 것이 술맛. 흥분되거나 쳐지거나 즐겁거나 외로운 술을 들이켰을 때, 혈관을 타고 흘러든 그 기분은 이내 전신을 감싸안으며 현실의 세계를 벗어나 그 때 그 추억의 장소, 그 때 그 추억의 술자리로 방울져 무한한 기억의 우주속을 떠돌게 한다. 얼근하게 오른 취기속에 오고가는 술잔, 애틋한 눈빛들, 정겨운 대화, 한장 사진으로 화化하는 추억들. 오늘도 수많은 곳에서 셀수없는 사람들이 각자 추억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들과 시간들을 꺼내보고, 그 때 소진한 삶의 에너지를 무한하게, 무한히 그리워하고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