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관계를 돌봄이라 부를 때 - 영 케어러와 홈 닥터, 각자도생 사회에서 상호의존의 세계를 상상하다
조기현.홍종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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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세상을 한번 휩쓸고 지나간 이후 가장 관심이 가는 단어가 '돌봄'이었다. 세상이 험해지고 어려워질수록 가장 취약한 부분에서 문제는 가장 먼저 나타나는 법이니까. 그런 측면에서 '돌봄'이 우리 사회에서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지점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코로나19의 시대가 지났다고 하지만, 우리는 안다. 절대 그 이전의 시대로 다시 돌아가기는 어렵다는 것을. 그 이유는, 어느 부분이 어렵고 힘들고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인지를 너무 명확하게 알아버렸기 때문에, 문제의 한복판으로 다시 돌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직진. 앞을 보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찾아 나아가는 수밖에. 그렇다면, 그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편집자와 두 저자가 나누는 대화 속에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 의식이 있었다. 결국 돌봄이라는 건 잘 사는 문제, 잘 죽는 문제와 직결된다는 느낌이었다. '돌봄'의 개념을 확대하여 생각해보면, 결국은 삶과 죽음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단지 아프고 병들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돌보는 주체이면서 또한 돌봄을 받고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는 인식이 가장 중요할 것 같다. 그러니, 돌봄을 남의 이야기라고 가볍게 넘기면 안 된다는 거다.
다만, 지금 그 돌봄의 의무와 책임, 내지는 상황으로 인하여 나의 주체적인 삶에 영향을 받는가의 여부가 이 '돌봄'을 얼마만큼 가깝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와 닿아있는 듯하다. 이는 경제적인 면뿐만 아니라 자존감 혹은 자아실현 등에 있어서의 관점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것이다. 결국, 돌봄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나'를 돌아볼 여유가 있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면에서 늘 부딪히는 현실적인 문제가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의무의 테두리와 책임이 결국 돌봄의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부담시키는 악순환의 첫 시작일 듯. 특히 여기에는 청년의 문제뿐만 아니라 여성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노인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고 봤을 때, 결국 가족이라는 이름 하나에 지워지는 무게가 얼마나 큰 가를 실감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뭔데? 속 답답할 정도로 수없이 질문을 던져보지만, 답이 선뜻 나오지는 않는다. 주고받는 대화를 속에 다양한 대안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그 대안들이 우리 사회에 딱 적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인가에 대해서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려웠다. 저자들의 대화에서도 어떤 방향이 이상적인지는 알고 있지만,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또다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계속 나오고 있음을, 그래서 그 많은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지 않는 이상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이야기하는 듯했다.
맞다. 명료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어렵다. 또한 이런 대화의 목적은 어떤 정책이나 사업을 실현시키려는 데 있지 않으니까. 이들의 대화를 가만히 쫓아가며 든 생각은, 결국 우리 사회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을 인지하고 인식하는 것부터가 중요하다는 생각. 그리고 그런 생각에 대해 사람들은 모여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 느끼는 것, 필요한 것, 어려운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방법을 시도해볼 수 있고,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으며, 누구의 도움과 관심, 배려가 필요하고, 그 안에서 우리 사회가 책임질 수 있는 부분과 개인이 감당해야 할 부분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그래서 이런 생각이 확산되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만큼은 할 수 있도록 실제로 움직일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이 참 의미있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가 사회에서 '관계' 없이는 살아가기 어려우니까. 어떤 식으로든 우린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라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있는 그대로 '돌봄'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돌봄'을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끌고 와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우선순위에 밀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알고, 말하고, 움직여야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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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용어의 탄생 - 역사의 행간에서 찾은 근대문명의 키워드
윤혜준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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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개의 키워드로 근대를 모두 알아나가겠다는 건 무리겠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뭔가 내가 역사적이고 근대적인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이 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키워드 몇 가지에 대해서는 어디 가서 아는 척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이 책의 방대한 문헌 자료와 키워드에 따른 역사의 흐름을 정확히 다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솔직히, 생각보다 역사가 깊고 방대했다. 모든 내용을 마스터했다고 얘기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요즘 시대에 내 머릿속에 모든 지식을 넣고 있어야하는 게 아님을 변명으로 삼아 본다면, 이 책을 옆에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읽으며 각 용어의 의미 변화를 찾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은 생겼다. 책이란 그래서 곁에 두는 거지, 하는 변명과 함께.

