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괴




남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심각한 표정으로 매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투명한 유리 장식장 위에 진열된 자그마한 장난감 같은 전자기기들을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은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 마냥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모습을 놓치지 않고 유니폼 차림의 여성 점원이 쪼르르 달려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 찾으시는 제품이 있으신가요?”

남자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머리를 긁적이며 점원에게 말했다.

“MP3를 사려고 하는데요. 종류가 워낙 많아서 뭐가 뭔지 모르겠네요.”

“어떤 기능을 원하시는데요?”

“아, 그게 제가 쓸 것은 아니고요. 딸아이 생일 선물을 사려고요.”

“그러세요, 자제분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점원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매대 안쪽의 진열장 문을 열며 물었다.

“올해 중학교 3학년입니다.”

“그럼 곧 고등학교 올라가겠네요, 그러면 영상 강의도 들을 수 있게 동영상 기능이 좋은 이런 제품은 어떠세요?”

점원은 진열된 제품 중 제법 덩치가 큰 제품을 꺼내 진열장 위에 올려놓는다. 크다고 해봤자 딸아이 손바닥 크기가 채 되지 않는 정도다. 그나마도 액정화면이 몸체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번들번들 광채가 나는 검은색 몸체를 보며 남자가 말했다.

“글쎄 여자아이가 쓰기엔 좀 둔탁해 보이는데 색깔이나 디자인이 다른 건 없나요?”

“아버님이 세심하시네요, 그럼......”

점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번엔 펄이 들어간 핑크색 몸체의 기계를 꺼내 놓았다. 크기는 좀 전의 것과 비슷하지만 액정 크기가 훨씬 작다. 하지만 심플한 디자인에 두께도 얇아서 휴대하기 편하고 딸아이가 쓰기에도 무리가 없어 보인다.

“기능은 아까 것하고 차이가 있나요?”

“이건 전자사전 기능에 DMB도 지원되는 모델이고요, 여기 핑크색 제품은 그 기능은 빠져 있는 겁니다.”

남자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전자사전 기능은 딸아이가 자주 쓸 것 같지 않았다. 종이 사전도 있고 예전에 전자사전 기능만 있는 기기를 사준 적도 있었다. DMB도 매일 손에 들고 떼어놓을 생각을 않는 핸드폰으로 보면 될 일이다. 역시나 이거저거 부담스럽게 기능이 많은 것보다 기본 기능에 충실하면서 디자인도 예쁜 쪽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런 그의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는 점원의 시선을 느낀 남자는 괴고 있던 손으로 턱을 쓰다듬고는 곧바로 핑크색 기기를 가리켰다.

“그럼 이쪽으로 하지요.”

“예, 그렇게 하시겠어요. 그 쪽은 할인가로 23만 3천원입니다. 계산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카드요.”

직원은 매대 안쪽에서 상자에 든 신품을 꺼내 남자에게 확인시키듯 보여주며 물었다.

“선물포장 해드릴까요?”

“그런 것도 해주나요?”

“물론이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지갑을 꺼내 손에 든 채 남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포장을 하던 점원이 연신 그의 얼굴을 살펴보는 것을 알아챈 남자는 난처한 듯 시선을 돌려 괜히 진열된 물건을 살펴보는 척을 했다.

“여기 다 됐습니다.”

포장이 다 된 MP3 상자를 종이봉투에 담아 남자에게 건네주고 카드를 받아 든 점원은 계산대 옆에 설치된 리더기에 카드를 긁으며 다시 한 번 남자의 얼굴을 훔쳐본다.

“할부로 하시겠습니까?”

“예, 3개월 할부 해주세요.”

점원은 출력된 영수증에 사인을 받기 위해 남자에게 내밀었다. 그가 사인을 하고 있는 사이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크게 심호흡을 하던 점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어 왔다.

“저...... 실례지만 혹시 구진태 작가님 아니세요?”

