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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말씀만 하소서 - 출간 20주년 특별 개정판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24년 12월
평점 :
박완서 작가가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후인 1988년 9월과 10월의 일기를 수록했다. 작가의 말처럼 "이건 소설도 아니고 수필도 아니고 일기"여서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할 만한 처지가 아닌 극한 상황에서 통곡 대신 쓴 것"(9쪽)이다.
이 책에는 자식을 잃은 어미의 극한의 고통, 그 고통을 겪는 과정에서 자신을 냉정하게 관찰하는 시선, 신에게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갈구하고 '통곡'하는 목소리가 가득하다.
<한 말씀만 하소서>는 단순히 박완서 작가 개인의 고통과 슬픔의 토로에 머물지 않는데, 그 이유는 작가가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 종교적 명상, 주변 인간과 자연에 대한 교감을 토대로 인간 존재의 약함과 슬픔을 돌아보기 때문인 것 같다. 또한 세상의 허위와 우리 안의 속물성을 가차없이 드러내 우리에게 부끄러움에 대해 생각하게 했던 작가의 모습을 여전히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읽히지만, 다시 읽어보니 행간의 의미가 가볍지 않다.
함께 수록된 수필 <언덕방은 내방>은 이 시기 작가가 머물렀던 부산 베테딕도 수녀원에서의 경험을 기록한 글이고, 이해인 수녀님과 주고받은 손 편지도 수록되어 있어 더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부산, 수영만과 광안리, 베네딕도 수녀원의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더 친근감을 느끼면서 읽었다. 다시 박완서 작가님의 다른 글들을 읽어봐야겠다. 박완서 작가님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기억되길......
이 세상에 진리의 말씀이 사람 수효보다 많다고 해도 내 마음의 껍질을 뚫고 들어와 속마음을 울리는 한마디 외에는 다 부질없는 빈말일 뿐인 것을. 세상이 아무리 많은 사람과 좋은 것으로 충만해 있어도 내 아들 없는 세상은 무의미한 것처럼. - P50
그 애에게서 생명이 없어지다니. 들꽃으로라도 풀로라도 다시 한번 피어나렴. - P78
나는 방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몸부림을 쳤다. 방 안을 헤매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마침내 하나의 작은 돌멩이가 되었다. 돌멩이처럼 보잘것없었고, 돌멩이처럼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지려고 기를 쓰듯이 한 말씀을 얻어내려고 기를 썼다. 돌멩이가 말랑말랑해질 리 없듯이 한 말씀은 새벽 미사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까지도 들려오지 않았다. 처절한 밤이었다. - P104
다시 글을 쓰게 됐다는 것은 내가 내 아들이 없는 세상이지만 다시 사랑하게 되었다는 증거와 다르지 않다는 것도 안다. 내 아들이 없는 세상도 사랑할 수가 있다니, 부끄럽지만 구태여 숨기지는 않겠다. - P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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