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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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고향을 떠나 도야마 대학에 들어간 조코는 평소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취향에 맞춰 추리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들 생각입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미남 선배 미키지마의 손에 들린 동아리 신입부원 플래카드를 보고 조코는 묻습니다.

“여긴 추리연구회죠?”

“보시다시피, 여긴 취리연구회지.”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술 향기 가득한 1년간의 동아리 라이프를 5개 에피소드로 나누어 놓은 것이 바로 이 책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입니다.

 

위의 소개를 보며 ‘취리’란 단어를 오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의도된 말장난입니다. 추리(推理)와 취리(醉理-취하는 것의 이치) 발음이 유사한 두 단어를 주인공 조코는 착각하고서 엉뚱한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는 거죠.

 

취리연구회(이하 취연)는 그 말처럼 매일같이 갖가지 핑계로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취하는 것이 모토인 동아리입니다. 미키지마는 그런 취연의 장으로써 세상 모든 것에 취하는 삶은 설파하는 기인이었고요.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제 자신의 대학 새내기 시절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집을 나와 타지의 캠퍼스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또래들과의 커뮤니티 속 새로운 규칙과 질서에 익숙해져가는 1년은 저마다에게 특별한 기억을 남기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살벌한 취업전쟁 속에 내던져 N포 세대 소리를 듣는 요즘의 청춘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미 십 수 년이 흘러버린 저의 스무 살(정확히 말하자면 19살) 캠퍼스의 모습은 책 속 도야마 대학의 풍경과 닮아 있었습니다.

 

고교생으로서 미성년자로서의 제약에서 막 벗어나 당당히 술을 마실 나이가 된 아이들은 학기 초 과모임, 동아리모임, 동기모임, 향우모임, MT 등등 거의 매일같이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잔을 기울이고 갖가지 사연들을 만들어냈으니까요.

 

조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벚꽃 날리는 봄의 야외에서, 햇살 가득한 여름의 해변에서, 그리고 눈발이 날리는 시골 료칸에서. 취연 멤버들과 술에 얽힌 채 꽃과 달과 눈에 취하고 결국 젊음이라는 끝 모를 터널 속 작은 등불 같은 이성에게 취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조코가 원래 들려했던 곳이 추리연구회였던 것처럼 작가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숨겨 취리에 추리를 더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젊음과 술이란 소재에 흔히 ‘코지 미스터리’라고 부르는 특별한 범죄나 사건 없이 일상의 소소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배치하는 것이죠.

 

그날 술자리에서 사라진 선배의 행방은? 서로가 통한 것 같은 썸녀가 갑자기 데이트를 바람맞힌 이유는? 홀연히 사라진 학교 행사 전단지를 빼낸 범인은? 이야기 속 미스터리들은 이처럼 생활 밀착형이며 소소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의 새내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겐 일견 커다란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은 어쩌면 취연의 술자리 어딘가에 나도 합석하여 사케에 취하고 타인이 보기엔 작고 별 것 아니지만 나의 삶에선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착각이 일기 때문일 겁니다.

벚꽃을 바라보며 학교 앞 삼거리 주점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던 때처럼. 갑자기 나에게 냉랭해진 여자 동기의 행동에 이유가 무엇인지 추측하던 때처럼 말이죠.

 

소소하다고는 했지만 여느 코지 미스터리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책도 매우 섬세하고 촘촘히 이야기와 복선들을 깔아놓습니다. 또한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극대화시켜 흥미를 돋우죠. 평범한 신입생 같은 조코는 사실 국민 여동생 소리를 듣던 아역 연기자 출신이고 마냥 취기에 절어 있기만 한 것 같고 무책임 4차원 같은 미키지마 선배는 나름의 진지한 고민을 품고 있다는 식으로요.

거기에 더하여 두 캐릭터 사이 구름처럼 몽글몽글 오르는 썸이 기운을 쫓아가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속 남녀들처럼 조코와 미키지마 두 사람 사이에도 애정의 역학관계가 작용하는데 작가는 사건들과 연계시켜 이 둘의 시소 같은 관계를 말랑말랑하게 그려내거든요.