이 책은 '근대문명'이라는 용어가 포괄적으로 뜻하는 체제, 제도, 문화, 가치, 정서 등이 한반도에 도입되어 유지되는 현실을 전제로 한다.(9쪽_'머리말' 중)

그리고 이 책이 그저 단순히 서양의 근대만을 다루고 있지 않아 읽기 더 좋았다. 시작은 이랬는데, 그게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받아들여져서 사용되고 있다, 하는 식. 그러니 그저 남의 이야기라고만 생각이 들지 않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다루게 되는 개념들에 대해 그 의의를 찾아보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했다. 특히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용어들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봐도 좋지 않을까, 싶은 용어들에서는 책 읽는 속도를 줄이게 되기도 했다. 내가 의도를 잘 맞춰 읽고 있는 거라면, 이 책은 같은 속도로 한번에 읽어내려가는 책은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책의 특징이, 어떤 키워드를 먼저 읽어도 불편함이 없다는 것(물론, 앞에서 언급된 이야기를 알아야 그 뒤의 설명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는 있다. 그렇게 연결고리를 지어주고 있기도 하고). 관심이 가는 것부터 골라 읽으며 조금씩 용어의 범위를 확장해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나 민주주의, 그리고 헌법, 법, 자유를 묶어서 함께 읽어도 좋았겠다는 생각. 그리고 그 와중에 우리 사회에서 지금 현재 사용되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를 가늠해보는 것까지. 요즘 부쩍 이런 개념과 가치에 대해 더 생각해보게 되는 때이기도 한듯도 하다.

누군가는 익히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일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아메리카'라는 이름의 유래부터 생소했다. 아, 사람 이름, 그것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인물의 이름을 딴 게 아니라니, 싶어 놀라웠다. 그리고 이런 놀라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에서의 용어의 의미가 읽으면서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아, 그랬구나. 어머, 이런 뜻이였어. 아, 이렇게 쓰였던 말이 지금 바뀐 거구나. 그러니 이런 내 모습을 누군가 옆에서 보고 있다면, 그동안 이정도의 지식도 없이 어떻게 살았나,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신기한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근대 시장경제의 원조 영국에서 '경쟁'을 뜻하는 'competition'은 적어도 그 어원의 의미는 '전쟁'과 사뭇 다르다. 이 영어 단어의 라틴어 어원 'competere'는 '다툼'보다는 '협동'의 뜻에 더 가깝다. '함께com-'와 (어떤 대상을 얻기 위해 ) '노력하다petere'가 결합된 형태다.(52쪽)
'통화currency'와 비교하면 '유동성liquidity'은 그 어감부터 사뭇 전문적이고 다소 신비스럽다. 돈의 움직임이 '쉬엄쉬엄' 다니던 시대에서 '뛰어다니는' 시대를 거쳐 '유동성'으로 액체화된 시대에 도달하면 수치로만 존재하던 거액이 한순간 증권시장에서 '증발'하는 기체 상태로까지 변하는 일도 다반사가 된다.(96쪽)
개신교 국가인 프로이센의 지식인 이마누엘 칸트가 보기에 '계몽'의 적은 '미성숙함Unmundigkeit'이었다. 그가 말한 '미성숙함'은 개인이 자율적 사유와 판단을 하지 못하는 상태, 즉 매사에 가섭하는 국가 권력 및 국가의 공식 교회를 비판한 셈이었다.(124쪽)
'산업'으로 뜻이 변할 'industry'를 아직 '근면'으로 이해하던 시절에도 윌리엄 호가스의 예가 보여주듯이 '근로'의 뜻이 한편에는 담겨 있었다.(148쪽)
'대통령'으로 번역된 'president'가 선출직이 아니거나 주재하는 회의와 상관없는 권력자를 가리킬 때도 최고 권력자 자체를 지칭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위임받은 권위를 행사하는 대리자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196쪽)

