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는 토요일 새벽 - 제1회 아르떼문학상 수상작
정덕시 지음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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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서 내용이 쉽게 연상되지 않았다. 거미가 주요 소재인 건 알겠는데, 그래서 토요일 새벽이 무엇인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럴 때는 직접 읽어 궁금증을 해소하는 수밖에 없다. 제목이 독특하고 직관적이지 않아 이런 제목이 정해진 이유가 궁금해졌다.

오늘 무지개다리를 건넌 두희는 17년을 함께한 나의 반려동물이었다. 나는 처음으로 두희를 마음껏 쓰다듬었다. 빳빳하지만 부드러운 털들이 손끝을 지나갔다.(...) 나의 이십대와 삼십대를 함께한 반려동물이 세상을 떠났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나를 위로할 것이다. 하지만 두희가 거미란 것을 알게 되면 어떤 사람들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그리고 두희가 타란툴라라는 것을 알게 되면 질문들이 쏟아진다.(7-8쪽)

소설은 이렇게 시작했다. 타란툴라 반려동물 두희의 죽음. 그리고 그런 죽음을 겪는 수현의 마음. 처음에는 담담하게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무려 17년이었고 두희와의 시간들 속에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건 단순히 두희를 둘러싼 일들만도 아니고 이때는 수현과 두희를 함께 묶어 그들을 둘러싼 일들이 17년의 시간과 그 이후까지의 시간들 속에서 일어났다고 해야 맞다. 그러니 수현의 삶에서 두희를 빼고는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토요일 새벽마다 두희의 방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출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면 두희의 움직임을 어렴풋하게 살필 수 있었다. 두희도 눈치챘을까. 유리벽 너머에 함께 지내는 거대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 무언가는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는 개체이며, 토요일 새벽마다 졸음을 참고 자신과 온전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137쪽)

누군가와 함께하기 위한 노력이 이토록 일방적일 수 있을까. 수현의 두희를 향한 한 방향의 마음을 과연 두희가 알았을까. 칸이 칭과 교감하기 위해 굶기는 방법으로 겨우 산책을 해나가는 것을 본다면, 수현이 두희와 토요일 새벽을 함께 보내는 것도 어쩌면 인간의 일방적인 짝사랑이며 인간중심의 시각으로 다른 개체를 살피는 것이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두희가, 칭이 이런 인간들의 행동이 반가울까. 과연 좋아했을까, 아니 이런 노력이라는 것을 알아채기는 했을까.

J가 말했다. 인간이 아무리 코끼리의 사육 환경을 신경쓴다고 하더라도 야생보다 좋은 환경을 제공할 수는 없으며, 동물원에 있는 코끼리가 인간의 욕심 때문에 그곳에 갇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203쪽)
"근데, 인간적으로 생각하는 게 뭐가 나쁜 거야? 우린 인간이잖아. 얘네도 타란툴라적인 생각으로 세상을 이해할 텐데."
"사람들이 가진 힘이 다른 동물들에 비해 너무 강력하잖아."(219쪽)

소리가 제 자식을 위해 거침없이 두희를 내리치려 했던 상황이 떠올랐다. 인간은 너무 강력하다. 한순간 자신이 갖고 있는 강력한 힘으로 다른 동물들을 제압하고 죽일 수 있다. 그런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편의와 욕심으로 동물들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 분명 문제일 것이다. 그러니 J가 이제 그만하려는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환경과 관련해서도 동물과 관련해서도 이야기를 하다보면 결국 인간이 끼어들 수밖에 없다. 결국은 인간에 의해 자연 혹은 야생의 환경이 바뀌는 것이 사실이니까. 그렇게 봤을 때 불빛을 제거하고 최대한 타란툴라의 삶의 환경을 최대한 맞춰주었던 방에 있었던 두희는 과연 괜찮았던 것일까. 야생에서의 삶과 비교한다면 결국 인간의 보호 안에 주는 먹이를 먹으며 생활했던 동물원의 코끼리와 다르지 않아 보였다.

