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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피부 - 나의 푸른 그림에 대하여
이현아 지음 / 푸른숲 / 2022년 7월
평점 :
품절
여름의 한복판은 살짝 지난, 이제 여름의 끝에서 가을을 기다리는 시점에 '여름' 책을 읽었다. 근데, 이 책 여름 책 맞나? 여름 색깔의 대명사일 것만 같은 '푸른색'은 사실, 편견이었지 싶다. 저자의 이야기 속에는 어쩌면 더 깊은, 가을과 겨울, 봄의 감정까지도 모두 녹아있는 '푸른색'이 담겨 있는 듯했다. 어쩌면 여름에 읽어 여름의 블루라고 생각했을 지도. 가을에 읽으면 가을의 블루, 겨울에 읽으면 겨울의 블루, 봄에 읽으면 봄의 블루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은 여름이라, 여름의 블루가 제일 잘 어울리지만.
쓴다는 것, 내려간다는 것, 써 내려간다는 것. 나는 그림일기를 쓰면서 줄곧 '내려간다', '가라앉는다'라는 신체적 느낌을 받았다. 펜을 움직이면서 나는 얼마나 깊이 침잠할 수 있을까.(17쪽)
저자가 이야기하는 이 하강의 침잠을 그림과 그림일기의 내용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하염없이 감정을 끌어내리는 하강이 아니었기 때문에, 놀이기구 타듯 위태롭고 불안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요하고 조용히 저자의 도망 속으로 함께 따라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일기'를 써 내려갔음을 미리 이야기해줘서였는지 모르지만, 저자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듯도 해 이 내밀함에 조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내밀함에서 나오는 진심이 느껴져 좋았다. 그저 단순히 남의 일기 몰래 훔쳐보는 음밀함이라기 보다는, 속깊은 대화를 나누고 난 후의 묵직함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 책은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 혼자만의 공간에서 펼쳐보는 것이 더 어울리는 책일지도 모르겠다.
[책 속 문장들 & 생각]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대차게 혼난 뒤, 엉엉 울면서 집에 갔다. 무언가를 바라는 것만으로도 혼이 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56쪽)
_어쩌면 바라는 것, 얻고자 하는 것, 소유하고 싶은 욕심은 아주 작고 사소한 기억에서 비롯돼, 좌절당하고 거부당하며 자연스레 서서히 잊혀지는 것은 아닐지. 하지만 잊혀지고 가라앉을 뿐, 없어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 삶에 들러붙어 있을 것이다. 이런 유년의 기억.
계절을 기온에 따른 기호로만 나타내는 건 어딘가 재미없고 맹숭맹숭하다. 수박도 한 번 먹어보지 못하고 여름이 가버린 것과 비슷하달까. 저마다의 몸이 다른 것처럼 계절을 살아내는 방식도 수천 가지다.(75쪽)
_그러니, 각자가 가지고 있는 게절의 색깔과 느낌, 감정은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또 지금의 이 여름을 어떤 색깔과 방식으로 살아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꼭 푸른색이 아니어도 좋을, 나만의 여름.
소설가는 연고 없는 언어로 삶을 재건축하고, 화가는 타인에게 방향을 여는 행위를 통해 작은 망명을 실현한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시 생활의 자리에 앉는다.(100쪽)
_그래서 저자는 화가의 그림에 다시 자신의 노트북을 열었고, 나는 저자의 책에 다시 생각과 마음을 빼앗기는가보다.
매일 이 문 앞을 지나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은 바닥에 닿아 있는데, 그림 속에선 왜 문이 떠 있을까? 이 문을 바라보는 건 일종의 의식이었을까? 정말 열기 위해 만들어진 문일까?(114쪽)
_쏟아지는 질문들과 무수히 많은 생각들, 이 모든 것에 정답이 없지만 그 속에서 또다시 정답을 찾아나가려는 시도와 시간들이 그만큼 더 값지고 소중할 것이다. 그렇다면, '조지아 오키프'의 문, 저자의 문, 그리고 나의 문은 무엇일까? 문 뒤의 공간은?
우연히 보게 된 그림, 책 속의 문장, 누군가가 건넨 한마디. 그것들이 곧바로 제 삶에 뿌리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다가 생각지도 못한 어느 날 기다렸다는 듯, 말간 얼굴을 하고 찾아오지요.(222쪽)
_꼭꼭 감추둔 보물상자 속 보석처럼 숨어 있다가 어느 순간 반짝! 눈앞에 떠오를 그림, 문장, 한마디를, 이 책에서 주워올릴 수 있을 듯하다.
저자가 '써내려간' 문장들에서 내가 '주워올린' 감정들을 다시 곱씹어보기 좋은, 여름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