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맹순과 오수아 작은 책마을 58
은영 지음, 최민지 그림 / 웅진주니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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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부터가 무척 유쾌하고 재밌는 책이다. 시소의 양끝에 앉아 균형을 맞춰 타고 있는 두 친구, 맹순과 수아. 관심이 가고 재미있는 것이라면 뭐든 공유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두 친구이지만, 자기 것에 대한 확고한 소신은 분명하다. 비밀도 없고 척하지도 않는다. 솔직하게 말하고 있는 그대로 믿는다. 좋아하는 마음과 감정엔 누구보다 솔직하다. 그 솔직함에는 자기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마음까지 포함이다. 그래서 이 두 친구의 대화가 흥미롭다.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럼 내가 좋아해도 돼? 강한별."
"그건 안 돼!"
"후유, 나는 죽을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의사 선생님이 그랬어.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뼈가 부러진 거 같대. 수술을 하다가 죽을지도 몰라."
"정말?"
"그러니까 내가 강한별 좋아해도 되지?"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양보하면 되는 거지? 그럼 되는 거지?"
맹순이 코끝이 빨개졌어.(21-23쪽)

헌데 이렇게 쉽게 맹순이가 한별이 좋아하기를 수아에게 허락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별이에 대한 마음이 부족해서도, 자신 때문에 수아가 다쳤다는 미안함 때문도 아니다. 바로, 친구니까. 수아는 맹순이에게 제일 소중한 친구니까. 그건 수아에게도 마찬가지다. 가장 소중한 친구가 아픈 건, 우는 건 싫으니까.

수아는 맹순이의 친구야.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 가끔 짜증나게 할 때도 있지만 그래도 수아는......(23쪽)
"네가 울려고 했잖아! 그것도 생일에 말이야. 생일날 우는 건 너무하잖아? 그러니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갈 수밖에. 아무튼, 너 때문에 애들이 다 알아 버렸어. 내가 할머니랑 단둘이 사는 거 말이야!"(62쪽)

물론, 둘은 이내 다시 한별이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한다. 이 사실을 한별이는 알까. 한별이 모르는 데서 둘이 이러쿵저러쿵 시소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웃음이 나온다.

시소는 둘 중 누구 하나라도 균형이 맞지 않으면 제대로 놀 수가 없다. 함께 있어도 안 되고, 누군가 더 가까이 와도 안 된다. 딱 양쪽 끝에 같은 무게와 힘으로 중심을 잡고 앉아 발을 굴러야만 위아래로 리듬감 있게 움직일 수 있다. 그게 시소다. 이 두 친구가 시소의 양쪽에 앉아 있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둘은 서로에게 맞춰주고 있는 중. 친구란 이렇게 서로에게 맞춰가며, 주거니 받거니 해야하는 관계라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균형만 맞춰서는 시소에서 재밌게 놀 수 없다. 누군가는 위로 올라올 때 아래로 내려갈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다시 위로 올라오게 하기 위해 자신은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시소를 탄 둘이 모두 위에 혹은 아래에 있을 수는 없다. 그럼 시소 놀이를 할 수 없다. 그러니 차례에 맞춰 서로가 힘을 적절히 주었다 빼는 연습이 필요하다. 자칫 내 욕심만 채워서는 둘 다 다칠 수 있다. 그러니 시소에서만큼은 둘의 마음이 잘 맞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마음이 참 잘 맞는다.

둘은 푸른빛이 도는 어스름 속에서 시소를 탔어.
어느새 거칠었던 시소 소리는 점점 잦아들고 맹순이가 수아의 이야기 소리가 놀이터 곳곳에 울려 퍼졌지.(...)
시소는 두 아이를 태우고 콩닥콩닥 바닥을 간지럽히고 있었지.(71쪽)

