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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영혼 오로라 -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기록한 오로라의 모든 것
권오철 글.사진, 이태형 감수 / 씨네21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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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천체사진가 권오철이 촬영한 사진을 모은 사진첩이자, 오로라의 원리를 담고 있는 과학서이자, 오로라 여행을 꿈꾸는 이들을 향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이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장에서는 오로라의 높이, 밝기, 원리 등 과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2장은 세계 최고의 오로라 관측지인 캐나다 옐로나이프에서의 오로라 투어팁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오로라 여행의 교통/숙박/렌터카 예약/프로그램부터 시작해서 오로라 이외로 즐길 수 있는 박물관/쇼핑/먹러리/호텔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다루고 있다. 이 책의 저자가 "밥이 잘 나오지만 물이 부족해서 겨울에는 씻는 것이 어렵다.", "비용이 만만찮다." 등 매우 진솔한 여행팁을 담았기에, 오로라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3장에서는 오로라 촬영 팁을 다루고 있다. 오로라 촬영을 위한 준비물부터 시작해서 카메라 설정 방법, 인증샷 찍는 팁까지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전문 카메라 없이 스마트폰만으로 촬영하는 법도 다루고 있기에 전문 카메라를 소지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유익한 촬영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20장이 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오로라 사진들과 여행 팁들을 보면서, 나도 일생에 한 번쯤 오로라 투어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까만 밤하늘을 형광빛이 물들이고, 온갖 색으로 춤추듯이 빛나는 광경을 사진을 통해서 보았지만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광경을 내 눈을 통해 본다고 해도 쉽게 믿을 수 없을 것 같고, 꿈꾸는 기분일 것 같다. 저자의 버킷리스트에 오로라를 보는 것이 있었듯이, 내 버킷리스트에 "오로라 관측하기"를 새로 추가한다.

거대한 빛의 너울거림 앞에 서다.

오로라는 사진으로만 보아도 환상적이지만 실제로 보면 훨씬 신비롭다. 우선 그 장대한 규모에 놀라고, 너울거리는 움직임에 빠져든다. 오로라는 정적인 현상이 아니다. 산에서 볼 수 있는 운해보다도 더욱 역동적으로 그 모습이 시시각각 변한다. 게다가 그 범위는 밤하늘 전체를 뒤덮기에 사진으로 담기는 부분은 일부일 뿐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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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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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서 젠의 서사가 비중있게 다뤄지는 이유는?

딸과의 갈등이 없었다면 젠을 데리고 오지 않았을까? 소설을 읽으면서 중요성을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소거법이다. 소거법으로 이 서사가 없어도 괜찮은지를 확인할 수 있고, 소거법에 따르면 젠의 서사는 꼭 필요한 서사이다. 『딸에 대하여』는 이청준 소설의 ‘격자구조’ 기법을 통해 진행된다. 격자 구조 기법은 서사가 교차되면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대등하게 짜여지면서 늘여놓는 서사로서, 젠의 서사와 딸의 서사의 무게감이 동등하게 격자구조로 짜여져서 진행이 된다. 젠의 서사는 부수적 서사가 아니라 딸의 서사의 짝패에 해당한다.

‘젠’은 굉장히 기능적인 인물이다. 딸의 세계와 어머니의 세계가 중첩되는 인물이다. 서사의 성격으로 봤을 때, 어머니와 딸의 교집합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젠’이 젊었을 때 했던 대의를 위한 행동들은 딸이 지금 하고 있는 행동들과 중첩된다. ‘젠’이 노년의 일은 엄마와 겹쳐진다. 엄마는 젠을 보면서 딸이 젠처럼 될까봐 격렬하게 반대하지만, 오히려 젠을 통해서 딸을 이해하게 되는 면이 있다. 젠은 엄마의 인식변화를 도모하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소설의 화자 및 시점의 특징은 주제의식과 어떻게 연결될까?