 

여러 모로 따스한 봄볕을 맞으며 가볍게 읽기 좋은 추천작입니다. (사계절이 모두 담겨 있으니 시기를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추리물로도 로맨스로도 모두 훌륭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데다 일본이나 우리나 크게 다르지 않은 대학 문화 탓인지 쉽사리 빠져들고 공감할 수 있어요. 게다가 5개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된 드라마 같은 구성이기에 짬이 날 적마다 하나씩 독파하더라도 얘기를 쫓아가는 것에 무리가 없습니다.

추리/취리라는 기본 설정을 비롯하여 곳곳에 말장난(요즘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아재개그?)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역시 훌륭하게 번역하거나 설명을 붙여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배려된 점 역시 책을 즐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청춘은 긴 터널이다. 누구나 눈을 꼭 감고 싶어질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 달리고 있을 터지만, 터널 한가운데에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선배의 잠든 얼굴을 관찰하면서, 매화주 소다를 꿀꺽꿀꺽 다 마셔 버렸다. 선배 말대로 나는 여전히 술에 취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 이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젖어 있어야지.

"어이, 살아 있어? 술잔"
"...아마도, 네, 살아 있어요"

"여긴 추리연구회죠?"
"보시다시피, 여긴 취리연구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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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대륙기 1 블랙 로맨스 클럽
은림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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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륙기

 

은림 작가를 처음 접한 건 <할머니 나무>라는 단편을 통해서였습니다. 죽음 대신 나무로 변하는 것으로 인생의 황혼을 맞게 되는 모계 유전의 세대를 소재로 다룬 단편은 독특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현실의 고민들을 담아냈습니다. 더불어 따뜻한 마무리까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고 우아한 판타지였지요.

그런 작가의 신작 장편이 판타지이고 심지어 제목은 <나무 대륙기>라는 소식을 접했을 적에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기대감으로 설렜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권을 모두 합해 8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장편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상징적이며 압도적인 인상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서로의 이름을 닮은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두 소녀, 무화와 서미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반역의 죄로 남편은 숙청당하고 목숨만 부지한 채 유폐당한 목국의 공주 녹옥은 시간이 흘러 누명을 벗고 복위하게 되고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딸 서미는 노래하는 나무 상단의 잡부에서 반공주의 신분으로 격상되어 왕실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녀의 곁에는 처음 울음을 울었던 유배지에서부터 이웃하며 함께 살았던 친구이자 지금은 수행원인 무화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소녀를 호위하는 것은 세도가의 자제이자 신비한 은발에 경국지색이라 부를만한 미모의 남자(!) 반하 역시 함께하고 있지요.

나무의 전설을 품은 가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얼핏 흔하디흔한 왕실과 귀족의 세력 다툼과 후계를 위한 암투를 그리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페이지를 넘겨보면 그것은 하나의 층위일 뿐임을 알 수 있지요.

은림의 나무대륙기는 쉽게 읽기엔 어려운 책입니다. 작가는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시키고 다층적으로 구성함으로서 다양한 접근과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를 만들어냅니다. 전설에서 비롯된 세계관이 있고 마법과 도술의 규칙들이 존재하고 이인종에 용이 등장하는데다 공포와 무협적 요소까지 등장하지만 이것은 이야기의 외형을 구성하는 첫 번째 층위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 아래에 다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에 대한 여성 주의적 사변이 나오고. 존재의 규정에 관한 철학적 상징들을 혼입하기도 하며 권력의 양태에 대한 풍자적 요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결말로 이어지는 사건의 묘사에선 양자물리학의 흔적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 모두가 여러 개의 레이어로 존재하면서 서로 겹쳐지며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 또한 다채로워서 동양 판타지적 세계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종 고딕 공포소설이나 무협지의 컨벤션에도 발을 담그기도 합니다.