“아, 예 그렇습니다.”

남자는 난처할 때면 꺼내 보이는 대외용 표정을 지어보이며 작은 소리로 답했다.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그저 몇몇 인터뷰와 TV 출연을 했을 뿐인데 지금처럼 얼굴을 알아보고 아는 척 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여간 난감한 게 아니었다.

“작가님 책 너무 감명 깊게 읽었어요.”

“감사합니다.”

진태는 사인을 한 영수증을 내밀었다. 잽싸게 영수증을 분리해 마지막 장을 그에게 주며 여점원은 황급히 말했다.

“잠시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곧 쪼그려 앉아 매대 아래를 뒤적이던 점원이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진태가 쓴 책이었다. 신국판 387페이지의 양장본, 표지에는 인기 록그룹의 음반 표지 작업 등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절규하는 여자의 그림과 함께 ‘타락’이라는 제목이 진청색으로 박혀있다. 양장본은 3만부 발간 기념 차 500부 한정으로 찍어 판매했던 것이다. 그런 책을 그것도 일하는 곳까지 들고 다니다 작가와 만나다니 굉장한 우연이던지 어지간히 책에 빠진 모양이다. 사실 ‘감명 깊게 읽었다’는 말에 진태 스스로 당황스러웠다. 그런 반응들을 종종 접하긴 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의 책이 감명 받을만한 것은 아니었다. 진태는 책을 양손으로 꼭 움켜쥔 채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성을 난처한 듯 바라보았다. 20대 초반 정도 되었을까. 이제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어린 친구가 자신의 책에서 받았다는 감명이란 무엇일지 궁금해졌다.

“사인, 부탁해도 될까요?”

“방금 했는데요.”

“아니요, 여기 책에다.”

재밌다는 듯 웃으며 책을 내미는 점원의 반응에 진태는 방금 자신의 말이 꽤나 썰렁한 유머로 들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전 영수증에 사인을 할 때 사용한 볼펜으로 책 속지에 사인을 했다. 책이 알려지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뒤 갑자기 사인할 기회가 많아졌기에 익숙해진 일이다.

“감사합니다.”

“뭘요, 제 책을 좋아해 주신다니 제가 더 감사하죠.”

어떻게든 자신을 붙잡아 두고 싶은 기색이 역력한 점원에게 형식적인 답을 던지고선 진태는 딸에게 줄 선물이 든 종이가방을 들고 황급히 매장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점원에게 동료가 다가와 묻는다.

“누구니?”

“구진태 몰라, 이 책 쓴 소설가. 여기 사진도 있잖아.”

작가 소개 위에 붙은 흑백사진을 손으로 가리키며 점원은 호들갑을 떨었다.

“잘생기긴 했는데, 늙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미중년?”

“그러게, 중학생 딸이 있다네.”

“이제 정신 차리시고, 일에 집중하셔.”

허리를 쿡 찌르며 핀잔을 주는 동료에게 혀를 쑥 내밀어 보이며 점원은 행복한 표정으로 진태의 사인을 다시 확인한다.




