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청년 이승만 1
김재헌 지음 / 생각의탄생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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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한강에 떠내려 온 노부부의 시체, 사회부 기장 김민주는 아버지의 애증이 담겨 있는 소포를

하나 받는다

그것은 우남 이승만에 대한 자료집, 생각도하기 싫은 아버지와 이승만에 대해 알게 모르게 엮어

들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때 광화문 광장에서 뜬금 없이 불거진 3.1절 이승만 기획설은 김민주 기자에게 묘한 흥미를 느끼게 한다

본격적으로 시체와 연결되어진 사실을 발견하고 기획취재에 들어간다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어지는 긴긴 여정 속에서 하나하나 밝혀지는 이승만의 진면목, 민주는

이승만이야 말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불운한 국부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본격적인 탐사에 나선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문재인 탄핵 3.1절 범국민대회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25대 한기총 대표로서 오늘 이 자리에서 역사적인 사실 하나를 밝히려고 합니다

3.1절을 과연 누가 주최했느냐고 물을때 모든 사람들이 민족대표 33인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역사를 잘 모르는소치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일제의 감시와 국제적인 교류도 적은

그 때에 어떻게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람회에 맞추어 시의 적절하게 3.1 만세 운동을 벌였겠는가?

이 모든 것은 하와이에서 그리고 워싱턴에서 미국을 상대로 외교적 독립운동을 펼치던

이승만 대통령이 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공부도 안 한 사람들이 전국에서 3.1 독립운동 행사를 진행한다고 난리를 치고

있습니다

이는 인촌 김인수 선생과 임영신 총장님의 글에서도 주장되는 바입니다"

1904년 12월 충정공 민영환의 국서를 지참하고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이 가장 먼저 찾은 주 워싱턴

대조선 공사관 본관

우리나라에서 이승만 박사는  극과 극으로 판단이 갈려져 있다

이승만 박사에 대한 최종적 판단이 유보되고 유보된 채 거의 70년이 흘러 버렸다

이승만 박사의 기념관 같은 거 하나 없으나 김대중 전대통령은 이미 살아 있을 때 기념관 세워졌고

노무현 대통령은 자살했음에도 불구하고 봉화마을이라는 거대한 기념센터를 만들어 놓고 해마다

추모제를 한다

 

한강에 떠내려 온 시신의 노부부는 하와이에서 아주 큰 목회도 하시고 중요한 간부로 오래 동안 봉직하신분이며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임종을 지키신 분들 중 한 분이란다 

이 분이 이승만 대통령과 관련된 밀서인가 하는 자료와 하와이의 토지 문서를 인천에 있는 모 대학에 전달하려고 영구귀국하시고 관계자들을 만나는 중이었는데 돌아가셨다고 한다

 

민주는 기획기사의 자료를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했다

과연 이승만 전 대통령이 2.8 독립선언과 3.1 운동에서 중심이 되거나, 선언서에 이름을 올린 역사가 있을 수 있는가?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이 부분에서 일치한다

즉 일생동안 말과 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라는 점

이것은 보수 쪽에선 제대로 된 독립운동을 한 업적이라고 하는 근거가 된다

반면, 진보쪽에선 그가 무력투쟁을 했다거나 행동으로 독립운동을 한 적이 없는 이론가요,

서생에 불과했다는 비판의 근거가 된다

동일한 사실을 두고도 이렇게 극명하게 입장 차이가 나는 이유는 한 마디로 프레임으로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일생동안 이승만을 연구해 온 손세일 씨의 주장이었다

그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해방공간에서 이승만에게 밀리고 6,25전쟁에 실패한

좌익 진보들에겐 이승만이 철천지 원수와 같다"는 것이었다

"20세기는 공산주의의 시대였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공산주의 열풍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강렬한 복음처럼 퍼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6년 5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 대일 배상특사로 내한해 한국을 둘러봤던

폴리는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 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대결한 독립운동가가 다름 아님

이승만과 김구였다는 사실은 특이할 만하다'

우남은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처지가 달라서 이런 사상

(공산주의)을 수용하는데는 큰 위험이 따른다"고 여러차례 경고했다

건국 과정 초기엔 이런 이승만의 반공주의가 우남과 백범의 공통점을 잇는 연결고리였지만 정부수립 후엔 분열의 씨앗이 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말로만 독립운동을 했는지, 아니면 세계 외교의 중심지인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고 확실한 판단을 가지고 기획하고 조정했는지를 밝힐 팰요가 있을 것 같았다

우남 이승만 박사가 어릴 적 지은 시

이승만,,,조지워싱턴대와 하버드대를 거쳐 프린스턴데에서 한인 최초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한인 사회의 전설적인 인물

 

그이 방문은 이미 어러날 하와이 현지 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그해가 1913년 2월 3일 38세의 청년 그와 하와이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된 것이다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 대부분은 하와이에서 조달되었다

하와이는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임시정부가 있던 곳이라 보면 된다

 

한국을 두번째 떠난 이유가 된 "105인 사건"이 일본에 의해 날조된 것을 주로 기록한 책

105인 사건 ? 이승만 전 대통령님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일본이 획책하고 있는 한국기독교 말살의 만행을 고발하고 향후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과

이승만 박사의 신앙적 사상을 드러낸 책이다"

"한인중앙학교"여학생의 기숙사 터

조선인들은 남존여비 사상이 오래되다보니 딸들에게 공부나 자기 개발을 시키주지 않고

입하나 덜려고 어린 나이에 중국인 또는 하와이 본토인에게 팔려 시집을 가는 경우를 번 것

그래서 무엇보다 시급한 것이 여학생 학교란 것을 깨달은 것

100년 전에 이런 선각자들이 계셨기에 우리나라 여성분들이 지금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당당하고

실력있는 여자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성해방의 선각자가 이승만 박사

대한민국 헌법도 기독교적 정신 위에 완성된 것

소녀들을 데려와 기숙을 시키며 급히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여성해방은 교육의 평등권 회복 아닌가, 이승만 박사는 여성을 동일한 인격체요

주체로 보고 여성 지위향상의 기초가 되는 여성들만의 학교를 계획하고 설립했다고 한다

 

조국의 독립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육영사업과 한인들의 역량을 키우는

일에 주력을 하신다

성경에 있는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기독교 사회를 우선 하와이에서 실현해 보고 싶으셨던 것이다

청교도들이 목사들을 앞세워 미 대륙에 정착하여 학교부터 세우고 시민의식을 키워나갔던 것처럼

말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도 자신들의 나라를 세운 최초의 지도자를 국부라고 부르며 자랑스럽게 기념을

하는데 한국은 어찌된 연유인지 광복이 된지 70년의 세월이 되어도 변변한 동상하나 세우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일이 어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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