전자의 다층적 구성과 상징은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하며 전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형성한다면 후자의 다양한 서술방식은 그런 작가의 의식을 보다 편하고 익숙하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곤 합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용은 모든 시간이 하나의 현재로 인식되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또한 서로의 신분을 수없이 뒤바꾸고 서로의 삶을 간섭하며 친목과 반목을 거듭하는 꽈배기처럼 꼬인 하나의 운명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두 주인공 서미와 무화는 종종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식하고 상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주요 인물들의 성별은 종종 모호해지기도 하는데 서미와 무화 모두 자신들의 사정 때문에 남장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고 몇몇 캐릭터들은 존재를 바꾸며 성별이 바뀌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이야기에서 거대한 위기로서 등장하는 어둔의 존재를 묘사하는 때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호하고 다중적, 다의적인 설정과 존재들은 끊임없이 수수께끼와 의문을 던지며 다음을 또는 이야기의 이전을 궁금하게 만들며 또한 그 자체로 거대한 혼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전투와 주요 인물들의 대립은 마치 빅뱅 직전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 세대의 끝을 종결짓는 마지막 페이지는 그래서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서사와 설정의 모호성은 서술의 방식에도 개입하는데 작가는 현재의 장면과 회상, 그리고 환상의 장면을 종종 명확한 구분 없이 이어서 써냅니다.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고작해야 따옴표가 홑이냐 겹이냐 정도라서 몇 번인가 책장을 뒤로 넘기며 내가 잘못 건너 띄고 읽은 건 아닌가 확인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서 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며 현재로 인식하는 작중의 용이라는 존재가 서술한 것 같은 표현 방식은 분명 의도된 것이겠지만 짐짓 불친절하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염려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은림 작가의 <나무 대륙기>는 작가 후기에서도 슬쩍 내비친 것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작가가 구상하고 다듬어낸 세계관과 이야기를 공들여 쌓아올린 작품입니다. 작가의 고민이 담긴 만큼 제대로 이야기를 읽어내려면 독자 역시 가볍게 읽어 내리기보단 조금은 천천히 숙고하고 음미하며 즐기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펴내는 국산 장르소설들이 종종 그러하듯 <나무 대륙기>역시 페이지 한 장, 한 장이 제법 무겁고 그만큼이나 풍부한 문학입니다.

 

장르적 재미와 생각할 ‘꺼리’를 찾는 지적인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세상은 한 그루의 나무, 목숨은 매일 피고 지는 꽃, 시체가 쌓여 땅이 되고, 마음은 하늘이 되고, 소원은 바람이 되고...

우주는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모든 것들의 숫자만큼 많단다.

너는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좋아, 그럼 이 대답을 알아내 봐. 나무에게서 꺾인 가지가 홀로 자라면 그건 이전의 그 나무일까? 새로운 나무일까?

속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무화의 눈이 떠졌다. 태어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눈이 무화를 보고 있었다.

"심연이 눈을 떴어요."

무화의 입에서 서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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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맨의 재즈 밀리언셀러 클럽 144
레이 셀레스틴 지음, 김은정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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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맨의 재즈 (The Axeman's Jazz)

 

1918년 5월부터 1919년 10월까지 미국의 뉴올리언스 지역에서 동일 인물에 의한 것이라 여겨지는 일련의 살인/살인기도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끝내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이 연쇄살인마는 도끼를 주로 사용해 흉악한 방법으로 피해자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1919년 지역 신문사엔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일종의 범행성명과 같은 편지를 보냅니다. 해당 신문사 지면을 통해 공개된 편지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시간을 예고하는 내용과 함께 재즈가 연주되는 곳이라면 자신의 손길이 피해갈 것이란 장난스런 공언이 담겨 있었지요. 그리고 마지막 서명란에 범인은 자신을 The Axeman, 즉 도끼 살인마라고 스스로 지칭하게 됩니다.