맹순이와 수아의 쿵쿵쿵쿵 시소타기가 앞으로도 내내 이어지기를 바란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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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기 일보 직전 문학동네청소년 ex 소설 1
달리 외 지음, 송수연 엮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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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을 읽으면서 뭔가 가슴 한쪽에서부터 스멀스멀 간지러움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내 몸은 가만히 있는데 뭔가가 몸 안에서 꿈틀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짜릿함일 수도 있는 전율이 몸을 타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들썩여지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야기. 굉장한 영웅감에 휩싸여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헌데 뭔가 세상을 향해 주먹 한방을 먹였고, 그렇게 한방 먹은 세상을 구경하는 재미라고나 할까. 심각하지만 유쾌하고 씁쓸하지만 속시원함이 있는 이야기였다.
또 이 아이들은 도무지 진지해지지 않아서 매력적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려고 들면 한도 끝도 없는데, 이게 어른들과 참 다른 점이었다. 호기심이 생기면 알아보고 궁금하면 그냥 직접 물어본다. 그러면 또 대답을 해준다. 그렇게 서로의 오해를 쉽게 풀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이라면 어른이나 사회의 기준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대체 당신을 만든 목적이 뭔데요?"/"순혈인류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당신이 순혈인류 노래를 해서 나도 검색을 해 봤어요. 그랬더니 연관 검색어로 나치가 가장 먼저 뜨던데요? 어쩐지 무조건 잡아들이고 보려는 게 옛날 나치랑 비슷하더라니."(53쪽_'지퍼 내려갔어' 중)
무슨 일인지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어봐도 말 안 해 주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거짓말하면?/왜 결정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있을까?(106쪽_'알 카이 로한' 중)
"넌 미끼가 필요한 게 아니었어. 저 외계인을 잡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어. 그냥 여자애들이 죽는 걸 구경하고 싶었던 거야."(...)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151쪽_'자코메티' 중)
"우리 같이 사진 찍을래? 나한테 카메라 좋은 거 있어."/그 말에 민하 부모님과 수우 할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움찔했지만 수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수우야, 만나자마자 사진을 찍기는 아무래도 좀 어색하지. 사진은 다음에 찍으렴."(206쪽_'기억의 기적' 중)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무척 많다. 누가 언제 어떤 기준으로 그어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선은 누구나 아는 선이다. 보이지 않지만 선명하게 그어져서 어느 누구도 쉽게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고 있다. 무엇으로? 바로 사람들의 시선으로. 사람들은 사회적 잣대로 고정된 시선을 갖고 있고, 그 시선이 편협한 고정관념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고정관념 안에서 제멋대로 사람들을 휘두르고 구분짓는다.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남들이 시키는대로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강요한다. 그렇게 강요받은 아이들 중 말 잘 듣는 착실한 아이는 또 그런 시선을 배우며 비슷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러니 그런 시선에 당당히 한방 먹이고 아무렇지 않게 또 자기대로의 길을 가는 이 아이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이토록 뿌듯할 수가 없다.

영화와 세진이는 번갈아 가며 날 북돋아 주었다. 카페를 나와서도 날 가운데에 두고 팔짱을 껴 주었다./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이렇게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한 적이 있나 싶었다./(...) 미안해, 미리 말 못 해서. 할머니가 그러는데 사람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대.(113쪽_'알 카이 로한' 중)
민정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저 BBC 드라마에 빠진 미치광이랑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머리가 돌아야 저런 생각이 가능한 거지?(...) 노인정 할머니들이 목사님 딸이 걱정되니 찾아봐 달라고 했을 때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155쪽_'자코메티' 중)
"그래, 그럼 우리 1년에 딱 한 번만 찍자. 둘이서만."/"좋아!"/수우가 활짝 웃으며 민하의 어깨에 한쪽 팔을 둘렀다.(207쪽_'기억의 기적' 중)

결국 모든 것에서 아이들이 함께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친구가 최고구나 싶었다.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것 또한 친구이며, 예기치 못한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 또한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이 친구들이 있어 이것 또한 얼마나 다행인지. 투덜거리고 신경질은 좀 낼 수 있어도 손을 내밀어 잡아끌고 어깨에 팔을 두르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슬며시 웃는다. 이게 이 아이들의 방식. 마음에 든다.

민정은 '그것' 곁으로 걸어가는 찬미를 말리지 않았다. 더 이상 '그것'에게는 폭력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민정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우두커니 서서 찬미와 '그것'이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152쪽_'자코메티' 중)

그리고 세상의 시선과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가만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눈은 정확하다. 맞고 틀리고의 정확함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정확함이다. 그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런가에 대한 판단 또한 아이들의 몫이므로, 세상이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 아이들의 저 시선을 있는 그대로 지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정말, 이 세상에서 다 녹아내리기 전에!

"도챈스부터! 얘 지금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이야."(50쪽_'지퍼 내려갔어' 중)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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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는 혼자 진화하지 않는다 - 인류의 삶을 뒤바꾼 공진화의 힘
피터 J. 리처슨.로버트 보이드 지음, 김준홍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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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인 줄 알았다. 읽으면서 계속 인문사회책이라는 생각으로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이게 융합인가 싶었다. 예전이나 이과와 문과를 구분하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 학문 분야를 선택했지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옛날사람의 기질이 아직도 남아 있어 이건 과학, 이건 사회의 구분을 해놓고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것 같다. 시대착오적인 구분이었다. 그리고 제목에 현혹되면 안 되는 거였다. 유전자라니, 이건 너무 과학인데 싶어 내가 읽어도 되나 싶었다. 헌데 부제가 너무 궁금했다. '공진화의 힘'이란 말.

