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의 보름
R. C. 셰리프 지음, 백지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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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가 왜 "일상적 삶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운 존엄성"이라는 표현으로 이 책을 추천했는지 알 수 있다. <구월의 보름>은 그의 <남아있는 날들>이 주는 아름다움과 거의 일치한다. 휴가를 떠나기 위해 도시락을 싸고 기차를 타는 일이 이렇게 설레고 아름다운 일이었나 다시 생각해보면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휴가를 떠나기 전, 혹은 휴가를 다녀온 뒤 읽으면 더할 나위 없는 책이다. 물론 외부로 떠나는 휴가 대신 이 책 한 권이 휴가가 되어줄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평소 불만 많던 가족과 힘든 직장 일, 한 번의 외식조차 더 사랑스러워졌다. 

그러나 대체로는 즐겁고 거리낌 없는 자유의 기조가 있었다. 하인은 없었고, 주인도 없었으며, 점원도 없었고, 지배인도 없었고, 그저 공통된 직업이 ‘휴가객‘이었던 남녀만이 있었다. 꽉 조이는 네모난 구멍에 맞추느라 쓸리고 화끈거리는 곳을 쉬게 하는 둥근 못들과, 무른 성질 혹은 순전한 의지력으로 모양을 바꿔 더는 아프지 않은 못들이 있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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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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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후인 1988년 9월과 10월의 일기를 수록했다. 작가의 말처럼 "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여서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닌 극한 상황에서 통곡 대신 쓴 것"(9쪽)이다. 

이 책에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극한의 고통, 그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자신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시선, 신에게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갈구하고 '통곡'하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단순히 박완서 작가 개인의 고통과 슬픔의 토로에 머물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작가가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 종교적 명상, 주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교감을 토대로 인간 존재의 약함과 슬픔을 돌아보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세상의 허위와 우리 안의 속물성을 가차없이 드러내 우리에게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작가의 모습을 여전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읽히지만, 다시 읽어보니 행간의 의미가 가볍지 않다. 


함께 수록된 수필 <언덕방은 내방>은 이 시기 작가가 머물렀던 부산 베테딕도 수녀원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글이고, 이해인 수녀님과 주고받은 손 편지도 수록되어 있어 더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부산, 수영만과 광안리, 베네딕도 수녀원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더 친근감을 느끼면서 읽었다. 다시 박완서 작가님의 다른 글들을 읽어봐야겠다. 박완서 작가님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기억되길......

이 세상에 진리의 말씀이 사람 수효보다 많다고 해도 내 마음의 껍질을 뚫고 들어와 속마음을 울리는 한마디 외에는 다 부질없는 빈말일 뿐인 것을. 세상이 아무리 많은 사람과 좋은 것으로 충만해 있어도 내 아들 없는 세상은 무의미한 것처럼. - P50

그 애에게서 생명이 없어지다니. 들꽃으로라도 풀로라도 다시 한번 피어나렴. - P78

나는 방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몸부림을 쳤다. 방 안을 헤매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마침내 하나의 작은 돌멩이가 되었다. 돌멩이처럼 보잘것없었고, 돌멩이처럼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지려고 기를 쓰듯이 한 말씀을 얻어내려고 기를 썼다.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질 리 없듯이 한 말씀은 새벽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절한 밤이었다. - P104

다시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은 내가 내 아들이 없는 세상이지만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증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안다. 내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가 있다니, 부끄럽지만 구태여 숨기지는 않겠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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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되어 줄게 문학동네 청소년 72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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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신작이다. "딸 강윤슬은 1993년 중학생인 엄마의 삶으로 엄마 최수일은 2023년 중학생인 딸의 삶으로 딱 7일간의 '너'를 체험"하는 이야기라는 소개를 읽고 흔한 타임슬립 이야기인가 했는데 의외로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재미있게 읽은 지점은 딸 강윤슬의 '마음'이다. 엄마 최수일이 딸을 대하는 모습은 그냥 '나'로구나 했다. ㅋㅋ 그래서 모든 엄마의 마음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면 딸 윤슬의 생각을 읽으면서 아, 내 아들도 꼭 이렇게 생각했겠구나 싶어 뭉클했다. 그래, 아이를 잘 키우고 잘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엄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게 더 필요한 거지... 