바로 뉴올리언스 지역에서 모두 6명의 사망자를 낸 미스터리한 연쇄살인마 액스맨 사건입니다. 이 끔찍한 범행은 처음의 갑작스런 시작처럼 그 끝도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왔습니다. 뚜렷한 용의자도 없는 상태에서 더 이상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국 영구미제로 남음으로서 더더욱 기괴함을 더하는 사건이 되어버렸지요.

 

레이 셀레스틴의 ‘액스맨의 재즈(The Axeman's Jazz)’는 바로 이 사건을 소재로 삼고 있습니다. 실재 신문에 실린 기사의 내용을 거의 그대로 인용한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작가는 1919년 여름 초입의 눅눅하고 어딘가 불안한 뉴올리언스 거리로 독자를 끌어당깁니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마지오 부부는 도끼에 난자당한 채 자신들의 집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몇 개월간 액스맨의 공포가 도시를 야금야금 물들여가는 가운데 경찰들은 범인의 윤곽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형편이지요. 범행의 대상이 연달아 이탈리아계 이주민이란 점에서 경찰 내부에서도 액스맨의 정체가 인종적 갈등 속에 증오를 품은 유색인이란 추측과, 이탈리아 마피아가 관련된 커뮤니티 내부의 사건이란 의심이 충동하고 있지요.


본래 사건이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는 범인에 대한 명확한 인상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 범인을 추적하는 서로 다른 세 명의 인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요.


하나는 액스맨 사건을 전담하고 있는 경찰 '마이클'입니다. 얼핏 사건을 진두지휘하는 책임자처럼 보이는 그이지만 일전에 동료 경찰의 부패를 밀고하고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는 평을 듣고 있는 가운데 이번 액스맨 사건이 지지부진 하면서 그 자리마저 위태한 상황이지요. 동료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고 상부의 압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사건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시체의 수만 늘어나고 있지요.

더불어 여전히 인종차별이 만연한 가운데 백인과 유색인종의 결혼 자체가 불법인 남부 뉴올리언스에서 그는 흑인 여성과 몰래 결혼을 하고서 두 아이를 두고 있습니다. 주위에선 이를 의심하면서도 쉬쉬하고 있지만 이 역시도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인 셈이고 마이클은 가정을 위해서 그리고 직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도끼 살인마를 잡아야 할 형편입니다.


또 한 명의 추적자는 이제 막 형을 마치고 교도소에서 출감한 전직 경찰 '루카'입니다. 그는 한때 마이클의 동료 형사였고 이탈리아 마피아와 얽혀 뒷배를 봐주는 부패경찰이기도 했지요. 그리고 그런 비위를 마이클이 고발하면서 체포되어 범죄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열악한 옥중 생활 가운데 만성 위장질환을 얻고 나온 루카는 잡혀 들어가기 전 모아두었던 돈이 불법자금으로 환수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었고 처지가 이러하니 당연히 전 직장인 경찰 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미국 이민자의 삶에 넌더리가 나버린 듯, 출감한 루카의 소원은 자신의 고향 이탈리아로 돌아가 촌부의 삶을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를 도와주고 대가로 부리던 마피아 보스 카를로는 그에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할 것을 제안합니다. 일만 잘 처리해 준다면 넉넉하게 돈을 쥐어주고 이탈리아로 돌아갈 배편도 마련해주겠다는 카를로의 ‘절대로 거절 못할’ 부탁 또한 도끼 살인마를 잡는 것인데요.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연달아 살해되면서 그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마피아 보스로서 위치가 의심받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함이 이유입니다. 루카는 별로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카를로의 제안을 가장한 명령을 거절할 수는 없기에 결국 형사시절 실력을 발휘하여 범인 잡는 일에 나서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은 핑커튼 탐정 사무소의 조수로 일하고 있는 젊은 흑인 여성 '아이다'입니다. 새파랗게 젊은 이 여성은 어려서부터 탐정소설에 심취했고 그를 쫓아 핑커튼 사무소에 취직했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북부와 달리 남부에선 핑커튼의 이름값이 고만고만했고 사무소라고 해봤자 상관과 그녀 단 둘이서 운영하는 가운데 시시껄렁한 심부름이나 하는 상황이지요. 이런 가운데 희대의 살인범 액스맨의 등장은 강렬한 자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이다는 상관 몰래 독자적으로 사건을 수사하며 액스맨의 정체를 밝혀냄으로서 탐정으로 실력을 인정받으려 합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에서 동료이자 조수 역을 하는 죽마고우인 청년이 등장하는데요. 아이다의 친구이자 코넷 연주자인 친구의 이름은 루이스 암스트롱,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재즈 트럼펫 연주자 겸 가수 루이 암스트롱입니다. 실재 1919년 18살의 루이 암스트롱은 뉴올리언즈에서 재즈 밴드 활동을 하며 유명 뮤지션들의 실력을 어깨 너머로 배우고 있었으니 실존인물의 잘 알려지지 않은 시절을 이야기에 접목하는 상상력은 매우 기발하면서 적절해 보입니다. 작중에서 묘사되는 소년원 시절이나 밴드 활동 묘사 등은 진짜 루이 암스트롱의 일대기를 적절히 차용한 역사들이라 픽션 속 캐릭터 루이스에 무게감을 실어주기도 합니다.