같은 소통 방식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들 사이의 교감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일까,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교감하고 서로의 삶을 존중하는 것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일지도 궁금해졌다. 이건 꼭 다른 동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같은 말을 한다고 해도 인간들 사이 소통도 어려울 때가 많으니까. 어떤 방식으로 나의 환경과 모두의 환경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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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없이 싫어하는 것들에 대하여
임지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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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가 있다. 미움 받고 있다는 생각, 주변의 시선이 나를 형편없는 존재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은 다 잘나가고 멋지고 훌륭하지만 그렇지 못한 내가 상대적으로 별볼일 없는 존재로 느껴질 때. 그럴 때 과연 난 어떤 생각들로 나를 지켜왔나 생각해보면, 대부분 자책이거나 혹은 숨는 방법으로 내 보호막을 만들곤 했던 것 같다. 그리 썩 좋은 방법은 아니었으나 그렇게라도 내가 더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었으니 안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세상의 많은 시선들에 스스로를 지켜나가기 위해 보다 적극적인 방법과 이유를 찾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침없는 표현을 서슴없이 할 줄 아는 것을 보면서도, 나보다 낫다 싶었다.

'등신들 같으니!'
비죽비죽 새어나오던 웃음과 물결처럼 퍼져오던 안도.
이토록 많은 말이 오가는 세상에 말 한마디가 그토록 크게 사람을 흔들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놀라고야 만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버티고 또 흔들릴 만큼 나는 취약했다.(25쪽)

속으로라도 내뱉는 한 마디에 무너졌던 나 자신을 조금은 세워놓을 힘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너무 나의 심정을 그대로 적어놓아서. 딱 나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누군가의 말과 평가, 나를 향해 날아오는 모든 반응에 순간 긴장하고 심장이 두근댄다. 지금까지를 되돌아봤을 때에도, 그 말의 사실 여부나 타당성의 판단은 사라진다. 다만 그 말 속에 담긴 뜻과 감정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런 순간을 마주하게 될 때의 나. 세상 작아지곤 한다.

몇몇 친척들은 할머니를 흉하게 여겼다. 할머니가 보이려던 기품과 할머니가 사는 곳 사이에 낙차가 있다는 거였다. "노인네가 참 노인네답지 않게 허영이 많아." 그건 엄마가 들은 "미친년, 지하에 사는 주제에"와 비슷한 맥락이었다. (44쪽)

이런 시선들 말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주관적인 판단이 사실인 양 너무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한다. 그런 판단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놓고 말하는 탓에 이래도 된다는 생각을 세상에 퍼지게 되고, 그렇게 퍼진 생각이 마치 그래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는다. 당연한 건 이 세상에 없다. 그런 당연함으로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것도 옳지 않다.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을 더 위에 놓고 싶은 욕심으로 생각할 줄 모른다. 어쩌면 그들도 그렇게 하는 게 자신을 지키는 방법일 수도 있겠으나, 이런 방법뿐이라면 세상이 너무 험난하기만 한 것이 아닐까.

나는 모니터에서 벌거벗은 나를 만날 날을 각오해왔다. 이 문장을 쓰는 동안 영혼이 저 아래 깊숙이 가라앉는다. 한 여성이 살아가는 데 그런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에. 각오해온 일이 정말 일어났으며 여전히 이런 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에게 일어난다는 것에. 그럼에도 각오가 나를 돕는다. 나는 내 삶을 살아가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숨고 숨기는 대신 차라리 내가 처한 상황이 나와 함께 드러나기를 원한다.(141쪽)

가만히 생각해보면 대부분 불쾌한 감정이나 나 자신을 무너뜨리는 상황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을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누군가와의 알지 못하는 관계 안에서도 문제는 발생한다. 그런 문제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는 일들에 대해서까지도 방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무척 억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세상이라는 것이 여전히 그런 사회적 폭력을 상당 부분 안고 있으니 이 또한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이렇게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 더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럴 때마저도 작가는 자신이 어떤 태도와 생각을 갖고 살아가야하는가에 대해 명확히 말할 줄 안다. 이런 태도가 있었으므로 자신을 지킬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참 단단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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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 창비교육 성장소설 13
보린 지음 / 창비교육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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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브 #보린 #보린장편소설 #창비교육 #가제본서평단 #서평 #책추천

연우를 큐브 안에 넣었던 선택은 정당했던 것일까. 안전했던 게 맞을까. 큐브가 연우에게 아프지도 다치지도 않게 해주는 보호막은 확실했던 걸까. 그런 보호막이 생겨 고마워했어야 했던 걸까. 젤리곰과의 동거가 과연, 옳은 것이었을까.