사실 너무 많아 추려 정리할 수조차 없지만, 뭔가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내용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 눈이 반짝여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책은 장황하게 부제를 달아 자화자찬하는 문구를 나열하곤 했다. 그 말만 믿고 돈을 지불하고 책을 살 것인가? 막상 사서 보면 실망하지 않을까? 이러한 불편을 해소해주는 것이 <먼슬리 리뷰>의 취지였다.(250쪽)

지금 쓰고 있는 서평도, '리뷰'. 과연 누군가 나의 이 '리뷰'를 보고 실망하지 않으면 좋겠다. 불편을 해소해줄 수 있는 리뷰였길.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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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읽기 - 7가지 주제로 읽는 신곡의 세계 교유서가 어제의책
프루 쇼 지음, 오숙은 옮김 / 교유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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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곡> 안내서들이 때로 그렇듯, 독자가 그 시를 읽는 수고를 덜어주는 것은 나의 목표가 아니다. 나의 목표는 여러분이 당장 <신곡>을 집어들고 읽고 싶다는 욕구에 불타게 만드는 것이다.(11-12쪽_'들어가는 말' 중)

저자의 목표에 일정 부분은 도달한 듯하다. 책꽂이 깊숙한 곳에 장식용으로 꽂혀 있던 책을 우선은, 꺼냈으니까. 3권짜리 두툼한 책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는 순간 더 묵직한 부담이 생기긴 했지만. 언제고 읽어내야겠다는 마음은 늘 갖고 있던 책이었다. 다만 선뜻 손을 대기 쉽지 않았던 책이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기에 실패했고, 나도 처음 몇 장을 읽다가는 금방 나 스스로를 책망하며 책을 덮고 말았으니까. 그런 면에서, 이번에는 꼭 성공해보자고 마음으로 다짐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만은 확실하다. 그것만으로도 우선 이 책을 읽은 보람은 있었다.

책이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은 이 책이 이런 이야기야, 하고 책을 줄거리를 설명해주고 각 부분에서 인물의 특징을 조목조목 찾아 나열해줄 것인데, 이 책을 읽었다고해서 <신곡>의 흐름을 한눈에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 얘기는, 줄거리를 따로 밝혀 이야기해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친절하지 않은 책이라는 뜻. 헌데 이 말을 잘 생각해봐야 한다. 친절한 책이 과연 좋은 책일까? 흔히 사람들이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에 대해서는 읽지 않고 읽은 척하기 쉽다고 말한다. 워낙 고전 작품에 대해서는 여러 방향으로 이런저런 설명이 자세히 담긴 책들이 많으니까. 그런 책 한 권 정도 읽고, 마치 원작을 읽은 듯 이야기하기 쉽다는 것이다. 헌데, 과연 이 책을 읽고 <신곡>을 읽은 척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닐 것 같다. 진짜 <신곡>을 읽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책? 읽지 않고는 전체 흐름을 따라갈 수는 없는 책? 이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도 어려웠다. 이미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부분에서 숨이 턱 막혔다. 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다 기억하고 계보를 그려 나가지. 이야기라 하면 인물 간의 관계도가 그려져야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 법인데, 이 많은 인물들의 관계도를 직접 그리지 못할 정도가 될 듯하여 겁을 먼저 먹었다. 그리고 7가지 주제(우정, 권력, 인생, 사랑, 시간, 수, 말)에 대한 각 이야기도 쉽지 않았다. 헌데, 곰곰이 왜 어렵게 이 책을 꾸역꾸역(사실, 이 말이 제일 솔직한 듯. 이 책을 읽어내기 위해 나름, 노력이 필요했으니까) 읽게 될까를 생각해보니, 나는 서양 역사나 문화, 정치 등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했다. 지금껏 책을 읽으면서도 해외 작품을 선호하지 않았던 것도, 그 작품들의 배경을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던 거다. 그래서 그나마 조금 더 익숙한 국내 작품들을 읽었던 것.
한 마디로, 배경지식의 부족이고 더 정확히는 공부의 마음이 부족했던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느낀 한 가지가 그거다. 알고 공부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며, 연관짓고 기억해서 작품을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즉,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책이 그 공부의 노력을 해야함을 분명히 일깨워준 책이었다.
더 솔직히 고백하면, 이 책의 내용을 모두 다 이해했다고 하지 못하겠다. 한번에 이해할 수 있을 거였으면, 지금까지 <신곡>을 읽지 못한 이유도 없겠지, 혼자 핑계도 대보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신곡>을 읽으면서 옆에 같이 두고 찾아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책의 장점은 주제별로 있기 때문에, 각 이야기를 읽으면서 테마를 찾아 살피기에 적절하다.