마이클, 루카, 아이다. 경찰, 전직경찰, 탐정 지망생 이란 세 명의 캐릭터를 번갈아 비춰가며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1차 대전이 끝나 군인들이 대거 고향으로 돌아오고 군항으로 번창했던 지역 경제가 침체하고 금주법 시대가 예고되는 가운데 불안한 경제 상황. 경찰, 지역 행정기구의 부패. 마피아와의 결탁, 범죄조직 내부의 음모. 인종차별과 이민자들 사이 갈등처럼 당시 시대상을 실감나게 묘사하면서도 이야기에 감쪽같이 녹여내는 솜씨 역시 뛰어납니다. 덕분에 20세기 초반 미국 남부의 분위기와 시대상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잔인한 연쇄 살인마를 추적하는 탐정물을 보는 재미도 동시에 즐길 수 있었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원전이 된 실재 살인사건은 끝내 범인이 잡히지 않고 미제로 남아버렸습니다. 덕분에 범인의 정체에 대해선 여러 가지 추측만이 가능할 뿐입니다. 이야기는 그런 가능성들을 토대로 작가적 상상력을 덧붙여서 매우 구체적으로 도끼 살인마의 정체를 그려내는데요. 그에 얽힌 드라마에 조금 과하게 극적 장치들이 배치된 느낌은 있지만 논리적으로는 범인의 정체도 그리고 실체에 다다르는 세 탐정들의 과정도 모두 잘 설계된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범인은 그 존재나 살인 동기가 앞서 묘사한 시대적 부조리와 얽혀져 있어서 전체적인 그림이 마지막 반전의 트릭과 아귀가 들어맞는 것 같은 쾌감도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세세하게 잘 설계된 구조물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스포일링이 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밝힐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책을 읽을 분이라면 후반부의 재미를 두 배로 즐기기 위해서 책갈피 대신 작은 메모장 하나 정도는 준비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봅니다. 일단 탐정 역할만 세 명인데다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막판에 하나로 묶이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바짝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소소한 재미들을 놓치거나 치밀하게 구성된 사건의 진상과 관계를 온전히 읽어 내리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액스맨의 재즈>는 실재 사건을 토대로 재구성하고 밝혀지지 않은 사건의 진상을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허구의 공간에서 밝혀내는 쏠쏠한 재미가 있는 책이었습니다. 아이디어나 구상에서 한국영화 <살인의 추억>이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두 작품 모두 해결되지 않은 과거의 사건을 통해 그 시대의 부조리를 들춰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고, 도한 이야기의 클라이막스에선 엄청난 비가 내리는 가운데 모든 인물들의 갈등이 폭발한다는 지점도 유사합니다.

