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 상 -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3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는 진실해야 한다. 진실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분석과 판단력뿐 아니라 진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도 필수, 어떤 학자의 노작도 완벽하게 옳을 수는 없다. 사료의 제한, 사료의 오기,시대의 문제의식, 사고와 가치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적어도 집필할 때는 그 모든 한계를 무릅쓰고 진실하고 용기 있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마음으로 집필되었고 해전사를 중심으로 한만큼 임진왜란 전체의 전개과정,역사적 의미와 영향,시대상에 대해서는 필요한 만큼만 언급, 
'우린 아직 이순신의 진짜 능력을 모르고 있다'화제의 역사학자 임용한이 되살려낸 이순신의 이야기속으로 빠져보자
이순신의 47세이던 1591년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등장
2년전인 1590년, 도요토미는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편에 이런 자신감을 피력했다.
'우리 통일 일본은 너희가 아는 예전의 분열된 일이 아니다. 우린 중국(명)을 칠 능력이 있다. 우리의 힘을 보았다면 우리에게 협력하라' 요시토시는 조선에 이런 협박이 먹힐리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좌수영의 거북선이 항해와 발포시험을 한 다음날인 4월 13일 (일본 달력은 음력으로 조선보다 하루 늦어 12일), 부산포 앞바다에 일본군 침공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14일, 일본군이 부산진성을 공격하면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시작 일본군 주력은 부산진성-동래구-대구로 방향을 잡고 있었지만 울산-경주 방향, 김해-웅천방향등 2진, 3진의 파상공세가 차례로 계획되어 있었다.
경상도에서는 난리가 벌어졌지만 부산에서 100km떨어진 전라좌수영은 조용, 2~3일간 거북선 출항준비로 부산하고 신경 쓸 일도 많았던지라 장병들은 휴식하고 이순신장군도 일상적 공무만 수행했던 것 같다.
15일은 성종의 왕비 공혜왕후의 제삿날이라 또 휴무일이었다.
영남관찰사 김수가 보낸 전령이 달려왔다. 
'왜적 350여 척이 부산포 건너편(현재의 영도)에 도착했다'
350척이면 1척당 편균 30명만 잡아도 1만명이 넘는 대군,부산성에 있는 병력은 1,000명미만, 주민들이 들어가 농성전에 가담해도 2,000~3,000명을 채우기 힘들다. 아득했지만 희망을 버릴 수는 없었다. 
'무적의 거북선'을 위해 거북선 승무원들은 마치 유보트 승무원들처럼 그 어떤 배보다 힘든 고통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
한려수도 밖으로 나갔을 때, 거제를 지나 대양에서 오는 풍파와 조우했을 때, 조선 전선은 평소의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악조건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전장 한복판에 떨어진듯 생생하게 이순신장군을 만나보게 될 것이다. 


리앤프리를 통해 제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