이 소설의 제목은 왜 ‘딸의 세계에 대하여’가 아니라 ‘딸에 대하여’일까. 이 소설은 양육할 책임을 가진 존재(딸)가 ‘나’(엄마)가 용납할 수 없는 가치를 가치고 요구하면 어떻게 할 것인지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즉, 이 소설의 주된 문제의식은 ‘나와 너무 다른 자식’이다. 나와 가장 가까운 타자(자식)도 타자로 인정해줄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나’(엄마)는 ‘절대로 절충이 되지 않는 관계에서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내적 갈등을 겪고 있다. 어머니의 내면적 흔들림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소설은 1인칭 주인공 시점, 엄마의 시점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딸의 시점으로 이 소설을 보게 된다면, 딸의 PC함을 전제한 상태로 진행이 되기에 뻔하고 단순한 구조로 흘러갈 수 밖에 없다. 어머니의 인정은 가장 어려운 인정에 해당한다. 어머니는 당사자(딸)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기에, 딸의 당사자성을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에 해당한다. 이는 어머니가 가진 가치가 비윤리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딸의 비규범적 성적정체성과 둘러싸고 엄마가 돈/노동/가족구성(제도)에서 부딪힌다. 이는 가장 보편적인 가치로, 어머니는 딸이 풍요롭고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으로 내적 가치가 충돌하게 되는 것이다. 교수부인과 어머니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나, 어머니와 딸은 비슷한 결의 사람이다. 다만 둘은 서있는 자리(입장)이 달라서 관점이 다르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비정상/규범적인 중년의 노후를 바라보며, 딸은 딸의 입장에서 어머니를 바라본다. 

어머니는 딸의 강사 해임 반대 시위현장을 목격하고, 병원에서 딸과 그녀의 동료들을 보면서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149쪽)는 것을 깨닫는다. 이는 어머니가 딸을 인정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후 딸이 “단단한 땅”, “가차없는 세계”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딸이 하고 있는 사랑과 투쟁이 순간적/일시적으로 취해있는 것이 아니라 뿌리 내리고 있는 ‘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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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꿈 꾸세요
김멜라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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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제목인 ‘저녁놀’이 함의하는 바는?

“저녁놀”의 제목은 니체의 『아침노을』 패러디에 해당한다. 근대 서양철학사를 뒤흔든 철학자는 니체, 마르크스, 프로이트이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발견하였으며, 의식보다 무의식이 인간 존재 규정에 더 큰 힘을 가진다고 이야기하였다. 마르크스는 노동 개념을 주장하였으며, 사회/경제적 토대에서 사람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니체는 도덕에 기반한 신앙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니체의 저서인 『도덕의 계보』는 도덕은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어지는 것이라고 역설하였다. 『선악의 저편』에서는 힘이 없기 때문에 선과 악의 개념이 만들어진 것이며,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는 선과 악의 저편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고 이야기하며, 중심이 되는 기준인 신은 사라졌으며, 개인이라는 존재가 등장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근대적인 인간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니체의 『아침노을』은 니체 저작 중후기에 해당한다. 위 저작에서는 서구 철학, 기독교 사회,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니체는 신 중심의 사고를 하던 중세 시대를 칠흑같은 어둠의 시기라고 보았으며, 인간 중심의 사고를 떠오르는 해라고 보았다. 아침노을은 해가 뜨기 전에 붉게 번지는 노을을 뜻하며, 니체는 이제 기독교-신 중심 사회를 벗어나서 근대 중심의 사고, 인식능력, 인간 정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기에 니체는 당대 사회가 ‘지금은 아침노을을 보고 있는 사회’라고 보았다.

위 소설의 작가는 니체가 서구 사회의 기독교-자본주의 양상을 비판하였으며, 인간 중심 사고를 외쳤으나, 니체가 주장한 “인간중심”의 “인간”에는 여성이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다. 즉 니체의 사상도 이러한 지점들을 비판하지 못 하였기에, 아침 노을이 아니라 사실은 저녁 노을임을 표현하고 있다. 현대까지 페니스가 기본값이며 여성은 예외였다. 2000년 동안의 서양 철학사상을 비판한 니체 역시도 남근 중심 사상을 비판하지 못하였음을 비꼬고 있다.

이 소설의 화자 및 시점의 특징은 주제 의식과 어떻게 연결될까?

남근 숭배 사상, 비대한 자의식을 가진 모모의 눈으로 여성의 삶과 사랑을 살펴보고 있다. “섹스에 등돌리고 섹스의 상징이자 육체의 중심인 나를 버리겠다니”(118쪽)라고 말하며,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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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0 08: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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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양귀자 지음 / 쓰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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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구성

『82년생 김지영』과 이 소설은 콜라주 기법으로 진행이 된다. 모자이크 방식으로 여성 전화의 이갸기/신문 기사/대본 등 다양한 목소리들이 들어온다. 강민주는 편집증적/과대망상적인 사람으로, 강민주의 목소리에 더 실감이 나고 더 공감을 하기 위해서 1인칭으로 서술되는 강민주의 목소리 안에서 강민주의 노트/강민주가 기록하는 내용/전화의 상담 내용/백승하의 사연 고백이 1인칭 목소리로 콜라주되어 있다. 이는 이 소설에서 말하고 있는 젠더폭력이 강민주라는 아주 특이한 한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된다. 『제인 에어』의 말할 수 없던 버사는 『채식주의자』의 기울어진 글씨체(비이성의 언어)로밖에 나올 수 없다. 이러한 흔들리고/어긋나고/균열될 수밖에 없는 목소리들을 콜라주 기법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인에어』의 버사는 왜 목소리를 낼 수 없나(왜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하는 이야기를 우리는 들을 수 없나),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왜 비이성과 비합리성과 무의식과 꿈의 영역에서밖에 이야기해줄 수밖에 없나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서 왜 이렇게 비균질적인 목소리들이 계속 끼어드는가에 대한 문제로 연결된다.