다른 부분이라면 결말이겠지요. 실재 사건의 아쉬움을 가져와 끝내 범인의 실체를 밝혀내지 못하고서 보는 이의 뒷골을 잡아당기는 것 같은 찜찜함을 남기는 <살인의 추억> 속 결말과 달리 <액스맨의 재즈>는 나름의 명확한 결말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울하고 절망적으로만 보이던 캐릭터들을 향한 작가의 애정이 얼핏 엿보이는 마지막 에필로그 역시도 좋은 여운을 남기는 책이었네요.

 

- 나는 재즈 음악을 좋아해. 지옥의 모든 악마를 틀어 맹세컨대 내가 말한 시간에 집에서 재즈 밴드가 한창 연주 중이라면 그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무사할 거야.

- 뉴올리언스는 달랐다. 이곳은 미국의 어두운 면이었다.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인구수가 많았고, 인종의 경계가 희미하고, 기후마저 열대 기후였다.

- 뉴올리언스가 미국에 마피아들이 처음 들어온 도시라는 사실을 아나?

- 루이스는 뉴올리언스에서 검둥이로 사는 가혹한 현실이 싫은 만큼, 뉴올리언스가 다른 사람의 권위나 다른 세상에 무관심한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 뉴올리언스에 있는 모든 것이 음악과 함께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회부터 장례 행진, 홍보하는 마차, 길모퉁이 물건 행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음악과 함께였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마치 아무 노래라도 부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 도끼 살인마, 당신을 5월의 꽃처럼 환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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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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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제노사이드의 기저엔 우생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죠. 아름답고 강한 것이 우월한 것이고 인류가 더 나은 종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열성인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발상의 극단은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번져 가장 끔찍하고 사악한 형태의 참상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우생학에 기초한 유사한 발상들은 비단 나치 독일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죠. 장애인들은 거세를 당하고 동성애자들은 핍박을 받고 살해위협을 받으며 인류의 적으로 몰렸습니다.

DNA지도가 그려지고 유전과 진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지금도 사람들은 종종 유사한 발상을 떠올리곤 하지요. 유전자를 조작해 우월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환상 말입니다. 길고 긴 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월한 집단이 살아남았다기 보다 살아남은 집단이 지배적 종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런 건 이런 주장에서 중요치 않습니다.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운동선수를, 아름다운 외모의 연예인들을, 명석한 두뇌의 학자들을 보며 오늘날의 대중은 ‘우월한 유전자’라는 드립을 날리곤 하니까요.


작가 피어스 브라운이 ‘레드 라이징’에서 그린 머나먼 미래의 세계는 이러한 편견이 극대화된 곳입니다. 달 개척을 시작으로 우주로 뻗어간 인류가 21세기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지구정부를 몰아내고 태양계 전체로 식민지를 늘려가는 몇 백 년 후의 미래. 우주인류는 월등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우생학이 꿈꾸던 세계를 구체화 시킵니다. 소위 우월한 유전자들이 가려지고 그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며 대물림 되는 극단의 계급사회로 이루어진 인류문명이 우주적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유전자 단위의 계급 차는 ‘색’으로 구분이 됩니다. 가장 월등한 재능을 타고 나는 귀족과도 같은 최고위층은 ‘골드’로 그리고 가장 열등하여 자신들이 사는 세계의 실체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지하에서 죽어라 노동만 하다 죽어가는 육체노동 계급은 ‘레드’로 칭해집니다.

그리고 화성의 지하, 거기에서도 가장 극악한 환경의 광산에서 헬륨을 채취하기 위한 거대드릴을 조종하는 헬다이버 대로우는 최하위 계급 레드인 16세 소년입니다. 하지만 거친 환경과 열악한 생활 속에서 단명하는 레드 계급이기에 그는 이미 결혼을 한 가장입니다. (계급 사회에서 지도세력들이 보기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하층민의 가장 큰 미덕은 빨리 결혼해서 많은 아이-노동력을 생산하고 자신은 실효성이 줄어들고 헛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사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골드들 만큼이나 아름다운 아내 ‘이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요.


