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이승만 2
김재헌 지음 / 생각의탄생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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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1운동과 같은 시기에 소련 레닌의 코민테론도 민족자결론을 앞세워 약소민족들을

공략하기 위해

공산주의 수출에 나서 이들에게 포섭된 단체가 "노령임시정부"

그들은 레닌의 거액 공작금을 받아 자유민주세력인 이승만 대톨령을 처음에 인정하는 척 하다가

본격적으로는

축출해버리고 임시정부 전체를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벌써 이승만 박사는 "공산당의 당부당"이란 논문을 발표한 1923년일 것이다

마르스크 공산당선언과 레닝의 폭력혁명선언에 정면 대항하는 세계최초의 "반공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아직 공산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있던 시기

공산주의와 절대 병립할 수 없는 것이 기독교 이다

3.1 운동의 관계는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와이에 있던 이승만이 선택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꼽은 것이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우드로 윌슨관의 친분이다

그 친분이 없었더라면 평생을 무국적자로 살아온 그의 정치,외교적 입장은 미국 조야에서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란 점이다

"Japan Inside Out",,,제목에 내 마음까지 의미심장해진다

미국이나 동남아시아의 각국들은 가면을 쓴 일본을 모르니 빨리 알릴려는 이승만 대톧령

1941년 초 뉴욕의 유명한 출판사인 프래밍 H 레벨사를 통해 간행되었다

미국은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이 공습을 받기 전까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드디어 미국이 공격을 받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그제서야 워싱턴 정가에서는 ""Japan Inside Out"이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이승만은 예언자라는 평을 받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승만 박사에 대해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은 임시정부

그 반대로 김구 선생의 이름은 곳곳에 부각되어 있다

임시정부를 위한 독립자금의 모금 활동은 거의 이승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김구의 상해 임시 정부는 국민당의

후원과 이승만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다시피 했는데 영상에는 정정화 여사의 활약만 상세하게 나온다고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활동은 단 한번도 거론되지 않는데 왜 ? 누가? 이렇게 왜곡시키고 있는가?

 

이승만 전 대통령의 3.1절 기획설이 철저하게 배척을 당하고 공격을 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에 한기총의 전광훈 목사가 외쳤구나

이 나라는 심각할 정도로 오염이 되었구나

그동안 역사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했고 알지도 못했고 부분적으로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음세대에게는 똑바로 수정되어지길 바랄뿐이다

도대체 "? 언제부터? 누가? " 하나님 대한민국 다시 이승만 대통령의 기도의 부흥과 하나님 나라의 땅임을 선포하기를 기도한다

분하다 누가? ? 언제부터? 역사는 잘못흘렸고 흐리고 있는데 다음 세대를 위해 바로 잡을 수 있기를 기도한다

이승만대통령은 남다른 예지력이 있었고 많은 경험과 지식의 결과 얻어진 남다른 통찰력

거기에다 성령의 체험을 하여 예언자적 선견지명이 생겼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불굴의 의지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고 노력하고 구체적으로 활동했던 인물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발견해 내지 못햇다

그동안 왜 우리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이렇게도 모르고 살아왔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그동안 학교 다닐때도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어 너무 모르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런 믿음의 영향력 있는 다음세대가 많이 나오길 기도할 뿐이다

 



갑자기 한강에 떠내려 온 노부부의 시체, 사회부 기장 김민주는 아버지의 애증이 담겨 있는 소포를 하나 받는다

그것은 우남 이승만에 대한 자료집, 생각도하기 싫은 아버지와 이승만에 대해 알게 모르게 엮어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때 광화문 광장에서 뜬금 없이 불거진 3.1절 이승만 기획설은 김민주 기자에게 묘한 흥미를 느끼게 한다

본격적으로 시체와 연결되어진 사실을 발견하고 기획취재에 들어간다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어지는 긴긴 여정 속에서 하나하나 밝혀지는 이승만의 진면목, 민주는 이승만이야 말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불운한 국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본격적인 탐사에 나선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문재인 탄핵 3.1절 범국민대회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25대 한기총 대표로서 오늘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사실 하나를 밝히려고 합니다

3.1절을 과연 누가 주최했느냐고 물을때 모든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잘 모르는소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의 감시와 국제적인 교류도 적은 그 때에 어떻게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맞추어 시의 적절하게 3.1 만세 운동을 벌였겠는가?

이 모든 것은 하와이에서 그리고 워싱턴에서 미국을 상대로 외교적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승만 대통령이 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공부도 안 한 사람들이 전국에서 3.1 독립운동 행사를 진행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는 인촌 김인수 선생과 임영신 총장님의 글에서도 주장되는 바입니다"

 

1904년 12월 충정공 민영환의 국서를 지참하고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이 가장 먼저 찾은 주 워싱턴 대조선 공사관 본관

 

일생동안 이승만을 연구해 온 손세일 씨의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에게 밀리고 6,25전쟁에 실패한 좌익 진보들에겐

이승만이 철천지 원수와 같다"는 것이었다

"20세기는 공산주의의 시대였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공산주의 열풍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강렬한 복음처럼 퍼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6년 5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 대일 배상특사로 내한해 한국을 둘러봤던

폴리는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 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대결한 독립운동가가 다름 아님

이승만과 김구였다는 사실은 특이할 만하다'

우남은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처지가 달라서 이런 사상

(공산주의)을 수용하는데는 큰 위험이 따른다"고 여러차례 경고했다

건국 과정 초기엔 이런 이승만의 반공주의가 우남과 백범의 공통점을 잇는 연결고리였지만 정부수립 후엔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말로만 독립운동을 했는지, 아니면 세계 외교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고 확실한 판단을 가지고 기획하고 조정했는지를 밝힐 팰요가 있을 것 같았다

우남 이승만 박사가 어릴 적 지은 시

"한인중앙학교"여학생의 기숙사 터

조선인들은 남존여비 사상이 오래되다보니 딸들에게 공부나 자기 개발을 시키주지 않고

입하나 덜려고 어린 나이에 중국인 또는 하와이 본토인에게 팔려 시집을 가는 경우를 번 것

그래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여학생 학교란 것을 깨달은 것

100년 전에 이런 선각자들이 계셨기에 우리나라 여성분들이 지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하고 실력있는 여자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성해방의 선각자가 이승만 박사

대한민국 헌법도 기독교적 정신 위에 완성된 것

소녀들을 데려와 기숙을 시키며 급히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여성해방은 교육의 평등권 회복 아닌가, 이승만 박사는 여성을 동일한 인격체요

주체로 보고 여성 지위향상의 기초가 되는 여성들만의 학교를 계획하고 설립했다고 한다

조국의 독립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육영사업과 한인들의 역량을 키우는

일에 주력을 하신다

성경에 있는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기독교 사회를 우선 하와이에서 실현해 보고 싶으셨던 것이다

청교도들이 목사들을 앞세워 미 대륙에 정착하여 학교부터 세우고 시민의식을 키워나갔던 것처럼

말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자신들의 나라를 세운 최초의 지도자를 국부라고 부르며 자랑스럽게 기념을

하는데 한국은 어찌된 연유인지 광복이 된지 70년의 세월이 되어도 변변한 동상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일이 어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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