진태는 자신의 미니 쿠페를 집으로 향하는 도로에 올렸다. 라디오 프로 출연을 위해 모처럼 나온 서울 도심의 복잡한 교통 흐름은 좀처럼 적응 되지 않는다. 복잡함이 싫어서 한창 값이 오르던 아파트를 팔아 치우고 시외각의 주택단지로 이사했지만 책이 히트한 후 시내로 오는 일이 잦아졌다. 자신의 글이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이니 좋아해야 마땅하지만 역시나 이런 불편함에 익숙해지긴 힘들었다. 방금도 갑자기 끼어드는 중형 세단의 기세에 황급히 핸들을 돌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라 곳곳에서 들어오는 부탁에 휘둘려 여기저기 얼굴을 들이밀고 있지만 이제는 좀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책의 홍보를 위해 얼굴을 팔지 않아도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남긴 유산만으로 평생 먹고 사는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마냥 한량으로 사는 것이 내키지 않아 어린 시절부터 꿈이던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이렇게까지 성공하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거의 자비 출판이나 다름없었던 처녀작은 지금 보면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이후 1년이 넘는 습작 기간을 거쳐 쓴 두 번째 작품이 작은 공모전에서 수상하며 연이 닿아 출간을 할 수 있었지만 반응은 여전히 미적지근했다. 출판사 측의 제의로 세 번째 작품을 쓰기 시작했고 그렇게 나온 것이 ‘타락’이었다. 인생 삼세번이라고 했던가, 세 번째로 나온 ‘타락’이 드디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뜨거운 반응을 끌어내며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타락’이 히트하면서 이전에 출간한 두 권의 책도 함께 판매량이 오르고 있었다. 첫 번째 책은 스스로 창피한 나머지 더 찍어내지 않으려 고집부리다 독자들의 성화에 대폭 수정을 거친 끝에 재발간을 할 정도였다. 남들이 보면 배부른 고민이라 하겠지만 지금의 성공엔 진태 개인으로선 조금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아내가 집에서 걸어온 전화다. 핸즈프리를 깜빡하고 나온 걸 기억하고 전화를 받기 위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일은 끝났어?”

“응, 지금 집으로 가는 중이야. 미영이는?”

진태는 조수석에 놓아 둔 딸아이의 선물을 손가락으로 두들기며 물었다.

“아직 안 들어왔어, 친구들하고 놀다가 들어온다고 했는데 좀 늦네.”

아내의 목소리에서 불안한 심정이 전해졌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저녁 8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딸의 통금 시간은 암묵적으로 9시였지만 그래도 늦어질 경우 중간에 연락 해 둘 것을 교육시켜왔다. 아내의 걱정 어린 말투로 보아하니 딸아이의 연락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알았어, 좀 있으면 도착하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봐.”

“그래, 빨리 와.”

통화를 마친 진태는 다시 딸의 단축 번호를 누르려다 잠시 머뭇거렸다.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는 슬슬 아이 취급 받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나이였다. 통금 시간이 되기도 전에 전화부터 걸어대는 부모가 되고 싶진 않았다. 얼마 전에도 딸의 귀가가 늦어지자 오 분 간격으로 전화를 걸어댄 적이 있다. 그 시각 딸은 친구들과 노래방에 있었다. 노래방의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핸드폰 벨소리가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걱정이 된 진태는 알고 있는 딸의 친구들 연락처에 전부 전화를 돌렸다. 집에 돌아와 그 사실을 안 미영이는 아빠 때문에 친구들한테 창피해 죽겠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딸의 맘이 풀리기 까지 걸린 두 주 가까운 시간은 진태에게 무척 곤욕스러운 경험이었다. 게다가 오늘은 딸의 생일이었다. 특별한 날인만큼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놀고 싶은 마음을 헤아려 줄 필요도 있었다. 전화기를 도로 주머니에 넣고 차의 브레이크를 풀었다. 일단 집으로 어서 돌아가 혼자서 걱정하고 있을 아내를 안심시켜야 할 것 같았다. 일과를 마치고 시내를 빠져나가는 기나긴 차들의 행렬에 진태의 쿠페도 슬그머니 섞여 들어갔다.