<신곡> 읽기가 언제 끝날 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성공하게 된다면, 그건 분명 이 책의 덕일 듯.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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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다 복제하기 사계절 1318 문고 143
캐럴 마타스 지음, 김다봄 옮김 / 사계절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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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겐 영혼이 있어. 그건 너만의 것이야. 적어도 난 그렇게 믿는단다. 설령 네가 영혼을 믿지 않는다 해도, 너와 이브, 미란다는 분명히 달라. 과학이 설명해 내지 못하는 면에서 말이야. 너는 인생에서 여러 선택을 하게 될 거야. 어떤 선택은 네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럼 넌 변하겠지. 인생은 복잡한 거란다.(323쪽)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인생을 저만큼 앞서 산 어른으로서 아이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고 고민하고 갈등할 때, 누구나 다른 인생을 향해 가는 각자의 독립된 개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만들어나가게 될 거라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됐다. 그리고 그린 박사님의 뒤이은 대사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리엘, 어른이 되어 가는 건 쉽지 않은 일이야. 복제인간이 아니라도 말이야.(323쪽)

사는 것이 쉬우면 인생이 아니라는 말을 가끔 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마주하게 될 줄 몰랐다. 이미 어른이 된 나로서는 이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지만, 아직 어른이 되기 전의 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혹여라도 이런 말을 하는 어른인 내가 요새 흔히 말하는 꼰대가 되는 건 아닐지.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생명을 복제한다는 것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과거 관련된 사회적 이슈도 있었고, 또 지금의 새대는 인공지능이 삶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되어 있는 시점이니, 인간이란 존재도 사람들이 원하기만 한다면 그 원하는 방향으로의 조작(?)이 충분히 가능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 그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될 것인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 혹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사실, 이미 이런 생각에 대한 나 스스로의 부정적인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조작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현상에서의 심각한 부작용을 짐작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여러 사회적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한 존재의 고유한 특성을 무시하고 실험 대상 혹은 활용 가치가 높은 하나의 도구 정도로 취급하고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큰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성장하는 청소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지금 이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스스로 잘 찾아 바르게 세울 줄 아는 힘일 것인데, 그런 힘을 작위적인 통제를 통해 조작하고 있으니,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완벽하다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미란다는 착한 아이로 성격뿐만 아니라 공부나 발레에 있어서도 거의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다 발병하면서 어른들은 오히려 충격을 받는다.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충격. 거짓말도 해서는 안 된다는 미란다와 그런 미란다를 자신들이 원하는 아이로 성장시키기 위한 어른들의 기대가 씁쓸하게 느껴지는 부분(심지어, 미란다의 부모로서의 모습에 더욱 완벽함을 만들기 위해 성형까지 한 부모의 모습은 충격)이기도 했다.