어떻게 보면 큐브는 연우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장치일 수 있다. 무엇으로부터든 연우를 보호할 완벽한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외롭고 슬프게 혼자 두지도 않을 거지만, 외부의 어떤 위협으로부터도 모두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장치였던 거니까. 하지만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보호막이, 이런 보호막 안의 삶이, 진짜 옳은가?
다르게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큐브의 보호 안에서 사는 삶, 한편으로는 재미가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삶이란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심사숙고하면서 무언가를 결정하고 그 결과가 또 다시 문제를 만들기도 하는 법이니까. 그 결정에 후회도 하고 또 갈등도 하면서 새로운 그 다음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도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어쩌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안전하기만 해서는 삶다운 삶을 살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우는 큐브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미지근한 온실 밖, 심장이 말이 안 되게 뛰고, 땀이 삐질삐질 솟고, 더운 숨결이 귓가에 감기던 그 순간, 불안하고도 외롭지만, 서로 닿으려고 몸부림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216쪽)

위험 요소로부터 무조건 안전하다는 것이 완벽한 삶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어쩌면 조금은 위험하고 두려운 상황이 펼쳐질 것에 대한 두근거림이, 때론 그 다음을 살아내는 떨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떨림을 서로 보듬어줄 수 있는 손길이 있을 것이고, 그런 손길을 통해 하나씩 스스로 해결해나갈 수 있는 힘도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런 힘이 쌓이고 쌓이면 점점 두려움은 안정되어 갈 것이고, 그런 안정을 통해 삶의 두께는 더 두툼해질 것이다. 그렇게 두툼한 삶으로 나아가겠다는 다짐을 연우는 기꺼이 해 나갔던 것이다.

이 소설을 다 읽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과연 이 큐브는 지금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의 공간일까. 어쩌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는 불안함에 만들어 낸 가상의 공간일 수도 있다. 혹은 사회로 나가기 전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보호막일 수 있다. 때론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구속하는 꽉 막힌 공간을 수도 있고, 그런 공간에서 하루가 또 하루가 되는 반복적인 시간 속에 살아가야하는 우리 아이들이 처한 현실일 수도 있다. 누군가는 다 잘 되라고, 안전하게 만들어 주는 거라며 큐브를 만들고 손을 보며 그 밖으로 나가기 못하도록 가로막을 수도 있다. 큐브 밖 세상은 너무 험난하고 무섭기만 한 곳이니까. 나가지 않고도 완벽한 삶의 환경이 갖춰질 수 있다면 굳이 나갈 이유가 없다고, 그러니 큐브 안의 삶을 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세상일수록 더욱 나가야 하는 법. 그런 세상을 직접 부딪히며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본인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몫이니까.

목소리가 젤리 곰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에는 젤리 곰을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실제로 뜯어보려고도 했지만, 젤리 곰이 울고불고 난리 치는 바람에 디지털 현미경을 사서 확대해 보았다.(69쪽)

웃겼다. 울고불고 난리 치는 젤리 곰의 모습, 그런 젤리 곰을 더 공포로 몰아가지 않으면서 속속들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으로 디지털 현미경을 선택하다니! 현미경 아래 젤리 곰을 놓고 관찰하는 연우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와중에 이런 유머라니.

분명 불안하고 불투명한 삶 안에 놓여 있는 것이 지금 우리 아이들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런 현실을 살아내느라 힘겨워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서 불안함과 공포가 공황과 같은 증상으로 나타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은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누군가가 만들어 준 보호막 밖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 소설이 용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출판사로부터 가제본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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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인생만사 답사기 - 유홍준 잡문집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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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인생만사답사기 #유홍준 #유홍준잡문집 #창비 #서평단 #서평 #책추천

'잡문'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봤다. 섞일 잡, 글월 문의 잡문. "일정한 체계나 문장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되는대로 쓴 글. 대체로 지은이의 감정이나 사상이 꾸밈없이 드러난다." 말 그대로 유홍준 교수님의 감정과 사상이 꾸밈없이 드러나 있구나, 싶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책들을 몇 권(전권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읽으며 느낀 교수님의 생각과는 또 다른 교수님의 시선과 생각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어쩌면 조금 더 내밀하고도 친근한, 우리가 흔히 요즘 읽는 에세이에서도 느낄 수 있는, 교수님의 개인적인 일화나 감정까지 느낄 수 있어서 이 책을 읽는 시간들이 무척 소중했다.