9월, 초가을의 해는 부쩍 짧아 졌다. 아직 7시도 되지 않았는데 해는 이미 동산 너머로 모습을 감추었다.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 돌아가는 샛길을 소녀는 가방을 둘러 맨 채 타박타박 걷고 있다. 귀 밑에서 단정하게 다듬은 짙은 검정의 단발머리가 걸음을 내딛을 때 마다 찰랑거린다.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발끝을 바라보며 나아가던 소녀는 무언가 이상한 기운을 느낀 듯 흘끔 뒤를 돌아본다. 반팔 교복 상의의 하얀 옷깃 주름이 소녀의 목을 타고 한껏 당겨졌다. 무릎을 덮는 남색 치마 아래로 이어진 하얗고 가느다란 다리가 멈추어 선다. 그 아래 검은색 단화를 신은 작은 두 발은 길 가운데 선채 주춤 거린다.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샛길과 그 옆으로 이어진 수풀을 뚫어져라 살펴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소녀는 새삼스레 주위를 둘러본다. 일몰과 함께 찾아든 푸른 기운이 길가에 선 나무 가지에 걸려 늘어지듯 길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고개를 갸웃 거리며 다시 돌아선 소녀는 가던 길을 재촉한다. 단화 밑창과 바닥에 깔린 잔돌들이 부닥치며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자박, 자박, 자박......’

순간 소녀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린다. 자신의 발소리에 맞추어 길 뒤편에서 누군가 함께 걷는 발소리가 들린 것만 같다. 다시 멈추어 서지만 이번엔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앞으로 뻗은 샛길 끝을 바라본다. 앞으로 50여 미터만 더 가면 넓은 길이 나오고 아파트 단지에 이어진 상가가 나온다. 아직 가로등이 켜질 시간은 아니지만 상가에서 흘러나온 전등 불빛만으로 큰길은 이곳보다 훨씬 밝았고 오가는 사람도 많았다. 소녀는 좀 더 빨리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엔 훨씬 크고 분명하다. 둔탁하고 묵직하게 바닥을 딛는 소리는 분명 남자의 발걸음이 만드는 것이었다. 소녀는 더욱 빨리 발을 놀리며 잰걸음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걸음에 맞추던 발자국 소리는 점차 급해지더니 성큼성큼 달리기 시작했다. 소녀의 가슴이 요란스럽게 쿵쾅거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두 눈엔 어느 새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강도 사건 뉴스가 떠올랐다. 늦은 시간 귀가중인 젊은 여성을 상대로 흉한 짓을 하고 금품을 털어가는 범인들에 관한 것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분식집에서 친구들과 노닥거리다 귀가가 늦어진 것이 후회됐다. 조금이나마 빨리 집에 가려고 인적이 드문 뒷길로 가로질러 올 생각을 한 것도 후회됐다. 조금만 더 가면 샛길이 끝나고 대로로 나갈 수 있지만 소녀를 쫓던 발소리는 어느 새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자신의 어깨를 부여잡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는 마지막 용기를 짜내어 몸을 홱 돌려 붉게 충혈 된 눈으로 미행자를 노려보았다. 순간 소녀의 얼굴에 가득하던 공포가 사라지며 안도의 한숨이 붉고 작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놀랐잖아요.”