강민주의 죽음 부분에서는 ‘누가’ 이 소설을 쓰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든다. 강민주가 죽고 나서 마이크를 쥔다는 것은 굉장히 권위적인 행위이다. 이 소설에서는 백승하/황남기/김인수 세 남성의 목소리로서 강민주가 회고되고 재현되면서 소설이 마무리가 된다.

강민주와 백승하는 각각 남성성/여성성을 미러링하는 존재이다. 이는 여성성과 남성성이 편협하게 규정되어온 억압을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납치와 감금에서도 미러링이 사용된다. 80년대 후반 90년대 초에 인신매매가 굉장히 흔하게 일어났는데, 양귀자 작가는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통해 당대 상황과 반대로 여성이 남성을 납치하는 사고 실험을 진행하였다. 표면적으로 납치, 감금은 당시 시대적인 배경을 갖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문학적인 해석으로는 백승하가 감금된 곳은 컨테이너 박스/지하실 등이 아니라 아파트이며, 아파트 안에 꽃처럼 앉아있기만 한다. 강민주는 엄마 베개를 쓰며, 어머니 물건을 보관하고 있는 방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건강한 상태의 성장/자립을 한 상태가 아니며, 유아기에 고착되어 있는 모습이다. 강민주의 정신 상태는 굉장히 편집증적이며 비정상적이다. 강민주의 어머니가 부동산/달러 시장을 통해 경제력/부를 축적하였으며, 이는 공적인 상황에서 돈을 못 버는 상황을 보여준다.

백승하에 대한 강민주의 감정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백승하와 백승하 제외의 남성들은 이분법적으로 구분된다. 백승하 제외의 남성들은 일반적인 성향을 가졌으며, 강민주와의 소통이 부재된다. 백승하는 강민주와 유일하게 대화하였으며, 오후에 일정한 시간의 티타임을 가졌다. 이 티타임은 당대 현실에서는 잘 없는 판타지적 요소에 해당하였다. 이러한 이분법적인 구조는 강민주의 감정 변화에 개연성을 부여한다. 백승하는 강민주와 일종의 대등한 선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이는 협상 테이블에 앉기 위해서는 서로 대등한 관계여야만 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백승하는 유일하게 강민주를 기만하지 않고 인터뷰에 답한다. 백승하는 강민주가 벌인 납치극의 피해자(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강민주가 벌인 범죄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강민주에게 자신이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강민주가 여론에 의해서 폄하되거나 강민주의 의도가 곡해되지 않도록 말을 아끼고 있는 백승하의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 백승하는 강민주가 자신을 납치해왔지만 강민주가 자신의 가족/아이를 정말로 해치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으며, 이 사람이 어떤 식으로 성공하거나 실패할지는 모르겠지만, 이 사람이 벌이는 납치극 안에서는 강민주가 다치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백승하가 가지고 있었다. 강민주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 백승하라는 인물이 너무 특별한 개인이 아닌가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백승하가 여성적인 공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기에 이해한다고 한다면 여성성도 모성/여신/창녀/성녀를 아우른다고 볼 수 있으며, 매우 도식적으로 타입화되며, 2022년의 관점에서는 어느 특정한 한 성의 특정한 성격으로 규정짓는 것에 만족할 수는 없다.

이 소설은 백래시 없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진다. 이 소설은 남성을 납치해서 고발하겠다고 하지만, 결국 강민주는 백승하를 사랑하며 황남기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는 래디컬하지 않으며, 보수적이고 안전한 마무리에 해당한다. 이 멜로드라마/대중소설을 표방한 결말은 사회적으로 소설이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도 판단되어진다.

이 소설의 제목에 나오는 ‘금지된 것’이 함의하는 바는?