공진화라는 용어는 생물학자들이 두 개의 종이 서로 환경의 일부분이 되면서 한 종에서 진화적인 변화가 발생하게 되면 다른 종에도 진화적으로 변화가 발생하는 체계를 가리키기 위해서 만든 용어이다.(...) 인간 집단이 보유하고 있는 문화적 그리고 유전적 정보의 진화하는 풀에서 이 두 가지는 서로 비슷한 소용돌이의 왈츠를 추는 파트너이다.(316쪽)

지금껏 진화라는 말은 많이 들어왔다. 공진화라는 말도 주로 써왔겠지만 비전공자의 입장에서는 낯설었다. 과연 공진화라는 것을 우리 사회에 적용시킨다면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싶었다. 흔히 '진화'라고 하면 생물학적으로 유전자의 힘에 의해 당연히 그렇게 되어가는 성질이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든다. 하지만 '유전자-문화 공진화'라고 했다. 유전자는 절대 혼자의 힘으로 지금의 우리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기저에는 '문화'가 '존재'했고 '적응' 혹은 '비적응'을 통해 축적되었으며, 결국 '공진화의 힘'으로 인류는 생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여기서 주목하게 되는 것이 '협력'이라는 것. 이기적이고 작은 친족 집단에서나 보이던 특징이 더 거대한 집단이나 국가적 차원으로 확대되는 것까지. 결국 '통섭'의 개념을 생각해보는 것으로 연결되었다.

이 개념은 다윈이 좋아했던 것이기도 한데, 세상에서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현상도 실제로는 관련되어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핵물리학은 사회과학과 과학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태양의 핵융합 반응은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에너지의 원천이다. 또한 지구 내부에서 핵이 서서히 붕괴하면서 해저가 팽창하며, 이 팽창은 다시 지상의 생태에 영향을 준다. 그리고 핵무기는 국제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원칙적으로 인간 종을 공부하는 데 관련이 없는 학문은 없는 셈이다.(383-4쪽)

결국 어느 것도 한 가지 분야로만 해석하고 설명할 수는 없다는 거다. 인간이란 종이 그렇게 복잡하고 다채로우면서도 예상 밖의 특징들을 골고루 갖고 있어 다른 종들과 다른 진화적 특징을 살피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이때 생각해야 하는 주요한 개념이 바로 '문화'.
책의 논리에 수긍이 간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환경과 문화적 특징, 세습되어 내려오는 전통이나 혹은 가깝게는 부모의 영향, 그리고 그 외에 종교나 교육, 기타 다양한 경험을 통해 축적되어온 습성이 지금 나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나의 유전자는 생물학적으로 부모로부터 그리고 그 부모의 부모의 부모로부터 왔지만, 이 유전자라는 것도 결국은 그 시대를 살았던 그 부모들이 문화적 적응 혹은 비적응의 과정을 겪으며 만들어 쌓아왔을 것이다. 결국 유전자는 꾸준히 문화와 상호 영향관계 속에서 진화해 현재까지 왔을 것이고 지금 현재 나도 그런 과정을 겪으며 다음 세대에 또 그 다음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중이다. 그렇게 공진화를 통해 이 사회와 인류는 형성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유지를 위한 방법들을 사람들은 또 만들어 나가곤 한다.
학창 시절 이런 질문에 답을 찾던 기억이 난다. '유전이냐, 환경이냐' 이제 이런 질문은 의미없는 이분법적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둘 중 한 가지만으로 인간을 설명하기에는 자꾸 다른 하나가 간섭을 하고, 그래서 생각이 이랬다 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해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하지 못하게 된다. 어느 한쪽에 손을 들어줄 수 없던 이 질문의 답을, 이제서야 이 책에서 찾은 듯하다.