나는 순간 나라도 참석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일어났다. 문화재청장이 아니라 미술평론가 개인 자격으로라도 백남준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하여 4일간의 휴가를 내고 장례식에 맞추어 뉴욕으로 떠났다.(167쪽)

유홍준 교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 부분을 읽으며 교수님께 감동했고, 한편으로는 예술가에 대한 나라의 처우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가에 실망하기도 했다. 어떤 가치를 소중히 해야할 것인가, 또한 그것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개인적인 생각과 행동은 아무런 유익함을 남길 수 없을 때가 많다. 하지만 사회 예술적인 안목으로 더 넓은 사고를 통한 행동은 분명 더 깊고도 소중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교수님의 행보가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며 글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결국, 미술평론가로서 우리의 예술이 어떻게 앞으로도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꾸준히 고민하고 계시는구나, 싶었다. 단순히 직업으로서의 책임이라고 하기에는 나가감의 보폭이 달랐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에 훗날 명승으로 지정될 정원, 원림, 별서, 정사가 지어졌는가. 이 또한 '별장'이라는 것에 대한 국민정서의 거부감과 세제상 중과세를 부여하는 규제 때문이다. 국토를 아름답게 가꾸며 삶을 건강하게 하고 후손에게 문화재를 물려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다.(104쪽)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이었다. 가끔 교외로 나가보면 드문드문 산 중턱이나 언덕 위에 나무숲을 배경으로 지어진 별장들을 보며 부러움과 안타까움(좋겠다, 하지만 저렇게 자연을 훼손하면서 개인의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건 별로다)을 동시에 느끼기만 했었는데, 이렇게 접근해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그래도 될까, 지금까지도 안타깝다고 생각했던 지점의 무분별한 개발과 훼손의 책임은 누가 지어야 할까, 이걸 계속 개발하는 것이 과연 장기적으로 옳은 선택이 맞을까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하게 됐다.

그런데 나중에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이 '혼인서약'을 펼쳐보니 주례 리영희 선생은 혼인서약 문장 중 '나라'라는 단어를 두 줄로 긋고 '사회'라고 교정보아놓았다.(...) "그게 그거일 수 있으나, '나라'라는 말에는 파쇼 냄새가 나지만 '사회'라는 말에는 인간의 윤리가 살아 있는 차이 아니겠어." 아! 나는 이런 분의 주례로 결혼했다.(238쪽)

아! 나도 감탄했다. 파쇼는 안 되지, 당연히 인간의 윤리가 살아있는 '사회'여야 하는 게 맞지, 싶었다. 인간의 윤리. 어떤 것이 이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인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무엇을 향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별 거 아닌 것 같은 혼인서약의 단어로서도 충분히 밝힐 수 있는 힘, 그리고 그런 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이런 주변의 인연들이 교수님을 내내 이끌어왔던 원동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에는 교수님과의 인연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 인연들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관계가 쌓이는 면면들이 무척 값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이며 어떤 사상과 목소리가 우리 삶에 존재해야 하는 것인가. 또한 그런 존재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남아야 하고 또 그 남겨진 유산을 우리는 어떻게 아껴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인가도 숙제처럼 남았다.

<모내기> 작품이 법정에 나오는 날, 나는 일찍이 가서 신 화백의 가족, 민미협 회원들과 방청석 앞자리에 자리 잡고 기다렸다. 얼마 뒤 법원 직원이 작품을 들고 들어와 법정 맨바닥에 놓는데 놀랍게도 천막 개듯이 여러 겹으로 접혀 있는 것이었다./ 순간, 민미협 화가들이 일어나 "작품을 이런 식으로 보관하면 어떡하냐"라고 항의했다. 그러자 담당자는 압수물 보관소에 있는 그대로 가져왔을 뿐이라고 했다.(177쪽)

