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1
김호경 지음, 정형수.정지연 극본 / 21세기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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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했습니다. , 과거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이해가 있어야만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안목을 얻을 수 있는 것이죠. 여전한 인문학의 인기 속에서 그 한축을 담당하는 역사의 중요성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에 더해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게 TV사극입니다. 최수종이 주연을 맡은 사극이 많다보니 인터넷에 역사를 만드는 최수종이라는 유머글도 있던데, 최근에는 징비록이라는 드라마가 또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징비록이나 류성룡을 키워드로 한 책도 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TV드라마에 흥미가 없을뿐더러 거의 대부분의 사극이 역사왜곡 논란을 겪다보니 사극은 특히 꺼리게 됩니다. 역사를 배우는 건 중요하지만 사료에 근거한 제대로 된 역사서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대로 워낙 징비록이 인기인데다 소설형태로 쓰인 김훈의 <칼의 노래><남한산성>을 인상 깊게 읽은 경험이 있어, 소설형태로 출간된 많은 징비록 중에 심사숙고를 거쳐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책은 현재 방영중인 드라마 징비록의 내용을 소설로 출간한 것으로 총3권까지 나올 예정이라고 합니다. 드라마 징비록을 즐겨 보시는 분들이 읽는다면 시너지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드네요.



징비록 1권은 조선의 제14대 왕 선조가 '종계변무'를 이뤄낸 장면으로 시작합니다(종계변무란 명나라가 태조의 조선 건국을 역모라고 기록한 내용을 바로잡는 것). 그리고 일본을 통일한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해 20일만에 도성을 빼앗기게 되는 과정, 선조가 개성과 평양으로 파천하는 과정, 이순신의 등장, 패배를 거듭하던 조선군이 양주에서 첫 승전보를 올리는 부분까지 빠르게 전개됩니다. 막 책읽기 속도가 붙는 시점에서 마지막 페이지가 나오니 아쉽습니다.


사실 임진왜란은 씁쓸한 역사입니다. 이 시기의 역사를 복기하는 게 내키지는 않지만 그 역사에서 우리가 배울 점을 찾기 위해서라도 2권과 3권 출간을 기다리며 다른 역사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이 종계변무를 이뤄낸 장면으로 시작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선조는 조선이 세워진 후 정통 왕비가 아닌 측실 부인이 낳은 왕자로서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임금이니 명분을 세울 수 있는 일에 더욱 기뻐했겠죠. 사실 조선시대는 유교적 명분질서가 지배한 시기이기도 한데요, 책을 읽는 내내 도대체 이 명분이 뭐라고 이러나 싶은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이 시기는 조선통신사가 150년 간 공백상태였고 일본은 풍신수길이 통일을 이룬 시기입니다. 즉 외부환경 변화가 심한 시기임에도 정세를 파악하거나 정보를 획득하려는 움직임이 없었습니다. 오늘날 기업을 운영함에도 환경변화를 예측하고 정보를 획득하고 그 정보를 잘 해석하고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도대체 조선의 국정운영이 언제부터 무너진 걸까요. 징비록에 담긴 뜻 그대로 미리 대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또한 발전을 위한 협력보다는 동인과 서인간 당파싸움이 이어지며 어떻게든 상대방 세력을 밟고 올라가 권력의 중심에 서고자 노력합니다. 국난 상황, 임금이 파천하는 와중에도 상대의 과거 발언이나 행동을 트집 잡아 파직시키려 애쓰고, 그러다보니 책임자와 담당자가 자주 바뀌며 혼란이 이어집니다. 무엇보다 위기 상황을 끝내기 위한 협력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도요. 이산해가 선조에게 올리는 말씀이 그 당시는 물론 오늘날에도 곱씹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나라가 이리 참담한 지경이 된 원인은 명분에만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성에게 풍요로운 삶을 주고, 나라를 부국강병하게 하려면 명분보다는 실리를 취하셔야 합니다. 신이 파천을 홍호했던 것도 명분보다는 실리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대신들은 아직도 명분에만 집착하고 있습니다. 허나 류성룡 만큼은 명분과 실리 사이에 균형을 지니고 있으니 지금의 국난을 극복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인물입니다.” (258p)


이런 상황이니 당연히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도 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관군이 왜구들을 막아요? 차라리 마을 개가 왜구들을 막겠습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백성들은 평생 짊어지는 그놈의 군역 때문에 강제로 잡혀 있다시피 하고, 군사들의 봉족 노릇을 하는 백성들은 죄다 도망가는 판국에 누가 왜구들을 막는다 말이오? 나랏일을 한다는 조정 대신들은 동네 왈짜들처럼 동인이다, 서인이다, 패거리 지어 쌈질이나 하고, 임금이라는 위인은 백성들이 피죽이나 먹는지 마는지, 왜 고향을 떠나는지 관심도 없으니, 참으로 성군이시지!” (108~109p)


물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대화는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졌겠지만, 이 책의 배경인 조선시대를 넘어 늘 새겨둬야 할 대목도 있습니다.