제가 방금 선생님을 불쾌하게 했는데도 금방 기본 상태인 유쾌함으로 돌아오시잖아요. 저한테는 그런 기본 상태가 완벽함이에요!(348쪽)

그럼에도 미란다, 아리엘, 이브, 이 아이들은 제 인생을 향해 스스로 선택했고 자신을 만들어 나갔다. 그 부분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 선택이 옳았든 그렇지 않았든지는 누구도 판단할 수 없다. 그저 인생의 기로에서 아이들이 그때그때 문제를 잘 해결해 나가면 될 뿐. 그것이 이 아이들이 배운 인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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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카페 싱긋나이트노블
구광렬 지음 / 싱긋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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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자살카페라니. 요근래 더욱 죽음, 자살과 관련해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에, 이 소설을 읽다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무겁게 내려앉는 소설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었고, 다 읽고나서 생각보다 더 마음이 가라앉았다.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죽음의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어떤 죽음도 정당하거나 마땅한 죽음은 절대 없다. 얼마 전 읽었던 책에서 마주해야 했던 노동자들의 죽음도 그랬지만, 제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죽음을 보면, 화가 난다. 그리고 한 마디로, '억울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죽음은 절대, 그들의 손에 의해 선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명,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 간 상황과 세상,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속이 상하다.

"사공철호, 하영욱, 김준혁, 설주택, 정현아, 한슬기...... 이분들은 영안실에 계시고...... 그리고......"(194쪽)

소설을 읽으며 이들이 어디에서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는 절망적인 극단의 상황에 내몰렸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것이 문제였다. 이들이 처한 상황은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어떤 해결방법도 찾을 길 없어 막막한 상황에서 모든 삶의 힘을 내려놓을 지경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이 겪은 상처와 고통이 가볍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마음의 무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무거웠다. 그 무거움을 내려놓을 힘조차 없어 그 무게에 계속 짖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들은 제 혼자의 힘으로도 제 삶을 어쩌지 못하고 결국, 다른 이의 손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눈에는 해결할 수 있는, 충분히 다시 삶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다만, 그 문제들을 들어주고 살펴 해결할 수 있도록 나서려는 사람, 조직, 사회가 없었다는 것. 자신들과는 별개의 문제로 두고 남 탓으로만 넘기려 했다는 것. 그래서 어디에서도 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심지어는 그들의 목소리를 막기까지 했다는 것.

'차라리'와 '어차피'는 힘든 시기에 빈도 높게 쓰이는 말이다. 차라리는 후회, 실망, 절망 등과 친하며 '살다' 뒤에 '죽다'를 놓으면 '사느니 차라리 죽다'가 된다.(201쪽_'작가의 말' 중)

'차라리'는 '여러 가지 사실을 말할 때에, 저리하는 것보다 이리하는 것이 나음을 이르는 말. 대비되는 두 가지 사실이 모두 마땅치 않을 때 상대적으로 나음을 나타낸다.'의 뜻을 갖고 있다. 여기서 눈길이 가는 부분은 '두 가지 사실이 모두 마땅치 않을 때'에 있다. 삶도 죽음도 모두 마땅치 않은데 그 중 나은 게 죽음인 거니까. '어차피'는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또는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의 뜻을 가진 단어다. 삶이든 죽음이든 상관 없으니, 죽음이어도 괜찮다는 거다.
이 소설을 읽고 다짐하게 된다. 이 두 단어는 웬만하면 쓰지 말아야겠다고. 이 두 부사가 죽음과 엮이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결말로 가는 지름길이 되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서운 결말을 상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올해 소망을 여러 번 말하게 되는 것 같다. 가장 간절한 소망이어서 그렇다.
아무도 슬프고 아픈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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