<82년생 김지영>의 청소년 버전, 훨씬 밝고 따뜻하지만 조남주 작가답게 '리얼리티'는 놓치지 않고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해주는 재미있는 소설이다. 청소년이 읽어도 재밌고 사춘기 자녀를 가진 부모님이 읽어도 감동 받을만한 재미있는 책이다. 

잘 모르겠다. 엄마가 나를 가르치고 도와주고 잘 키우는 것 말고,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 무엇보다 나를 생각 없는 아이로 아는 것 같다. 뭐든 목표를 가지고 악착같이 해 보란다. 나는 지금 열심히 즐겁게 지내고 있는데 대체 뭘 어떻게 해야 악착같은 걸까. - P15

윤슬이 보고 싶다. 그동안 윤슬이가 올렸던 영상들을 하나씩 플레이해 본다. 중국어는 하나도 못 알아듣지만 왠지 잘하는 것 같다. 귀엽다. 윤슬이 때문에 못 살 것 같았는데 윤슬이 없이도 못 살겠다. - P70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만 흐르는 건 아닌 것 같아. 미래의 일 덕분에 과거가 다시 이해되기도 하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기준으로 선택하기도 하고 사람들은 사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살고 있지."

"나이를 먹으니까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게 되더라고. 예지력이 생긴다는 게 아니라, 데이터가 쌓이고 재조합되면서 과거의 일들뿐 아니라 미래의 일들도 그냥 알게 돼. 의미를 몰랐던 일들을 뒤늦게 깨닫고 나면 과거 어느 지점에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도 하고." - P113

나와 열 달 동안 한 몸이던, 그러고도 한참을 내 품 안에 있던 아기는 이미 우리의 세상에서 한 발을 뺐다. 윤슬이는 요즘 나에게서 부쩍부쩍 멀어지고 있다. 내가 모르는 친구, 내 허락을 받지 않은 약속, 내가 사 주지 않은 펜과 머리핀, 화장품, 닫힌 방문 너머에서 들리는 통화 목소리, 나에게는 말하지 않는 고민, 기쁨, 슬픔, 분노 들. 적당히 눈치채기도 하고, 조심스럽게 물어보기도 하고, 모르는 척 넘어가기도 했다. -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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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성형미인이 되었나 - 강남 성형외과 참여관찰기
임소연 지음 / 돌베개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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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을 읽고 관심이 생겨 찾아 읽은 같은 저자의 책인데, 오히려 더 흥미진진한 책을 발견한 기분이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이 "과학기술이 사회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과정과 그 의미를 인문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 살피는 학문"(15쪽)인 '과학기술학'의 범주로 분류할 수 있다면 이 책의 성격은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성형과 과학기술의 관계 및 사회적 의미를 다루고 있으니 역시 과학기술학으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저자 자신이 직접 성형외과에서 벌어지는 성형수술의 참관자이자 체험자가 된다는 측면에서는 사회인류학적 성격도 있는 것 같다. 또한 개인의 경험과 몸(신체)에 대한 사유를 확장한다는 점에서 아주 독특한 에세이로 볼 수도 있는 것 같다. 이 글의 성격을 규정할 능력은 없지만, '성형'이라는 연구 주제를 이론적, 사회문화적으로 다루는 것을 넘어 개인의 경험을 통해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저자가 말하는 성형을 통해 얻게 되는 '사이보그'라는 몸은 단순히 기술과 몸이 결합하는 순간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형 후 오랫동안 몸과 타협하고 협상하며 몸을 돌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기에 저자는 "성형 수술을 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성형외과의 코디네이터로 오랜 기간 근무하면서 관찰한 의사,간호사,코디네이터와 환자로 구성되는 '성형외과'라는 공간과 한국 사회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성형(경험)'과 '성형한 여자'의 의미는 무엇인지 살펴본다. 과학기술,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 페미니즘과 자본주의(성형의료산업), 몸의 물질성을 드러내는 트랜스휴먼은 이 책의 주요 키워드이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 '성형' 세계의 내부로 들어간 느낌이다. 이전에 성형의 경험이 없다고 해서 앞으로도 성형의 욕망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성형의 세계에 예뻐지고 젊어지기 위한 성형 혹은 성형 전과 후의 놀라운 변화를 떠올리게 하는 성형 패러다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형 전후의 '조정'과정이 필수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저자가 "성형수술의 문제는 치료와 치유의 문제이자, 인간 향상의 문제이기도 하다."(224쪽)고 강조하는 이유이다. '성형대국' 한국에는 다양한 성형의 경험을 진지하게 다룬 "기술과 몸의 결합에 대한 이야기"(231쪽)가 더 많이 필요하다.  