단편적으로 ‘금지된 것’은 강민주가 백승하를 납치/감금하는 일을 뜻한다. 여성에게 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는 물리적 폭력을 뜻한다. 이면적으로는 남성을 사랑하고 깊게 동정/연민하는 일을 함의한다. 강민주는 금지된 것을 소망하였기에 그 결과가 파국으로 이르렀다. 황남기에게 금지된 것은 강민주였으며, 소망조차할 수 없을 때 강민주를 죽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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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리마스터판) 창비 리마스터 소설선
한강 지음 / 창비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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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및 『채식주의자』의 특징

『채식주의자』는 2007년도에 발표된 연작소설이다. 『채식주의자』에 수록된 연작소설 세 편의 시점이 모두 다른데, 「채식주의자」는 남편이 시점이며, 「몽고반점」의 초점화자는 형부이며, 「나무불꽃」의 초점화자는 언니이다. 단편 「채식주의자」는 90년대 중반에 발표된 「내 여자의 열매」의 연작 소설이다. 「내 여자의 열매」의 줄거리는 여자주인공이 식물으로 변하자, 남자가 이를 화분에 심는 내용이다. 여기서 주요한 지점은 왜 베란다나 아파트 밖이 아니라 화분에 여성(식물)을 심느냐이다. 「채식주의자」는 화분에 심겨서 사육되고 있는 여성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1997년 단편 「내 여자의 열매」로 ‘식물-되기’라는 새롭고 독특한 환상을 보여주었던 한강은 정확히 십 년만에 이 소설에 대한 변주로 볼 수 있는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를 들고 돌아왔다. 그러나 이 두소설은 같은 부모 아래 자랐지만 판이하게 다른 아이들과 같다. 십 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의 소설 속 변신 모티프는 어떻게 변화했는가. (중략) 그리고 가장 가까운 사람과의 소통 불가능성으로부터 기원한 절망이 ‘식물-되기’의 모티프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는 유사한 지점에 놓여 있다. 그러나 관계의 폭력성에 맞서 차라리 식물이 되고자 하는 한 여자의 불가능한 꿈(욕망)의 실현 여부에서 두 소설은 갈라져 다른 길을 간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온몸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멍이 들었던 여자의 몸은 자연스럽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식물로 완벽하게 변신했지만, 「채식주의자」에서 여자의 몸은 나무가 되기 위해 음식을 거부하고 물구나무를 서는 등 능동적 행위를 수반하여 여전히 무언가를 소화하고 배설해야만 하는 동물의 육체로 남아 있다. 전작 「내 여자의 열매」의 여자가 제집 베란다에서 식물로 변한 후 남편에 의해 화분으로 옮겨지고 보살핌받으며 사적이고 은밀한 생을 기록해나갔다면, 근작 「채식주의자」의 여자는 정상과 비정상을 철저히 가르고 재단하는 사회의 시선 속에서 정신이상으로 분류되어 결국에는 공적인 공간인 정신병원에 놓이며, 의학 담론에 의해 함부로 취급당하는 것을 작가는 보여준다.

-강지희, 『파토스의 그림자』, 문학동네, 2022, 416쪽.

이 소설의 화자가 남편으로 설정된 것의 효과는?

이 소설의 구조는 기본적으로는 남편의 1인칭 시점이며, 이탤릭체를 통해 영혜의 꿈을 나타내고 있다. 이탤릭체를 통해 남편 시점의 불완전한 모습을 균열내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서술자가 남편을 통해 표면적으로는 남편의 가부장제/정상성을 강요하는 억압과 폭력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이 시선은 이성과 합리성을 가장한 시선으로, 남편은 본인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믿고 있다. 남편은 소설 속에서 아내의 이름(영혜)을 부르지 않는다. 남편은 “그녀에게 특별한 매력이 없는 것과 같이 특별한 단점도 없어 보였기 때문에”(10쪽) 영혜와 결혼을 선택한다. 즉, 차이와 개별성을 불편해하는 남편은 무난한 성격의 영혜가 아내의 역할을 평균적으로 수행할 것이라고 판단해 결혼하였다. 영혜에게 한 가지 남다른 점이 있다면, “브래지어를 좋아하지 않는다”(11쪽)는 점이다. ‘브래지어’는 여성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가에 대한 억압과 규제를 의미하며, 남성중심의 사회와 시선이 규제화된 장치이다. 영혜가 브래지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은 영혜가 채식을 하는 점에서 개연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남편은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자, “악몽 한 번꾸고는 식습관을 바꾸다니”(21쪽)라며 일반적, 보편적 이유가 아니라 꿈 때문에 채식을 시작한 아내의 모습을 납득하지 못한다. 남편은 의아해하고 당혹스러워하지만, 아내가 왜 이러한 선택을 하였는지를 알고 싶어하지 않으며, 아내를 자신이 편한 쪽으로 되돌리려고만 한다. 즉, 남편은 본인이 규범이며, 아내를 규범외의 존재로 보고 있었기에, 자신이 아내에게 맞추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편의 이름은 나오지 않으며, 남편은 소설 속에서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편명사와도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남편의 구체적 나이/외양/이름(특유한 개인의 고유한 정보)가 나오지 않는다. 즉, 소설 속 영혜는 고유한 개인으로 등장하지만, 남편의 개인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 영혜의 꿈은 어떤 기능을 하는가?