이 책은 논문 모음이었다. 대학원 논문 쓸 때 알게 된 너무나 익숙한 느낌. 내용을 따라가기 쉽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못 읽을 정도는 아니었다. 전공 분야였다면 조금 더 잘 읽었겠지만 또 전공자들만을 위한 내용은 아니었다. 물론 여러모로 신경을 써서 읽어야 했던 책인 것만은 확실하다. 공부하는 느낌으로. 그만큼 읽는 데 시간도 오래 걸렸다. 깨알같은 글씨가 더 집중해서 읽도록 만들었다. 이번 여름 휴가는 이 책 한 권이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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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파란, 나폴리 작가의 작업 여행 1
정대건 지음 / 안온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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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참 낭만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이상, 나폴리는 파란색의 이미지와 함께 기억되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언젠가 이탈리아 여행을 가게 된다면, 주저하지 않고 나폴리를 가겠다고 결정할 것 같다. 그곳에서 마라도나를 만나고 에스프레소를 마시고 맛있고 싼 피자를 먹어야지. 그리고 나와 어울리지 않게 바다에 퐁당 빠져 수영을 해보고 싶어졌다. 수영 후엔 햄은 빼고, 도톰한 파니니를 먹어야지. 마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처럼, 그곳을 오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새로운 곳 새로운 경험에 대한 두려움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어딘가를 가더라도 한 곳에 오래 머무는 여행을 좋아한다. 내가 있는 곳이 익숙해질 때까지 오래 나를 그곳에 놓아두는 것이, 관광객 모드가 아닌 생활자의 모드로 그곳을 내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더 안심이 되는 사람이다. 작가와 비슷하게 뼛속까지 집순이여서 어딜 쉽게 이동하지 않고 한곳에 틀어박혀 한 자세로 앉아있는 것을 참 잘한다. 그래서 작가의 이 작업여행에 나도 덩달아 긴장했다. 마치 내가 3개월간 그곳에 혼자 가야할 것만 같은 걱정이 앞섰다.
생각보다 새로운 공간에 적응하는 데 오래 걸리지는 않는구나 싶었다. 생소하고 두려웠던 공간이 익숙하고 그리운 공간이 되는 데 90일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누군가를 알아가고 또 무언가를 해내고, 그 공간에 충분히 적셔지는 데는 사실, 90일까지도 필요 없다. 단 며칠만으로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있을 곳인지 파니니를 알아보는 법이니까. 작가에게 나폴리는 있을 만한 공간, 자신을 풀어줄 수 있는 공간임을 직감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온갖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것들까지도 다 받아들일 수 마음이 가능했을 것이다.

"90일간 지내는 시간을 선물처럼 생각하고 있어. 한국에서는 내가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내게 주어지는 이런 시간은 한 번뿐이라는 마음으로 내게도 더 관대해졌어. 내가 돌아가서도 선물처럼,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이전보다 행복하지 않을까."(53쪽)

작가에게 나폴리에서의 시간은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시간이었다. 자신을 닦아세우지 않아도 된다는 관대함을 배운 시간이었고, 자유롭게 무엇을 선택하든 그 선택의 끝에는 또 다른 행복의 시작이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교훈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글을 일고 있는 나도, 지인이 충고해주었던대로 경험주의자가 되어 새로운 공간에서 직접 몸으로 체득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접적으로 말고 직접적으로, 생각만하지 말고 행동으로, 실패를 걱정하지 말고 해보는 즐거움을 느껴보는 것으로. 그럼 그 끝에는 작가의 말처럼 분명, 보상이 있을 거니까.

가 보자, 포기하지 말고.//
이 여정 끝에 보상이 있으리라는 낙관이 생겼다. 아니, 설령 날씨가 끝까지 좋지 않더라도 이대로 돌아가는 것보다는 뭔가를 얻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 순간 내가 품은 낙관이 나도 놀랐다. 사람이 태도의 관성을 바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최악의 하루가 예상치 못한 놀라운 행복으로 마무리되었던 어제의 경험으로 몸에 새겨진 좋은 감각 덕분이었다. 나는 앞도 보이지 않는 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153쪽)

기존의 나를 다른 나로 바꾸는 것이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우면서도 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을 깨는 일, 익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바꾸는 일은 자신을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는 부분까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쉽지 않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나를 바꾸는 건 어쩌면 마음먹기 나름이니 어렵지 않을 수 있다.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춰야하나 싶기도 하겠지만, 그럴 땐 우선은 바꿔보는 걸로, 해보는 걸로. 그럼 그 끝에 무언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이 있을 것이다.
작가의 여행기를 읽고 나의 생활의 태도를 점검하게 됐다. 다른 이의 생활기는 곧 나의 생활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특히 아름다운 도시 나폴리와 이탈리아의 지역들에 대한 여행기는 또한 상상하게 만들었다. 내가 그곳을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게 될 것이며 그 여행에서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를. 경험해보고 싶어졌다.