소녀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뒤를 따라오던 발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말했다. 분명 상대는 소녀에게 위협을 느끼게 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익숙하고 안전한 사람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소녀보다 두 뼘 가까이 큰 키의 사내는 그런 소녀를 말없이 바라 보고 있었다. 남자의 숨소리가 거칠다. 남자는 소녀 쪽으로 한 걸음 더 다가오더니 다른 쪽 손도 그녀의 어깨에 얹었다. 어깨를 짓누르는 젊은 남자의 악력에 순간 당황하던 소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 산 너머로 넘어가는 태양이 남긴 붉은 노을빛이 소녀의 얼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높은 담으로 가로 막힌 샛길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진태가 집에 도착하였을 때엔 9시를 살짝 넘기고 있었다. 딸아이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면서 아내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일이니 아마 아이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는 모양이라고 아내를 안심 시킨 진태는 자신의 서재 겸 작업실로 향했다. 손에 든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일단 딸아이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작업용 컴퓨터 책상 위에 올려놓은 탁상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본다. 올해로 43살 이제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중년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저기 비집고 올라온 새치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 30대 까지만 해도 걱정 없던 뱃살도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나 무심코 손으로 쥐어보면 꽤나 두둑하게 쥐어진다. 눈가에도 입가에도 크고 작은 주름들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늘 웃고 다니는 습관 덕에 호인 마냥 웃음주름들이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5살 연하의 아내와 딸, 두 여인네들과 함께 생활하는 집은 2층 단독이었다. 3년 전 재개발로 가격이 급상승한 서울의 아파트를 처분하고 이곳에 직접 지은 집이었다. 상속 문제로 하는 수 없이 서울생활을 하며 내심 고상한 전원생활을 꿈꾸던 그로선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 분야에서 나름 성공한 데다 멋들어진 집과 거기서 함께하는 화목하고 아름다운 가정. 그것도 모자라 부모님이 남기고 간 거액의 유산까지 진태의 인생은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완벽한 것이었다. 그리고 진태 자신도 지금의 생활에 무척이나 만족하고 있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딸아이의 전화일 것이라 생각하며 진태는 서재에 연결된 무선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순간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아무런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단순한 전자부품과 프라스틱 덩어리 조합에 불과한 작은 기계장치가 손안에서 떨리고 있었다. 하이그로시 소재로 만들어진 전화기의 검은색 몸체가 번들거리며 작업실 형광등을 반사 시켰다. 그것이 마치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가진 일종의 본능이었다. 여전히 신호음을 울려대는 전화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진태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가져갔다.

“여보세요?”

진태의 응답에도 불구하고 수화기 너머에선 기분 나쁜 침묵이 이어졌다. 소리에 색깔을 입힌다면 그것은 회색 기운이 감도는 짙은 흑색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태는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분을 느끼며 다시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그러자 기괴한 목소리가 수화기에 뚫린 구멍을 타고 흘러나왔다.

“딸아이를 데리고 있다. 다음 전화는 한 시간 뒤야.”

‘통화는 용건만 간단히’라는 표어를 상기시키듯 상대는 자신이 할 말만 남기고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진태는 아연실색한 얼굴로 연결이 끊긴 채 대기음만 울리는 수화기를 뚫어져라 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간결하고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것이 전화는 의미를 해독하고 이해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처음엔 매우 질 나쁜 장난전화라고 생각했다. 딸을 데리고 있다니, 다르게 말하면 자신의 딸을 유괴했다는 말이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불쑥 그 말만하고 끊어버리는 황당한 내용의 전화를 순순히 믿을 부모는 없다. 그저 장난 전화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진태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문을 박차고 나가 거실로 향했다. 주방 쪽에서 쨍그랑 그릇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그런 그의 기세에 놀라 들고 있던 그릇을 놓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진태는 거실 전화기를 들고 그 위에 빼곡히 박힌 버튼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통화 기능 밖에 지원되지 않는 서재의 전화와 달리 거실 전화기엔 발신번호 표시 기능이 있었다. 기능 버튼을 찾아 누르자 최근 걸려온 전화번호가 액정 화면에 표시되었다. 010으로 시작되는 휴대폰 번호는 진태가 잘 알고 있는 번호였다. 딸아이를 데리고 있다며 걸려온 정체불명의 전화, 그것은 바로 딸 미영의 핸드폰으로 걸려온 것이었다.




