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 라이징 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지음, 이원열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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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라이징


피어스 브라운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제노사이드의 기저엔 우생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죠. 아름답고 강한 것이 우월한 것이고 인류가 더 나은 종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열성인자를 제거해야 한다는 발상의 극단은 전쟁이란 상황 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번져 가장 끔찍하고 사악한 형태의 참상으로 드러났습니다. 하지만 이 무렵 우생학에 기초한 유사한 발상들은 비단 나치 독일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죠. 장애인들은 거세를 당하고 동성애자들은 핍박을 받고 살해위협을 받으며 인류의 적으로 몰렸습니다.

DNA지도가 그려지고 유전과 진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지금도 사람들은 종종 유사한 발상을 떠올리곤 하지요. 유전자를 조작해 우월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환상 말입니다. 길고 긴 진화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월한 집단이 살아남았다기 보다 살아남은 집단이 지배적 종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런 건 이런 주장에서 중요치 않습니다. 뛰어난 기량을 보이는 운동선수를, 아름다운 외모의 연예인들을, 명석한 두뇌의 학자들을 보며 오늘날의 대중은 ‘우월한 유전자’라는 드립을 날리곤 하니까요.


작가 피어스 브라운이 ‘레드 라이징’에서 그린 머나먼 미래의 세계는 이러한 편견이 극대화된 곳입니다. 달 개척을 시작으로 우주로 뻗어간 인류가 21세기 오늘날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지구정부를 몰아내고 태양계 전체로 식민지를 늘려가는 몇 백 년 후의 미래. 우주인류는 월등한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우생학이 꿈꾸던 세계를 구체화 시킵니다. 소위 우월한 유전자들이 가려지고 그에 따라 신분이 정해지며 대물림 되는 극단의 계급사회로 이루어진 인류문명이 우주적으로 세력을 넓혀가고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유전자 단위의 계급 차는 ‘색’으로 구분이 됩니다. 가장 월등한 재능을 타고 나는 귀족과도 같은 최고위층은 ‘골드’로 그리고 가장 열등하여 자신들이 사는 세계의 실체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지하에서 죽어라 노동만 하다 죽어가는 육체노동 계급은 ‘레드’로 칭해집니다.

그리고 화성의 지하, 거기에서도 가장 극악한 환경의 광산에서 헬륨을 채취하기 위한 거대드릴을 조종하는 헬다이버 대로우는 최하위 계급 레드인 16세 소년입니다. 하지만 거친 환경과 열악한 생활 속에서 단명하는 레드 계급이기에 그는 이미 결혼을 한 가장입니다. (계급 사회에서 지도세력들이 보기에 노동력을 제공하는 하층민의 가장 큰 미덕은 빨리 결혼해서 많은 아이-노동력을 생산하고 자신은 실효성이 줄어들고 헛생각이 많아지기 전에 사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는 골드들 만큼이나 아름다운 아내 ‘이오’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지요.


열악한 속에서도 아무리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돌아오고 위로 올라갈 작은 희망이 있으리란 기대가 꺾이고 부조리한 현실이 대로우의 눈앞에 닥친 어느 날. 이오는 낙담한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레드들에겐 금지된 상층 구역으로 대로우와 몰래 숨어들게 됩니다. 잠시의 행복한 시간은 이내 관리계급인 그레이들에 의해 어그러지고 두 부부는 법을 어긴 벌을 받게 되지요. 언제나 부조리한 계급 체제에 분노하던 이오는 그들에게 처벌을 내리기 위해 나타난 골드 앞에서 저항의 뜻으로 금지된 노래를 부르고 사형에 처해집니다. 잔인하게도 이오의 교수형을 위해 중력 대신 무게추를 대신하여 죄인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것은 가족, 즉 그녀의 언니와 대로우고요. 절망의 나락에서 대로우는 자신도 법을 어기고 광장에 내걸린 아내의 시신을 수습하여 묻어주고 자신도 교수대에 오릅니다.

죽은 줄 알았던 대로우, 하지만 눈을 뜬 곳은 놀랍게도 저승이 아닙니다. 화성의 저항세력 ‘아레스의 아들들’의 아지트지요. 그들은 그를 살려준 대신 자신들의 말이 되어 어떤 작전에 나설 것을 요구합니다. 유전자 단위에서 신체를 개조하는 것. 바로 ‘골드’가 되어 최상층 계급 속에 숨어드는 스파이가 되는 일이지요.


소설의 초반부는 장구한 설정과 레드로서 대로우의 비루한 일상, 그리고 그것이 파괴되는 과정을 조금은 느릿하게 그려냅니다. 마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준비운동과 같은 느낌의 초반부를 통해 우화적이고 극단적인 이야기에 독자가 조금씩 젖어들게 해주는 것이지요.

이렇게 펼쳐진 대로우의 절망과 부활, 그 끝에 마침내 골드로 자신을 개조하여 첩자가 되어 골드 세계에 숨어들게 되면 이어지는 것은 골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재들을 선발해 최종적으로 지도자가 될 자질이 있는 ‘흉터를 입은 비할 데 없는 자’란 칭호를 얻기 위한 시험입니다. 필기시험과 체력테스트 그리고 면접을 통해 걸러진 인원들은 각각 고대 그리스 신들의 이름을 딴 감독관인 ‘프록터’들에게 배정이 됩니다. 그렇게 갈린 팀들이 통제된 구역에서 각각의 성을 사수하며 다른 성의 깃발을 빼앗는 모의 전쟁이 최종 시험이 되는 것이지요. 대로우는 개중에서도 가장 척박한 마르스 성에서 성의 우두머리 격인 프라이머스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실력을 인정받고 비할 데 없는 자로서 졸업을 하여 계급 반란의 순간 군사력이 될 선단의 지휘관이 되는 것이 아레스의 아들들이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지요.

