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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의한 V양 사건 ㅣ 초단편 그림소설 1
버지니아 울프 지음, 고정순 그림, 홍한별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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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펼치자 연달아 나오는 고정순 작가의 그림이 인상적이어서 그 페이지들에 시선을 멈추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마치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는 듯도 한, 혹은 검은 그림자를 한껏 뒤집어 쓰고 있는 듯도 한 한 여인으로부터 어둡고 혹은 밝고 또는 고요하고 내지는 복잡한 듯한, 그늘진 느낌을 주었다. 괜히 마음이 심난해진다고나 할까. 이런 느낌을 뭐라고 정의내려야할까, 알 수 없는 오묘한 기분으로 드디어 글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군중 속에서 혼자라고 느끼는 것만큼 쓸쓸한 일은 없다고들 말한다. 이런 주제가 소설에도 종종 나오는데 역력한 비애감을 담곤 한다.(...) 이들과 비슷한 자매를 누구나 바로 여남은 명은 술술 읊을 수 있을 것이다.(17쪽)
아, 군중 속의 고독. 아무도 없어 외로운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어 더 외롭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이 이야기는 시작부터 우울감을 가득 안고 있었다. 처음은 가볍게 시작할 수도 있으려만, 강한 무게감을 끌어안고 시작하는 느낌이었고, 나도 이런 이들을 몇 명 이야기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여전히, 아직도. 그리고 어쩌면, 이들에 나도 포함일 수도.
지금 의자를 쳐서 바닥에 쓰러뜨려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면 적어도 아래층 사람은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겠지.(22쪽)
누군가의 시선과 의식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한 선에서의 수준이겠지. 마치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이 있다면, 이 V양을 소개시켜주고 싶다. 그 방법을 매우 잘 알고 있는 V양일 테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지금보다 더 가벼워지고 투명해지고, 얼마나 더 잘 사라질 수 있는지를 알려줄 것이다. 물론, 매우 슬프고도 우울하게.
사라진 것이 그 사람임을 알았다고 과장해서 말하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무언가'라고 말하는 데는 조금도 거짓이 없다.(32쪽)
그러니까. 어느 누구에게도 순간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존재'도 아니었을 것이며, 그저 '무언가' 정도의 아주 희미하고도 사소함만을, 그것도 겨우 갖고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적 단 한 순간도 단박에 '누구' 하고 떠올릴 수 있는 부류에는 평생 한번도 들지 못했을 것이 뻔하고, 그저 언제라도 그랬던 것처럼 그저 그렇게, 집 안에, 숨죽인 채, 조용히, 아주 작은 움직임도 만들지 못한 채, 그렇게 평생을 지냈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고 난 후, 과연 가장 최후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어떤 기분과 어떤 생각으로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니 얼마나 이상하고 재미있고 미친 생각이었던가! 그림자를 쫓아가서 어디에 사는지 보고, 만약 살아있다면 그 그림자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라도 한 양 말을 걸다니!(39쪽)
가만히 생각해보게 된다. V양과 같은 처지의 내가, 마치 가구처럼, 거실 한 가운데의 의자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는 어느 날, 누군가로부터의 방문을 받고 그자가 건네는 말을 듣는다면 과연, 현실감이 있기는 할까. 기쁠까, 행복할까, 혹은 그런 나도 덩달아 이상할까. 이런 상상마저도 미친 짓이라고 혼자 속으로만 웅얼거리다 꼼짝도 못한 채 집 안에서 더 안으로, 구석으로 벽으로 스며 들어가버리고 마는 것은 아닐까.
내가 그 이름을 부른 바로 그 순간이었다.(42쪽)
어쩌면 유일할 수도 있었던, 누군가에게 이름이 불려진 바로 그 순간이었을 텐데, 모든 게 사라지는 순간에라도 이름이 불렸다면, 마음에 조금은 위로가 될 수는 있을까. 이제 그만, 그 집에서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덧-
<부록> 이름이 되어_고정순
나는 '여자애들'의 흔적을 접착제의 역한 내음으로 지웠다. 사측 사람의 말속에 어떤 비하의 의도가 담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 그가 그들을 뭉뚱그려 부른 '여자애들'이라는 이름에는 그들을 향한 관심이 삭제되어 있을 뿐이다.(54쪽)
누군가에게는 관심조차 둘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이름도 없이 뭉뚱그려도 충분한 이들의 존재였을 수 있다. 하지만, '송민아', '박수영', 그리고 또 다른 이름, 그리고 그 이름들의 얼굴들은 관심 밖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상상했다.(...) 나와 같은 공간에서 불리고 불렀을 이름들을.(55-6쪽)
그리고 본 적 없어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고, 그들의 얼굴을 상상하며, 여기에 머물렀고 또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누군가를, 이상하게도 생각한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름을 불러주는 그 순간, 그들에게도 이상하게 누군가의 방문을 받거나 혹은 건네는 질문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