통화를 끝내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사내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더듬었다. 미지근한 것이 만져지는가 싶더니 어느 새 손톱 사이로 스며들었다. 피다. 검붉은 액체는 찢어진 입술의 상처 사이에서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입술의 상처는 말을 할 때마다 조금씩 벌어지며 출혈과 함께 시린 통증을 던졌다. 사내는 두툼하게 쌓인 낙엽더미를 밟으며 집으로 향했다. 산 중턱에 자리한 한옥은 꽤 오래전에 지어진 듯 여기저기 남은 세월의 흔적들과 함께 조금씩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기거하던 노인이 이사를 간 뒤 버려진 집은 유령이 돌아다닌다는 소문과 함께 이젠 아무도 찾지 않는 폐가였다. 먼지가 두툼하게 내려앉은 툇마루에 걸터앉아 옆에 굴러다니는 소녀의 가방을 뒤진다. 생리대를 꺼내 급한 대로 상처에 대고 누르며 지혈을 했다. 사내는 가방 안에 든 물건들을 살펴보았다. 교과서와 필기구, 작은 인형과 장신구들 할리퀸 로맨스로 짐작 되는 문고본 책과 인기가수의 CD. 평범하기 짝이 없는 여중생의 가방이다. 손가락에 묻은 피를 대충 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사내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지저분한 바닥 위에 가로 누운 작은 체구의 소녀를 바라본다. 백옥처럼 뽀얀 피부, 그리고 거기에 대조되는 짙은 색의 눈썹과 머리카락. 아래로 쏠려 얼굴을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살짝 들추자 더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둥그스름하게 솟아오른 이마와 거기서부터 유려하게 뻗어 내려온 콧등이 보인다. 눈꺼풀이 감겨있어 그 크고 깊은 눈망울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대신에 짙고 긴 속눈썹을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소녀의 붉은 입술을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어루만져 본다. 입술을 타고 흐른 한 줄기 핏물이 오히려 더욱 매력적이라고 사내는 생각했다. 일 년 전 처음 본 순간부터 사내는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에 대해 조심스럽게 조사했다. 부모님은 무엇을 하는지 어느 학교에 다니는지, 등하교 시간은 언제인지, 어떤 길을 자주 이용하는지까지 조심스럽게 조사해왔다. 오늘도 멀리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다 인적이 드문 아파트 뒤편 샛길로 소녀가 접어드는 것을 보자마자 그의 가슴은 쿵쾅거렸다. 그녀의 뒤를 쫓아 샛길로 들어섰다. 처음 자신의 인기척을 느낀 소녀가 뒤를 돌아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길옆 배수로 아래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그때 그 길에 두 사람 외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자신의 얼굴을 본 소녀는 경계를 풀고 안심하는 듯 보였다. 그때까지 아이를 둘러치고 있던 보이지 않는 경계의 장막이 순간 걷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녀가 자신을 향해 해맑은 웃음을 던지는 순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미소가 유혹의 의미란 것을. 이렇게 어두운 밤길을 미행 해오던 남자에게 그런 반응을 보일 때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소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고 억센 양팔로 그 작은 어깨와 허리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체온과 함께 소녀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발버둥 치는 소녀의 몸을 더욱 세게 안으며 그녀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여자의 노는 때로는 예스인 법이다. 중요한 순간 물러서는 것은 머저리들이나 하는 짓이다. 순간 화끈 거리는 감각이 입술을 타고 번졌다. 깜짝 놀란 나머지 황급히 소녀를 밀쳐냈다. 키스를 하려는 자신의 입술을 소녀가 물어뜯었다는 것을 알고선 흥분한 나머지 주먹을 휘둘렀다. 소녀의 작은 몸은 맥없이 쓰러졌다. 쓰러진 소녀를 들쳐 엎고 어두워진 숲길을 이동하는 것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작은 체구의 소녀도 정신을 잃은 채 축 쳐지자 마치 돌덩이라도 된 마냥 어깨를 내리 눌렀다. 거기다 행여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조심해야 하는 탓에 더욱 힘들었다. 미리 봐두었던 산 중턱 폐가에 도착했을 때엔 기진맥진하여 소녀를 방바닥에 짐짝마냥 던져 놓은 채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았지만 길에서 그녀를 붙잡고 이곳으로 온 후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는데  방 안에서 소녀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돌아오는지 신음과 함께 버둥거리는 것을 보고선 그제야 준비했던 마취약을 꺼냈다. 손수건에 조심스럽게 약을 적시고 소녀의 입과 코를 틀어막는다. 가녀린 팔다리가 허공에 버둥거리며 저항을 해보려 했지만 곧 힘을 잃고 축 늘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소녀를 기절시키고 일어서려는 사내의 발에 무언가 채였다. 살펴보니 아크릴판으로 만든 명찰이다. 