나폴리에는 '카페 소스페소' 문화가 있다. 소스페소(sospeso)란 '매달린', '걸려 있는', '미루어진'이라는 뜻을 가진 이탈리아어다. 즉 카페 소스페소란 '맡겨둔 커피'라는 뜻으로, 커피를 마시고 싶지만 가난해서 마시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나누는 행위다.(58쪽)

이탈리아 남부의 문화 소스페소. 이탈리아 중에서도 나폴리를 더 경험해보고 싶은 이유 중 하나이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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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의 아이들 꿈꾸는돌 39
정수윤 지음 / 돌베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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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초반부터 긴장감이 너무 높았다. 소설에는 분명 발단, 전개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 소설은 시작부터 위기에서 출발하는 소설 같았다. 세 아이들의 이야기가 번갈아 나오면서 이 아이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두려움을 만들었다. 아직 열여섯의 어린 나이의 아이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조차도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스스로 헤쳐나가야 한다는 것이 무섭고 공포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세계의 이야기인 것만은 확실하다. 물론 이야기는 넘어 넘어 들었고, 다른 경로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던 이야기이긴 했다. 하지만 어떤 세계도 내가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법, 그리고 판단할 수 없는 법이다. 그런 면에서 북한의 체제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특히 그 생각과 갈망을 우리가 쉽게 짐작할 수는 없다. 혹은 자칫 다른 사회에 속한 사람들에 대해 선입견을 갖고 대하거나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만큼 경계해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배경은 분명 북한이기는 하지만, 이 소설 속 인물들은 순수하게 자유롭고 싶은 열망을 가진 꿈 많은 아이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아이들만이 가질 수 있고 꿈꿀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삶을 선택하여 살 것인가는, 순전히 자신이 정하기 사람이고 결심하기만 나름이다. 그런 결심에 어느 누구의 강요도 협박도 통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자신이 가고자 하는 길이 있으면 최선을 다해 가기만 할 뿐, 그 다음은 그 다음 문제인 것이다.
이 소설의 여름, 설, 광민이는 그런 아이들이었다. 어떤 이념이나 체제, 사회적 환경이나 가치관이 이들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저 이 아이들은 자신이 살고싶은 방향을 향해 본능적으로 움직일 뿐이고, 그런 움직임을 사회에서 받아들여주지 않는다고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으로 죽음의 위협 속에서 험한 공간을 도망치며 나아갔어야 했지만, 결국 이 아이들이 마주한 파도는 그런 모든 시간과 과정을 위로해주듯 따뜻하게 기다려주었고 감싸주었다. 그러니 그런 바다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겠다고 결심하는 아이들의 외침이, 뭉클하게 다가올 수밖에.

"그래, 좋다! 우리 여기, 이 바다를 우리의 나라로 삼자. 여기 이 바다를 우리가 살 곳으로 정하자."
"좋다, 좋아. 바다야! 우릴 받아 줘!"(...)
"우리는 우리가 결정하지 않은 세상 따위 원하지 않아. 여기가 바로, 우리의 나라야!"(212쪽)

나라는 어떤 것일까. 체제와 사상은 또 무엇일까. 우리는 살면서, 이런 질문을 늘 머릿속에 두고 살지는 않는다. 어쩌다 한번, 간혹가다, 가끔씩 질문의 답을 떠올려보는 것이 전부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늘 자신의 삶과 죽음의 경계 속에서 이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아이들이었다. 어느 나라 어디에서 내가 인정받고, 또 어떻게 사는 삶을 어디로 선택할 것인가가 중요했던 삶. 그런 삶 속에 놓인 아이들에게는 매 순간이 치열한 투쟁이고 싸움일 수밖에 없었다. 늘 도망치는 삶, 힘겹게 자신의 한 몸을 지탱하기 위해 치열하게 세상의 시선과 맞서야했던 삶이었다. 그래도 그런 외롭고 혹독했던 삶 속에서도 서로 의지하고 마주보고 웃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 늘 무사하기를 바라는 가족과 이웃이 있었다는 것은 이 아이들에게 있어 다행한 일이었다.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또 다른 불안감도 몰려온다. 이 아이들이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잘 정착해서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질 수 있기를 바라지만, 한편으로는 이 아이들이 또 어떤 역경에 처하게 될 지, 그래서 또 어디론가 도망쳐야만 하는 삶이 될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의 긴장이 해소되는 듯하다 또 다른 긴장이 만들어졌다. 이 아이들의 그 다음의 이야기가 다시 궁금해졌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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