가부장제와 이성, 합리성에 기반한 남편 화자는 영혜의 상태를 포착할 수 없다. 영혜는 비이성과 광기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남편의 시선으로는 영혜의 상태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영혜의 상태는 이탤릭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다. 이 기울어진 글씨는 ‘퀴어의 상태’를 의미한다. ‘퀴어의 상태’는 언어를 발명해야지만 상태를 설명할 수 있으며, 기존의 언어로는 상태가 설명이 불가능한 상태를 뜻한다. 남편의 꿈의 경우에는 이탤릭체로 쓰이지 않았는데, 남편의 경우에는 무의식의 영역임에도 설명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탤릭체로 영혜의 꿈이 표현되며, 이는 아내의 1인칭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내의 첫 번째 꿈에서는 “커다랗고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기다란 대막대들에 매달려 있는 걸”(18쪽) 본다. 살덩어리가 전시되어 있는 도살, 도축의 모습으로, 가공의 과정 없이 어떻게 식탁에 고기가 올라오게 되는지를 그로테스크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 꿈을 꾸기 전 아내는 고기를 썰고 있었으며, 고기를 먹는 것이 살의와 살육과 연결되는 행동임을 직관적으로 자각하였으며, 이에 대한 공포가 꿈으로 현현하였다. 영혜는 시간이 지날수록 본인의 신체를 누군가를 억압하는 폭력의 신체로 느낀다.

무엇보다 여성시는 여성의 형식을 발명한다. 면면히 내려오는 말하기 방법 말고 다른 말하기 방식 말이다. 무엇을 말하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말하는가가 여성주의적 발성의 창안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의 말하기 방식 바깥에는 면면히 이어져내려온, 자기를 강화하고 권력을 산포하는 시적 발명물들이 포진해 있다. 나는 이와는 다른 여성의 시적 발화를 ‘들림’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여성적 들림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거절, 버려짐, 죽음을 당해본 경험의 집적 속에서 터져나온 하나의 다른, 언어를 넘어선 목소리이기 때문이었다. 이 목소리의 형식은 무너짐, 부숨, 흘러내림 같은 ‘물의 움직임’을 닮은 투명하고 둥글며 물렁물렁한 구축이다. 들림의 고통만큼 큰 것은 없다. 우주와 같은 것이 들어와 신체화되는 고통은 사람이 짐승(몸)이 되는 고통만큼이나 힘들다. 이렇게 ‘여성적 들림’으로 여성은 다른 방식의 발화자가 된다.

-김혜순, 『여성이 글을 쓴다는 것은-연인, 환자, 시인, 그리고 너』, 문학동네, 2022.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남편 중심의 합리적/이성적 언어, 즉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소외/결여된 존재를 의미한다. 영혜가 어떻게 ‘다락방의 미친 여자’가 되어가는가가 이 소설의 중심 내용이다. 「채식주의자」는 백설기 19개로 이루어져 있다. 소설의 플롯을 따라가보면, 남편서술자와 영혜서술자가 고조되고 있으며, 영혜의 꿈이 소설의 리듬을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영혜의 꿈이 4-7-10-12-13-14-16-18-19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이 함의하는 바는?

「채식주의자」는 육식의 역사와 가부장제의 역사를 겹쳐놓고 있다. 제목 ‘채식주의자’는 표면적으로는 2004년에는 비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육식을 거부하는 사람인 영혜를 나타낸다. 이면적으로는 사회의 정당성, 보편성을 벗어난 사람을 의미한다. 즉, 특이하고 유별난 존재를 가르키는 맥락에서 표현된 단어이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나는 아내의 움켜쥔 오른손을 펼쳤다. 아내의 손아귀에 목이 눌려 있던 새 한 마리가 벤치로 떨어졌다. 깃털이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작은 동박새였다. 포식자에게 뜯긴 듯한 거친 이빨자국 아래로, 붉은 혈흔이 선명하게 번져 있었다. (65쪽)

소설은 자해에서 살해로 고조되었으며, 영혜가 완전히 비이성과 광기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이 지점은 자해, 살해/이성, 비이성/피해, 가해의 영역이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러한 비이성과 광기의 영역은 남편화자의 시선으로는 볼 수가 없기에, 직접적 화자의 언어가 이탤릭체로 들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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