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대륙기 1 블랙 로맨스 클럽
은림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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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대륙기

 

은림 작가를 처음 접한 건 <할머니 나무>라는 단편을 통해서였습니다. 죽음 대신 나무로 변하는 것으로 인생의 황혼을 맞게 되는 모계 유전의 세대를 소재로 다룬 단편은 독특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현실의 고민들을 담아냈습니다. 더불어 따뜻한 마무리까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고 우아한 판타지였지요.

그런 작가의 신작 장편이 판타지이고 심지어 제목은 <나무 대륙기>라는 소식을 접했을 적에 어떤 작품이 나왔을까 기대감으로 설렜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권을 모두 합해 800페이지가 넘는 묵직한 장편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상징적이며 압도적인 인상이었습니다.

 

이야기는 서로의 이름을 닮은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두 소녀, 무화와 서미를 그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반역의 죄로 남편은 숙청당하고 목숨만 부지한 채 유폐당한 목국의 공주 녹옥은 시간이 흘러 누명을 벗고 복위하게 되고 실종된 줄로만 알았던 그녀의 딸 서미는 노래하는 나무 상단의 잡부에서 반공주의 신분으로 격상되어 왕실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녀의 곁에는 처음 울음을 울었던 유배지에서부터 이웃하며 함께 살았던 친구이자 지금은 수행원인 무화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소녀를 호위하는 것은 세도가의 자제이자 신비한 은발에 경국지색이라 부를만한 미모의 남자(!) 반하 역시 함께하고 있지요.

나무의 전설을 품은 가상의 대륙을 배경으로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얼핏 흔하디흔한 왕실과 귀족의 세력 다툼과 후계를 위한 암투를 그리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페이지를 넘겨보면 그것은 하나의 층위일 뿐임을 알 수 있지요.

은림의 나무대륙기는 쉽게 읽기엔 어려운 책입니다. 작가는 방대한 이야기를 압축시키고 다층적으로 구성함으로서 다양한 접근과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를 만들어냅니다. 전설에서 비롯된 세계관이 있고 마법과 도술의 규칙들이 존재하고 이인종에 용이 등장하는데다 공포와 무협적 요소까지 등장하지만 이것은 이야기의 외형을 구성하는 첫 번째 층위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그 아래에 다시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존재에 대한 여성 주의적 사변이 나오고. 존재의 규정에 관한 철학적 상징들을 혼입하기도 하며 권력의 양태에 대한 풍자적 요소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결말로 이어지는 사건의 묘사에선 양자물리학의 흔적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들 모두가 여러 개의 레이어로 존재하면서 서로 겹쳐지며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그것을 묘사하는 방식 또한 다채로워서 동양 판타지적 세계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종종 고딕 공포소설이나 무협지의 컨벤션에도 발을 담그기도 합니다.

전자의 다층적 구성과 상징은 작가가 오랫동안 고민하며 전하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형성한다면 후자의 다양한 서술방식은 그런 작가의 의식을 보다 편하고 익숙하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곤 합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용은 모든 시간이 하나의 현재로 인식되는 초월적 존재입니다. 또한 서로의 신분을 수없이 뒤바꾸고 서로의 삶을 간섭하며 친목과 반목을 거듭하는 꽈배기처럼 꼬인 하나의 운명 속에 존재하는 것 같은 두 주인공 서미와 무화는 종종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인식하고 상대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주요 인물들의 성별은 종종 모호해지기도 하는데 서미와 무화 모두 자신들의 사정 때문에 남장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고 몇몇 캐릭터들은 존재를 바꾸며 성별이 바뀌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이야기에서 거대한 위기로서 등장하는 어둔의 존재를 묘사하는 때에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호하고 다중적, 다의적인 설정과 존재들은 끊임없이 수수께끼와 의문을 던지며 다음을 또는 이야기의 이전을 궁금하게 만들며 또한 그 자체로 거대한 혼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후반부 클라이맥스의 전투와 주요 인물들의 대립은 마치 빅뱅 직전을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한 세대의 끝을 종결짓는 마지막 페이지는 그래서 오히려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처럼 읽히기도 합니다.

서사와 설정의 모호성은 서술의 방식에도 개입하는데 작가는 현재의 장면과 회상, 그리고 환상의 장면을 종종 명확한 구분 없이 이어서 써냅니다.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는 고작해야 따옴표가 홑이냐 겹이냐 정도라서 몇 번인가 책장을 뒤로 넘기며 내가 잘못 건너 띄고 읽은 건 아닌가 확인하게 만들었습니다. 앞서 말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바라보며 현재로 인식하는 작중의 용이라는 존재가 서술한 것 같은 표현 방식은 분명 의도된 것이겠지만 짐짓 불친절하게 보일 수도 있겠구나 염려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은림 작가의 <나무 대륙기>는 작가 후기에서도 슬쩍 내비친 것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작가가 구상하고 다듬어낸 세계관과 이야기를 공들여 쌓아올린 작품입니다. 작가의 고민이 담긴 만큼 제대로 이야기를 읽어내려면 독자 역시 가볍게 읽어 내리기보단 조금은 천천히 숙고하고 음미하며 즐기는 것이 좋을 것 같은 책이기도 합니다. 출판사 황금가지에서 펴내는 국산 장르소설들이 종종 그러하듯 <나무 대륙기>역시 페이지 한 장, 한 장이 제법 무겁고 그만큼이나 풍부한 문학입니다.

 

장르적 재미와 생각할 ‘꺼리’를 찾는 지적인 욕구를 동시에 충족하고 싶은 독자라면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세상은 한 그루의 나무, 목숨은 매일 피고 지는 꽃, 시체가 쌓여 땅이 되고, 마음은 하늘이 되고, 소원은 바람이 되고...

우주는 살아 있거나 죽어 있는 모든 것들의 숫자만큼 많단다.

너는 매번 나를 놀라게 하는군. 좋아, 그럼 이 대답을 알아내 봐. 나무에게서 꺾인 가지가 홀로 자라면 그건 이전의 그 나무일까? 새로운 나무일까?

속을 들여다보려는 순간 무화의 눈이 떠졌다. 태어나는 별처럼 아름다운 눈이 무화를 보고 있었다.

"심연이 눈을 떴어요."

무화의 입에서 서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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