열악한 속에서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오고 위로 올라갈 작은 희망이 있으리란 기대가 꺾이고 부조리한 현실이 대로우의 눈앞에 닥친 어느 날. 이오는 낙담한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레드들에겐 금지된 상층 구역으로 대로우와 몰래 숨어들게 됩니다. 잠시의 행복한 시간은 이내 관리계급인 그레이들에 의해 어그러지고 두 부부는 법을 어긴 벌을 받게 되지요. 언제나 부조리한 계급 체제에 분노하던 이오는 그들에게 처벌을 내리기 위해 나타난 골드 앞에서 저항의 뜻으로 금지된 노래를 부르고 사형에 처해집니다. 잔인하게도 이오의 교수형을 위해 중력 대신 무게추를 대신하여 죄인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은 가족, 즉 그녀의 언니와 대로우고요. 절망의 나락에서 대로우는 자신도 법을 어기고 광장에 내걸린 아내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고 자신도 교수대에 오릅니다.

죽은 줄 알았던 대로우, 하지만 눈을 뜬 곳은 놀랍게도 저승이 아닙니다. 화성의 저항세력 ‘아레스의 아들들’의 아지트지요. 그들은 그를 살려준 대신 자신들의 말이 되어 어떤 작전에 나설 것을 요구합니다. 유전자 단위에서 신체를 개조하는 것. 바로 ‘골드’가 되어 최상층 계급 속에 숨어드는 스파이가 되는 일이지요.


소설의 초반부는 장구한 설정과 레드로서 대로우의 비루한 일상, 그리고 그것이 파괴되는 과정을 조금은 느릿하게 그려냅니다. 마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준비운동과 같은 느낌의 초반부를 통해 우화적이고 극단적인 이야기에 독자가 조금씩 젖어들게 해주는 것이지요.

이렇게 펼쳐진 대로우의 절망과 부활, 그 끝에 마침내 골드로 자신을 개조하여 첩자가 되어 골드 세계에 숨어들게 되면 이어지는 것은 골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해 최종적으로 지도자가 될 자질이 있는 ‘흉터를 입은 비할 데 없는 자’란 칭호를 얻기 위한 시험입니다. 필기시험과 체력테스트 그리고 면접을 통해 걸러진 인원들은 각각 고대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딴 감독관인 ‘프록터’들에게 배정이 됩니다. 그렇게 갈린 팀들이 통제된 구역에서 각각의 성을 사수하며 다른 성의 깃발을 빼앗는 모의 전쟁이 최종 시험이 되는 것이지요. 대로우는 개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마르스 성에서 성의 우두머리 격인 프라이머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실력을 인정받고 비할 데 없는 자로서 졸업을 하여 계급 반란의 순간 군사력이 될 선단의 지휘관이 되는 것이 아레스의 아들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의 스토리나 과정들이 익숙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도 그랬어요. 마르스, 미네르바, 세레스 같은 성에 골드 아이들이 배정되는 장면은 마법 모자를 뒤집어 쓴 해리 포터가 반 배정을 받는 모습 같습니다. 그렇게 나뉜 아이들이 통제된 공감에서 모의 전쟁을 치루고 그들의 모습은 하나하나 감시되어 점수가 매겨지고 후원자들의 간택을 받게 되는 설정은 헝거게임과 겹쳐 보입니다. 다양한 컬러의 계급들이 마치 카스트처럼 저마다 정해진 롤이 있다는 것은 (레드는 노동자, 그린은 기술자, 그레이는 하위경찰 같은) 다이버전트의 세계를 닮았고요. 그렇게 또 하나의 십대 주인공이 등장하는 SF 시리즈인 모양이네 심드렁해지는 순간, 그러니까 본격적인 모의전이 시작되면 <레드 라이징>만의 전혀 다른 개성이 드러나며 이야기의 진가가 도드라지기 시작합니다.