반들반들한 하얀색 바탕에 검은색으로 소녀의 이름이 새겨져있다. 아마도 바닥에 내리는 와중에 떨어진 모양이다.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고 다시 한 번 소녀의 상태를 확인한 사내는 다시 밖으로 나왔다. 전화를 걸었으니 곧 일을 진행시켜야 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자 가슴이 두근거리며 호흡이 가빠졌다. 흥분과 함께 분비된 아드레날린이 몸속으로 퍼지며 소녀를 운반하느라 지친 몸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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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현아는 매대 뒤로 돌아가 신발을 벗고 스타킹 위로 발을 주무른다. 하루 8시간, 선채로 일해야 하는 매장 근무는 20대 초반인 그녀에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언젠가 고용주는 자신과 같은 근무여건의 사람들에겐 의무적으로 의자를 제공해야 한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있었지만 여기선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다. 그녀가 일하는 곳은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오가는 대형 서점의 소설 코너였다. 따로 의자를 놓은 공간도 마땅치 않았고 그나마 잠깐 앉을 수 있는 공간들도 대부분 손님들 차지였다. 직원용 휴게실이 있었지만 눈치가 보여 오래 쉴 수도 없거니와 그 곳의 자리도 언제나 누군가 앉아있기 마련이었다. 지압을 하듯 발바닥 안쪽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그녀는 매장을 둘러보았다. 평일 오후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상당수는 대학생이나 수업이 끝난 초,중등생 꼬마들이었다. 책을 사러 온 것 보다는 시원한 매장 내에서 시간을 죽이며 바로 위층에 있는 극장의 영화 시간을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일 터였다. 베스트셀러 코너에 서서 책을 읽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30대 후반 쯤 되었을까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에 수수한 차림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꽤나 미인이다. 우울해 보이는 얼굴과 미간의 주름만 아니라면 훨씬 어려보이고 예쁠 것 같다. 아마도 젊었을 적엔 남자들 꽤나 꼬였을 것 같았다. 그녀 역시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매대 여기저기를 옮겨가며 이책 저책 살피고 있었는데 조금 전부턴 책 한권을 잡고선 열중하고 있었다. 뭔가 기분 나쁜 것이라도 보았는지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페이지를 넘기던 여자의 손이 어느 순간 빨라지기 시작한 걸 현아는 감지했다. 마치 화풀이라도 하듯이 거칠게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멀리 떨어진 그녀의 귀에도 들렸다. 저러다가 책이 손상이라도 되면 낭패라는 생각에 현아는 벗었던 신발을 다시 신고선 매대 쪽으로 향했다.

“손님 제가 도와드릴까요?”

현아가 말을 걸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여자는 책만 들여다볼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여자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뭔가 끔직한 것이라도 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고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손님?”

심상치 않음을 느낀 현아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순간 매장 안에 날카로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으아아!”

여자는 현아의 팔을 뿌리치며 책을 집어던지더니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매장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란 얼굴로 두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현아는 마치 자신이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바라보는 시선에 당황하며 그런 게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었다. 매장 반대편에서 건장한 체구의 박 대리가 황급히 뛰어오는 게 보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현아가 난감해하는 찰라 갑자기 여자의 비명이 멈췄다.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여자의 손이 힘없이 아래로 떨어진다. 그리곤 여자의 몸이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진열대에 부딪힌 뒤 바닥에 쓰러졌다. 진주색 타일 위에 드러누운 여자의 몸 위로 진열대 위에 있던 책들이 쏟아져 내렸다. 현아는 당황하며 주저앉아 쓰러진 여자를 살폈다. 반쯤 뜬 여자의 눈은 초점을 잃고 풀어져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보이던 여자의 입에서 쉰 소리가 새어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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