건강과 젊음 혹은 정상성의 정의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시하는 실증적인 연구와 담론이 필요하다. 개개의 몸은 모두 다르고 다양하기에 몸을 하나의 잣대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규정 자체를 그만두자고 주장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치료받고 개선되어야 할 몸들이 있고, 그 몸들에는 기준이 필요하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정상성‘의 기준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정의, 더 많은 자료와 설득 방법이 있어야 한다. - P39

한마디로 말하자면, 성형수술의 결과는 대부분 성공이나 실패가 아닌, 그사이의 넓은 스펙트럼 어딘가에 속한다. 성형미인이 모두 똑같이 생겼다고들 하지만, 과연 정말 그러한가? 이론적으로 100퍼센트 예쁜 얼굴과 0퍼센트 예쁜 얼굴(못생긴 얼굴) 사이에는 무수히 많은 (예쁜) 얼굴이 존재할 것이고, 성형 후의 얼굴 역시 마찬가지다. - P188

몸의 보편성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몸을 가지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몸을 가지고 있으며 21세기 현대사회에서는 그 어떤 몸도 순수할 수 없기에 우리는 모두 포스트휴먼이다. 그러니 포스트휴먼 시대의 에티켓은 자기와 다른 몸을 가진 타자, 다양한 이유로 과학기술과 결합한 포스트휴먼 타자에 대한 시혜적인 존중이나 배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역시 포스트휴먼이라는 자각과 연대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 P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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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우아하게 젠더살롱 - 역사와 일상에 깊이 스며 있는 차별과 혐오 이야기
박신영 지음 / 바틀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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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역사와 일상에 깊이 스며 있는 차별과 혐오 이야기'라는 부제 때문이었다. 스스로 '역사 덕후'라고 하는 작가가 일상 속 '여성 차별' 문화와 문제를 역사적 근원을 추적해서 밝하는데, 작가가 일상 속 성차별의 역사와 근원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활용하는 것은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통해 오랫동안 전해졌고, 성차별이라고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를 내재해온 차별의 논리를 작가는 '역사'라는 자료를 근거로 삼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비판적으로 그 부당함을 지적한다. 특히 '굽은 솔이 선산 지킨다'는 속담 속에 약자와 여성에 대한 가스라이팅 논리가 숨어있음을 밝히는 부분에서 분노와 슬픔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 책을 읽고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은 아씨들>과 <가면 뒤에서>를 다시 읽어 보기로 작정했다. 


 다만 이 책은 신문 연재 칼럼이 수정을 거쳐 단행본으로 출판된 책이라는 한계로 인해 각 장의 내용이 조금 단편적인 점은 아쉽다. 구조적 문제를 치밀하게 따지기보다는 일상에 만연한 성차별에 맞설 비상약 혹은 응급 호신무기가 필요할 때 신속하게 챙길 수 있는 가독성 좋은 비책이라고 할까? 역사, 이야기, 성차별 주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역사책을 읽다가 ‘망탈리테‘라는 개념을 접했다. 역사학자 뤼시앵 페브르는 <16세기 무신앙 문제>의 머리말에 "각각의 시대는 심성적으로 자기 시대의 우주를 만든다"라고 썼다. 여기서 심성心性은 망탈리테를 번역한 말로,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성차별주의자들의 말과 행동을 대할 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에서 온 사람 같다고 느끼곤 했던 것이 이해가 된다. - P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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