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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함을 듣는 일 - Listen to Silence
김혜영 지음 / 오후의소묘 / 2023년 3월
평점 :
우선, 작가의 그림들을 책 한 권에서 다 볼 수 있어 행복하다. 그리고 고맙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다 봐도 되나? 싶을 정도의, 과분한 배려를 받은 느낌도 든다.
제목부터가 이 책을 함부로 아무데서나 펼치지 않고 싶게 만들었다. 괜히 환한 대낮, 사람소리 시끌시끌한 소음에서 벗어나는 시간과 장소를 찾고 싶었다. 그리고 책을 펼친 시간은 밤, 어둠 안에서 누구도 나를 방해하지 않을 장소, 작은 스탠드 불빛 안에서 조용히 책을 펼쳤다. 그리고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밝게도 보고 조금 어둡게도 보고 앉아서도 보고 누워서도. 오래 보기 위해 그려진 그림이다.(16쪽)
_<나는 가만히 손을 뻗는다>, 2019. 천에 동양화 물감, 37X52cm.
: 오래 보려고 그려진 그림이라면, 오래 봐주고 싶다. 그럼, 오래 본다는 건 뭘까. 그림 속 그림과 그림 속 그림이 걸린 공간에서 내 시선은 여기에서 저기로, 또 다시 구석에서 가운데로 옮겨다니는 듯하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실 속에 잠식되어 내가 점점 사라진다고 느껴질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누구도 없는 공간에서 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기를.(61쪽)
_<아무도 살지 않는 집>, 2020.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97X138cm.
: 언젠가 숨고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의자를 한없이 내리고 어디에서도 나를 찾지 못하도록 숨고 감추려고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누구의 시선과 관심조차 아팠던 그 때 필요했던 것이 이런 공간이었구나. 아무도 들이지 않으려 했던 내가 나를 만날 수 있을만한 곳. 이 집 역시 숨기 위한 방어막을 짙게 만들어놓았구나.
날 좋은 날, 무거운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간 날.(67쪽)
_<초록의 틈에 서>, 2020. 천에 동양화 물감, 72.7X91cm.
: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몸이 무겁고 기운이 나지 않는 날.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이다 한낮에 지쳐 의자에 파묻힌 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 좋아하는 서점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 꽃집에서 팔던 후리지아 한 단을 사올 걸, 후회했다. 다음엔 꼭 사와야지.
각기 다른 삶에서 나오는 것들이 다정한 겹을 만들어줄 듯했다. 벽에 그림을 걸고 한 발짝 뒤로 나온다. 팔을 X 자로 만들어 스스로를 안으며 생각한다.(83쪽)
_<고요한 상영회, 두 번째>, 2022.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53X41cm.
_<뒷면에서 만나요>, 2022.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53X40.9cm.
: 저 상영회에 초대받고 싶다. 뒷면에서 마주치게 되는 사적인 만남이 더 매력적이긴 하다. 어쩌면 상영되는 이야기 이면에 숨겨진 은밀한 비밀이 더 마음을 끌어당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반짝이는 결 따라 다른 삶이 어우러질 때, 이 이야기들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게 되기도 한다. 뭐, 그런 느낌.
물결이 내는 소리는 조용하다. 주의를 기울여 조용함을 듣는 것은 다정한 관심의 방향이다. 사소하지만 부명하게 있는 이야기들을 만나고 싶다.(95쪽)
_<물결이 내는 소리>, 2021.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91X91cm.
: 여행 중 아침 산책을 하다, 바다의 물결을 한참 바라보며 앉아있던 장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물결을 향하고 있던 그 시간들이 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좋았는데. 조용함을 듣는다는 것이 참 역설적이지만, 잘 듣고싶어지는 매력적인 말이기도 하다. 조용함을 듣는 것, 조용함을 듣는 일. 작가의 조용함이 작품으로 내게 스미는 느낌이 좋다.
날씨가 크게 두 번 바뀌는 동안 많은 친구들이 그 낡은 의자에 기대 슬픈 날에는 울기도 하고 지친 날엔 짧은 잠을, 또 작은 한숨 같은 말들을 뱉고 가기도 했다.(130쪽)
_<기대 앉는 우리들>, 2021. 천에 동양화 물감, 유채, 90X42cm.
: 예전 사무실에 작은 1인용 소파가 있었다. 가끔 다리까지 올려 앉아서는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기도 했었다. 지치고 피곤하고, 마음을 다치게 하던 순간들을 그 소파에서 위로받았었다. 그 소파가 그리워진다.
글그림이란 말이 잘 어울리는 책이다. 어떻게 조용함을 듣을 수 있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