시리즈의 시작인 <레드 라이징>의 백미는 이전의 십대 대상의 SF나 판타지는 범접 못할 높은 수위의 폭력과 SF의 설정을 뒤집어 쓴 아래 펼쳐지는 창과 칼의 고대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중반부터 펼쳐지는 모의전쟁은 헝거게임보다는 차라리 코난 시리즈에 가깝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소설이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전쟁들을 묘사한 역사극과도 닮아 있고요. 분명 하늘을 나는 반중력 신발, 화성의 중력, 레이저 무기가 등장하지만 아이들이 펼치는 전쟁은 피와 살점이 튀고 흙냄새와 눈의 냉기가 느껴지는 고대의 전쟁입니다.

정말로 시험을 치르는 골드 아이들이 서로를 살해하고 죽어 나가는 가운데 골드란 계급에 가려져있던 아이들의 본성이 드러나고 정치와 음모가 판치는 가운데 인물간의 갈등선이 굵직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는 거칠지만 묵직한 맛이 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이야기의 변곡점마다 밝혀지는 반전과 그를 위해 사전에 촘촘하게 설계된 단서와 복선들을 음미하는 재미도 쏠쏠해서 조금은 지리한 면이 있던 전반부를 넘겨 시험이 시작된 이후로는 좀처럼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말 그대로 틀을 깨는 극적 구조와 캐릭터들의 성장 그리고 목숨이 걸린 전쟁 속에서 레드란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대로우가 점차 극단적 계급 사회의 민낯을 발견하는 과정까지 이어지는 후반부로 넘어가면 점점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쉽고 조금은 불안해지기도 했습니다. 단권으로 끝나는 책으로 알고 시작했던 것이 이제 겨우 골드로 가장한 레드의 일대기가 시작한 부분에서 끝이 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어질 시리즈의 다음권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로우의 선택에 대해서는 서사적 구조로서 당연하다 볼 수 있겠지만 동시에 현실의 세계에서 보아오던 모습들과 겹쳐져 이후의 대로우란 캐릭터에 대해 일말의 불안이 일기도 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괴물을 잡으려다 스스로가 괴물이 된다’라는 경계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컬러로 구분된 선명한 계급사회, 개중에서도 최상위층인 골드들이 다시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서로를 죽이는 모의 전쟁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골드는 말 그대로 금수저, 레드는 흙수저로 단순화 시켜 대응시켜보면 소스라칠 정도로 겹쳐지는 우화가 되니까요. 이 외국 작가가 설마 21세기 대한민국을 모델로 소설을 쓴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스포일러가 되기에 직접적 언급은 않겠지만 후반부 이야기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칼’이란 캐릭터와 그에 얽힌 이야기는 당장이라도 비슷한 사례를 신문에서 집어낼 수도 있을 것 같지요.)


책은 1년에 걸친 기나긴 시험의 과정을 골드로서 통과한 대로우의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그 모습은 기나긴 입시지옥과 그보다 치열한 취업전쟁이란 살벌한 현실에서 친구를 동기를 밟아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에야 겨우 학생이란 신분을 털어내고 사회에 발을 딛는 오늘날의 청춘들을 닮아 있습니다. 아마도 시리즈의 다음 책인 골든 선(Golden son)은 그나마 알량하던 학생신분이란 보호벽마저 사라지고 생존이란 싸움에 내던져져 미생의 삶을 사는 한국의 사회초년병을 닮아있는 대로우를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무겁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강인한 레드 소년이 어떻게 골드들 속에서 자신을 증명해낼지 기대되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각하. 저렇게 열성적인 사람은 오직 저 아이 하나뿐입니다. 저 아이와 의견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고 동조하는 자도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친구? 걔들이랑 친구라고? 그 골드놈들이랑? 그들은 괴물이야. 영혼이 없는 개자식들이야."

"둘러봐, 여기엔 골드가 없아. 난 레드야. 넌 레드야. 누군가가 권력을 충분히 갖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 레드들이야.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 권리가 생겨. 우리의 법을 만들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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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반지의 초상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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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님의 세계는 여전히 확장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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