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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아내리기 일보 직전 ㅣ 문학동네청소년 ex 소설 1
달리 외 지음, 송수연 엮음 / 문학동네 / 2024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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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들을 읽으면서 뭔가 가슴 한쪽에서부터 스멀스멀 간지러움이 몰려오는 느낌이었다. 내 몸은 가만히 있는데 뭔가가 몸 안에서 꿈틀대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짜릿함일 수도 있는 전율이 몸을 타고 지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들썩여지고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이야기. 굉장한 영웅감에 휩싸여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다. 헌데 뭔가 세상을 향해 주먹 한방을 먹였고, 그렇게 한방 먹은 세상을 구경하는 재미라고나 할까. 심각하지만 유쾌하고 씁쓸하지만 속시원함이 있는 이야기였다.
또 이 아이들은 도무지 진지해지지 않아서 매력적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려고 들면 한도 끝도 없는데, 이게 어른들과 참 다른 점이었다. 호기심이 생기면 알아보고 궁금하면 그냥 직접 물어본다. 그러면 또 대답을 해준다. 그렇게 서로의 오해를 쉽게 풀 수 있다. 이런 아이들이라면 어른이나 사회의 기준에 쉽게 휘둘리지 않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대체 당신을 만든 목적이 뭔데요?"/"순혈인류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당신이 순혈인류 노래를 해서 나도 검색을 해 봤어요. 그랬더니 연관 검색어로 나치가 가장 먼저 뜨던데요? 어쩐지 무조건 잡아들이고 보려는 게 옛날 나치랑 비슷하더라니."(53쪽_'지퍼 내려갔어' 중)
무슨 일인지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물어봐도 말 안 해 주면? 아무 일도 아니라고 거짓말하면?/왜 결정권은 항상 다른 사람에게 있을까?(106쪽_'알 카이 로한' 중)
"넌 미끼가 필요한 게 아니었어. 저 외계인을 잡는 것에도 관심이 없었어. 그냥 여자애들이 죽는 걸 구경하고 싶었던 거야."(...) "그게...... 더...... 재미있으니까......"(151쪽_'자코메티' 중)
"우리 같이 사진 찍을래? 나한테 카메라 좋은 거 있어."/그 말에 민하 부모님과 수우 할아버지가 거의 동시에 움찔했지만 수우는 눈치채지 못했다.(...) "수우야, 만나자마자 사진을 찍기는 아무래도 좀 어색하지. 사진은 다음에 찍으렴."(206쪽_'기억의 기적' 중)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무척 많다. 누가 언제 어떤 기준으로 그어놓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 선은 누구나 아는 선이다. 보이지 않지만 선명하게 그어져서 어느 누구도 쉽게 그 선을 넘지 못하도록 철저히 막고 있다. 무엇으로? 바로 사람들의 시선으로. 사람들은 사회적 잣대로 고정된 시선을 갖고 있고, 그 시선이 편협한 고정관념으로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고정관념 안에서 제멋대로 사람들을 휘두르고 구분짓는다. 왜 그러는지도 모른 채 남들이 시키는대로만 할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강요한다. 그렇게 강요받은 아이들 중 말 잘 듣는 착실한 아이는 또 그런 시선을 배우며 비슷한 어른으로 성장한다. 그러니 그런 시선에 당당히 한방 먹이고 아무렇지 않게 또 자기대로의 길을 가는 이 아이들을 지켜보는 마음이, 간질간질하고 이토록 뿌듯할 수가 없다.
영화와 세진이는 번갈아 가며 날 북돋아 주었다. 카페를 나와서도 날 가운데에 두고 팔짱을 껴 주었다./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 이렇게 기분 좋게 집으로 향한 적이 있나 싶었다./(...) 미안해, 미리 말 못 해서. 할머니가 그러는데 사람은 비밀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대.(113쪽_'알 카이 로한' 중)
민정은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저 BBC 드라마에 빠진 미치광이랑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어떻게 머리가 돌아야 저런 생각이 가능한 거지?(...) 노인정 할머니들이 목사님 딸이 걱정되니 찾아봐 달라고 했을 때 그냥 무시했어야 했는데.(155쪽_'자코메티' 중)
"그래, 그럼 우리 1년에 딱 한 번만 찍자. 둘이서만."/"좋아!"/수우가 활짝 웃으며 민하의 어깨에 한쪽 팔을 둘렀다.(207쪽_'기억의 기적' 중)
결국 모든 것에서 아이들이 함께 해나갈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은 친구가 최고구나 싶었다.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것 또한 친구이며, 예기치 못한 어떤 상황에서도 기꺼이 자신 쪽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것 또한 친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이 친구들이 있어 이것 또한 얼마나 다행인지. 투덜거리고 신경질은 좀 낼 수 있어도 손을 내밀어 잡아끌고 어깨에 팔을 두르도록 내버려둔다. 그리고 슬며시 웃는다. 이게 이 아이들의 방식. 마음에 든다.
민정은 '그것' 곁으로 걸어가는 찬미를 말리지 않았다. 더 이상 '그것'에게는 폭력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민정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우두커니 서서 찬미와 '그것'이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152쪽_'자코메티' 중)
그리고 세상의 시선과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가만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눈은 정확하다. 맞고 틀리고의 정확함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정확함이다. 그 안에서 무엇이 옳고 그런가에 대한 판단 또한 아이들의 몫이므로, 세상이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이 아이들의 저 시선을 있는 그대로 지켜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정말, 이 세상에서 다 녹아내리기 전에!
"도챈스부터! 얘 지금 녹아내리기 일보 직전이야."(50쪽_'지퍼 내려갔어' 중)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