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모리 아키마로 지음, 김아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평점 :
절판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

    


 

고향을 떠나 도야마 대학에 들어간 조코는 평소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취향에 맞춰 추리연구회라는 동아리를 들 생각입니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미남 선배 미키지마의 손에 들린 동아리 신입부원 플래카드를 보고 조코는 묻습니다.

“여긴 추리연구회죠?”

“보시다시피, 여긴 취리연구회지.”

이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술 향기 가득한 1년간의 동아리 라이프를 5개 에피소드로 나누어 놓은 것이 바로 이 책 <이름 없는 나비는 아직 취하지 않아>입니다.

 

위의 소개를 보며 ‘취리’란 단어를 오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이것은 의도된 말장난입니다. 추리(推理)와 취리(醉理-취하는 것의 이치) 발음이 유사한 두 단어를 주인공 조코는 착각하고서 엉뚱한 동아리에 가입하게 되는 거죠.

 

취리연구회(이하 취연)는 그 말처럼 매일같이 갖가지 핑계로 코가 비뚤어질 때까지 취하는 것이 모토인 동아리입니다. 미키지마는 그런 취연의 장으로써 세상 모든 것에 취하는 삶은 설파하는 기인이었고요.

 

이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제 자신의 대학 새내기 시절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집을 나와 타지의 캠퍼스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또래들과의 커뮤니티 속 새로운 규칙과 질서에 익숙해져가는 1년은 저마다에게 특별한 기억을 남기기 마련이니까요. 물론 살벌한 취업전쟁 속에 내던져 N포 세대 소리를 듣는 요즘의 청춘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이미 십 수 년이 흘러버린 저의 스무 살(정확히 말하자면 19살) 캠퍼스의 모습은 책 속 도야마 대학의 풍경과 닮아 있었습니다.

 

고교생으로서 미성년자로서의 제약에서 막 벗어나 당당히 술을 마실 나이가 된 아이들은 학기 초 과모임, 동아리모임, 동기모임, 향우모임, MT 등등 거의 매일같이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잔을 기울이고 갖가지 사연들을 만들어냈으니까요.

 

조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벚꽃 날리는 봄의 야외에서, 햇살 가득한 여름의 해변에서, 그리고 눈발이 날리는 시골 료칸에서. 취연 멤버들과 술에 얽힌 채 꽃과 달과 눈에 취하고 결국 젊음이라는 끝 모를 터널 속 작은 등불 같은 이성에게 취하기도 하지요.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더. 조코가 원래 들려했던 곳이 추리연구회였던 것처럼 작가는 소소한 미스터리를 숨겨 취리에 추리를 더하는 재미를 선사합니다. 젊음과 술이란 소재에 흔히 ‘코지 미스터리’라고 부르는 특별한 범죄나 사건 없이 일상의 소소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이야기를 섬세하게 배치하는 것이죠.

 

그날 술자리에서 사라진 선배의 행방은? 서로가 통한 것 같은 썸녀가 갑자기 데이트를 바람맞힌 이유는? 홀연히 사라진 학교 행사 전단지를 빼낸 범인은? 이야기 속 미스터리들은 이처럼 생활 밀착형이며 소소합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의 새내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야기 속 주인공들에겐 일견 커다란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깊이 빠져들게 되는 것은 어쩌면 취연의 술자리 어딘가에 나도 합석하여 사케에 취하고 타인이 보기엔 작고 별 것 아니지만 나의 삶에선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착각이 일기 때문일 겁니다.

벚꽃을 바라보며 학교 앞 삼거리 주점에서 막걸리를 기울이던 때처럼. 갑자기 나에게 냉랭해진 여자 동기의 행동에 이유가 무엇인지 추측하던 때처럼 말이죠.

 

소소하다고는 했지만 여느 코지 미스터리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 책도 매우 섬세하고 촘촘히 이야기와 복선들을 깔아놓습니다. 또한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극대화시켜 흥미를 돋우죠. 평범한 신입생 같은 조코는 사실 국민 여동생 소리를 듣던 아역 연기자 출신이고 마냥 취기에 절어 있기만 한 것 같고 무책임 4차원 같은 미키지마 선배는 나름의 진지한 고민을 품고 있다는 식으로요.

거기에 더하여 두 캐릭터 사이 구름처럼 몽글몽글 오르는 썸이 기운을 쫓아가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사랑이라는 감정 속 남녀들처럼 조코와 미키지마 두 사람 사이에도 애정의 역학관계가 작용하는데 작가는 사건들과 연계시켜 이 둘의 시소 같은 관계를 말랑말랑하게 그려내거든요.

 

여러 모로 따스한 봄볕을 맞으며 가볍게 읽기 좋은 추천작입니다. (사계절이 모두 담겨 있으니 시기를 가리지 않기도 합니다)

추리물로도 로맨스로도 모두 훌륭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는 데다 일본이나 우리나 크게 다르지 않은 대학 문화 탓인지 쉽사리 빠져들고 공감할 수 있어요. 게다가 5개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된 드라마 같은 구성이기에 짬이 날 적마다 하나씩 독파하더라도 얘기를 쫓아가는 것에 무리가 없습니다.

추리/취리라는 기본 설정을 비롯하여 곳곳에 말장난(요즘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는 아재개그?)들이 배치되어 있는데 이 역시 훌륭하게 번역하거나 설명을 붙여 이해하고 즐길 수 있게 배려된 점 역시 책을 즐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청춘은 긴 터널이다. 누구나 눈을 꼭 감고 싶어질 정도로 밝은 빛을 향해 달리고 있을 터지만, 터널 한가운데에서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선배의 잠든 얼굴을 관찰하면서, 매화주 소다를 꿀꺽꿀꺽 다 마셔 버렸다. 선배 말대로 나는 여전히 술에 취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늘 이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조금만 더 젖어 있어야지.

"어이, 살아 있어? 술잔"
"...아마도, 네, 살아 있어요"

"여긴 추리연구회죠?"
"보시다시피, 여긴 취리연구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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