여기까지의 스토리나 과정들이 익숙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도 그랬어요. 마르스, 미네르바, 세레스 같은 성에 골드 아이들이 배정되는 장면은 마법 모자를 뒤집어 쓴 해리 포터가 반 배정을 받는 모습 같습니다. 그렇게 나뉜 아이들이 통제된 공감에서 모의 전쟁을 치루고 그들의 모습은 하나하나 감시되어 점수가 매겨지고 후원자들의 간택을 받게 되는 설정은 헝거게임과 겹쳐 보입니다. 다양한 컬러의 계급들이 마치 카스트처럼 저마다 정해진 롤이 있다는 것은 (레드는 노동자, 그린은 기술자, 그레이는 하위경찰 같은) 다이버전트의 세계를 닮았고요. 그렇게 또 하나의 십대 주인공이 등장하는 SF 시리즈인 모양이네 심드렁해지는 순간, 그러니까 본격적인 모의전이 시작되면 <레드 라이징>만의 전혀 다른 개성이 드러나며 이야기의 진가가 도드라지기 시작합니다.

시리즈의 시작인 <레드 라이징>의 백미는 이전의 십대 대상의 SF나 판타지는 범접 못할 높은 수위의 폭력과 SF의 설정을 뒤집어 쓴 아래 펼쳐지는 창과 칼의 고대 전쟁입니다. 그러니까 중반부터 펼쳐지는 모의전쟁은 헝거게임보다는 차라리 코난 시리즈에 가깝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소설이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전쟁들을 묘사한 역사극과도 닮아 있고요. 분명 하늘을 나는 반중력 신발, 화성의 중력, 레이저 무기가 등장하지만 아이들이 펼치는 전쟁은 피와 살점이 튀고 흙냄새와 눈의 냉기가 느껴지는 고대의 전쟁입니다.

정말로 시험을 치르는 골드 아이들이 서로를 살해하고 죽어 나가는 가운데 골드란 계급에 가려져있던 아이들의 본성이 드러나고 정치와 음모가 판치는 가운데 인물간의 갈등선이 굵직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는 거칠지만 묵직한 맛이 있습니다. 거기에 더불어 이야기의 변곡점마다 밝혀지는 반전과 그를 위해 사전에 촘촘하게 설계된 단서와 복선들을 음미하는 재미도 쏠쏠해서 조금은 지리한 면이 있던 전반부를 넘겨 시험이 시작된 이후로는 좀처럼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말 그대로 틀을 깨는 극적 구조와 캐릭터들의 성장 그리고 목숨이 걸린 전쟁 속에서 레드란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대로우가 점차 극단적 계급 사회의 민낯을 발견하는 과정까지 이어지는 후반부로 넘어가면 점점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쉽고 조금은 불안해지기도 했습니다. 단권으로 끝나는 책으로 알고 시작했던 것이 이제 겨우 골드로 가장한 레드의 일대기가 시작한 부분에서 끝이 나버리기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어질 시리즈의 다음권이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로우의 선택에 대해서는 서사적 구조로서 당연하다 볼 수 있겠지만 동시에 현실의 세계에서 보아오던 모습들과 겹쳐져 이후의 대로우란 캐릭터에 대해 일말의 불안이 일기도 했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괴물을 잡으려다 스스로가 괴물이 된다’라는 경계 말이지요.

뿐만 아니라 컬러로 구분된 선명한 계급사회, 개중에서도 최상위층인 골드들이 다시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서로를 죽이는 모의 전쟁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 겹쳐 보이기도 했습니다. 골드는 말 그대로 금수저, 레드는 흙수저로 단순화 시켜 대응시켜보면 소스라칠 정도로 겹쳐지는 우화가 되니까요. 이 외국 작가가 설마 21세기 대한민국을 모델로 소설을 쓴 건 아닌가 싶을 정도였어요. (스포일러가 되기에 직접적 언급은 않겠지만 후반부 이야기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자칼’이란 캐릭터와 그에 얽힌 이야기는 당장이라도 비슷한 사례를 신문에서 집어낼 수도 있을 것 같지요.)


책은 1년에 걸친 기나긴 시험의 과정을 골드로서 통과한 대로우의 모습으로 끝이 납니다. 그 모습은 기나긴 입시지옥과 그보다 치열한 취업전쟁이란 살벌한 현실에서 친구를 동기를 밟아버리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 후에야 겨우 학생이란 신분을 털어내고 사회에 발을 딛는 오늘날의 청춘들을 닮아 있습니다. 아마도 시리즈의 다음 책인 골든 선(Golden son)은 그나마 알량하던 학생신분이란 보호벽마저 사라지고 생존이란 싸움에 내던져져 미생의 삶을 사는 한국의 사회초년병을 닮아있는 대로우를 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어 마음이 무겁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 강인한 레드 소년이 어떻게 골드들 속에서 자신을 증명해낼지 기대되기도 합니다.

"아쉽게도 각하. 저렇게 열성적인 사람은 오직 저 아이 하나뿐입니다. 저 아이와 의견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고 동조하는 자도 없다는 게 분명합니다."

"친구? 걔들이랑 친구라고? 그 골드놈들이랑? 그들은 괴물이야. 영혼이 없는 개자식들이야."

"둘러봐, 여기엔 골드가 없아. 난 레드야. 넌 레드야. 누군가가 권력을 충분히 갖기 전까지는 우리 모두 레드들이야. 그때가 되면 우리에게 권리가 생겨. 우리의 법을 만들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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