작품을 보고 너무 화가 났다. 접힌 자국대로 훼손된 흔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아, 얼마나 예술에 대한 무지를 보여주는 것인가. 작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건으로만 바라보는 태도가 너무도 안타까워지는 부분이었다. 어쩌면 이런 태도의 시각을 조금이나마 바꿔주는 역할을 교수님이 하신 것이 아닐까도 생각했다. 우리가 만약 교수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아니었다면 이만큼이나마 우리의 문화유산에 대해 관심이라도 가질 수 있었겠나. 단순히 작품뿐만이 아니라 그런 작품이나 예술가를 대하는 태도와 그 가치를 어떻게 두어야 하는지에 대한 모범을 본인의 삶을 통해 있는 그대로 가르쳐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분은 분명, 행동하는 지성인이 맞다. 그런 분의 이야기를 책을 통해서나 만나뵐 수 있어 영광이었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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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일 수 있다면 - 제1회 현대문학*미래엔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임고을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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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누구를 녹이고 싶어질까. 세상이 온통 얼어버렸고, 사람들이 모두 얼음 인간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런 얼음 인간을 녹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럼, 나라면 누구를 선택할까. 답은 쉽지 않다.
서진과 서리가 녹이는 문제에 쉽게 합의하지 못했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서진의 걱정에도 고개가 끄덕여지고 서리의 주장도 맞다는 생각이 드니까. 함부로 녹였다가 더 큰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녹이지 않고 조용히 사는 방법이 나을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데 살리지 않는 것은 또한 죄를 짓는 거란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최대한 사람들을 많이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이 맞다. 물론 그렇게 살리고 난 후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더 해결하기 힘들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신중할 수밖에.

사람들이 스스로를 죽이거나 망가뜨리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구가 망가진 것은 어떻게 설명되는데? 땅과 바다는 오염되고, 기온은 계속 올랐다. 끊임없이 불이 나고, 지진이 나고, 도시는 물에 잠겼다. 사람들은 잘못된 줄 알아도 행동을 고치지 않았다.(49쪽)
사실, 다들 인류가 망할 줄 알고 있었다. 세계 곳곳에서 전조 현상이 끊이지 않았으니까. 철에 안 맞는 꽃이 피었고, 벌은 멸종됐고, 수해, 화재, 폭염, 지진, 가뭄이 전 지구적으로 해가 갈수록 빈도와 강도를 더해 갔다. 그러나 재난이 폭죽처럼 터져도 다들 묵묵히 손을 놓고 있었다. 정말 큰일이네, 심각하네 같은 소리만 거듭하며. 외계 생명체가 굳이 손쓰지 않았어도, 결국에는 이런 결말을 맞지 않았을까.(173-4쪽)

애초에 왜 이 세상이 모두 얼어버렸는가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이 함부로 우리 지구를 쓰니까, 위기의식을 가진 외계 생명체가 얼린 것이다. 자원을 보존하기 위해, 더 이상 망가지는 것을 막기 위해. 동감이다. 외계 생명체가 손을 쓰지 않았어도 우리 지구는 이런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어느 것도 하나도 온전히 제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지경의 지구의 결말 말이다. 이걸 늘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말로만 위기라고 떠들 뿐이다. 날씨가 왜 이러냐고 한탄만 하고 짜증만 낼 줄 알지, 그렇게 만든 원인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걸 인간들은 모른다. 이걸 모르니 우리 지구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은 채 여전히 아직도 점점 나빠지고만 있다. 이 문제를 제대로 들여다봐야한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괴짜 과학자 할머니께서 경고했었고, 이에 대한 대비책과 방법도 조금은 마련해 두셨고, 지금도 여전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시다. 남들이 다 손가락질 해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갔던 분이니, 서진과 서리를 위해서라도 방법을 찾아 다시 돌아오실 것이다. 그때까지 이 아이들이 사람들을 조금씩 구하면서 잘 버텨주면 된다. 다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버티고 또 지켜내는 방법일지는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다.
그저 얼어있는 사람들을 많이 녹이는 것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일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 세상을 그나마라도 지키기 위해 얼린 것인데, 이를 또 애써 녹이려하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지구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수 있기 위한 쉼의 시간을 주는 것은 아닐지, 결국 모든 것들을 잠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으로 두고 지구를 지키려는 마음은 아닐지. 그렇다면 이 시간을 조금은 더 유지해도 괜찮지 않을까, 어쩌면 위험한 생각도 든다.

하지만 결국 아이들은 녹이는 것을 선택하고, 또 그 안에서 다시 서로의 관계와 상황을 정리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스스로 깨닫는다.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해보려 노력도 하고. 그러면서 답을 찾아 나간다. 이것이 이 소설의 가장 긍정적인 부분인 것 같다. 아이들이 스스로 답을 찾기 위해 나아간다는 것. 집 안에 숨어 누군가가 해결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나가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이 계속 얼어있기만 하진 않을 것 같은 작은 희망을 품게 되는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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