민란이 일어난다면 그건 왜변에 대한 방비 때문이 아니라 공평치 못한 군역과 조세 제도 때문입니다. 양민들은 면포 몇 장을 내지 못해 해마다 반년 남짓 군역과 노역을 지면서 힘겨운 공납과 전세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그에 비해 양반과 지주들은 어떻습니까? 면포 몇 장도 내기 아까워 향교에 거짓으로 등록해 군역을 빼고, 해마다 농작의 풍흉과 논밭의 비옥함에 있어서 그 등급을 속여 전세를 거의 내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럿만 바로잡으면 됩니다! 그리되면 축성 때문에 국고가 빌 일도 없고 민심이 성날 일도 없습니다!” (130p)



책을 읽다보니 어릴 적 MBC 인기 드라마였던 <조선왕조 오백년>을 본 기억이 났습니다. 당시엔 그저 거북선이 일본군을 무찌르는 부분을 재미있게 본 것일 뿐이겠지만, 알게 모르게 제 안에 역사에 대한 관심을 키웠을 거라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료에 근거한다면 영상매체나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진 역사소설이 역사적 지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징비록의 징비시경여기징 이비후환(予其懲 而毖後患): 내가 그 읽을 겪은지라 뒤에 올 환란을 삼가노라라는 구절에서 따온 말이라고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중심이 된 빠른 전개로 소설 자체가 가진 장점을 살리는 동시에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해 또한 넓혀주는 책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류성룡이 왜 징비록을 썼는지 마음 깊숙이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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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 - 지구상에서 가장 먼저 미래에 도착한 남자, 일론 머스크가 제시하는 미래의 프레임
애슐리 반스 지음, 안기순 옮김 / 김영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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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머릿속으로 CEO를 한 명만 떠올려 보시죠.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마크 주커버그, 래리 페이지, 에릭 슈미츠, 제프 베조스, 칼리 피오리나... 등 다양한 이름이 등장할 겁니다. 여기 거론된 인물들에 버금가는 CEO가 한 명 더 있습니다. 아이언맨의 모델로도 알려진(아이언맨 만화를 그렸던 스탠 리는 지인에게 미치지 않고선 아이언맨은 하워드 휴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일론 머스크인데요, 제 질문에 바로 일론 머스크를 떠올린 분이 계실까요? 아마 다른 분이 제게 질문을 했다면 저 또한 일론 머스크를 바로 떠올리지 못했을 겁니다.


아마 지금까지 일론 머스크가 일군 성과들 즉, 페이팔, 테슬라 모터스, 스페이스 엑스 등의 사업과 화성 이주 계획이 우리의 일상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지 않다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이에 반해 아이폰, 안드로이드폰, 페이스북, 윈도우즈 & MS오피스, 구글 등은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제품이나 서비스니까요.


일론 머스크는 1971년생으로 이제 겨우(?) 45세이니 앞으로 더 많은 성과와 이슈를 만들어 낼 거라 생각합니다. 책 표지에는 한국 미국 동시출간 일론 머스크 첫 공식 전기라 적혀 있는데, 아직 한창 진행 중인 인물에게 전기라는 개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일론 머스크의 어린 시절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성장과정과 기업운영에 대해 자세하게 기술된 책()임은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일론 머스크 입에서 나온 소스만으로 집필된 책이 아니라 가족, 친구, 전현직 직원 등 일론 머스크를 둘러싼 사람들과의 인터뷰에 기반해 쓰인 책이라 객관적으로 쓰였다는 인상을 줍니다. 인터뷰 대상에는 이혼한 아내나 일론 머스크가 해고한 직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아마 일론 머스크에 관심이 있어 책을 펼친 분들은 경영이나 혁신의 관점에서 일론 머스크를 알고 싶을거라 생각합니다. 저 또한 인간 일론 머스크보다는 ‘CEO 일론 머스크로 책을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일론 머스크의 사업 추진 과정은 마치 기울기가 큰 꺽은선 그래프를 보는 느낌입니다. 언론의 질타를 받기도 하고, 운전자금이 부족한 일도 자주 벌어집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론 머스크가 가지고 있는 경영 철학을 굽힘없이 추진했기에 매번 위기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주변에서 터무니없는 생각이라 할지라도 뚜렷한 목표와 종합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류를 화성에 보내겠다는 계획을 정신 나간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머스크에게는 자기 회사를 움직이는 특별한 구호였다. 자신이 추진하는 일 모두를 아우르는 포괄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세 회사의 직원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들이 날마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머스크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목표를 설정하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직원들에게 되뇌고, 뼛속까지 그 일에 매진한다.


그래서 책을 쓴 애슐리 반스는 일론 머스크를 부를 좇아가는 CEO가 아니라 승리의 여신을 지키기 위해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에 가깝다고 표현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트렌드를 알아채는 데 급급하지도,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집착하지도 않았지만, 머릿속에는 늘 종합 계획을 세우고 추진한다는 평가도 이어집니다.


목표가 뚜렷하다는 건 비전과도 연결됩니다. 리더의 비전을 직원들이 공유하지 못할 때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직원들은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에 혼란스럽기 마련입니다.


일론 머스크의 직원 중 한명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일론의 비전은 매우 명쾌합니다. 그 비전을 들은 직원은 최면에 걸리고 말아요. 일론의 말을 듣고 있자면 직원들의 눈동자가 예를 들어 화성에 갈 수 있다는 열망으로 반짝이기 시작합니다.



또한 일론 머스크는 작은 조직의 강점을 최대한으로 활용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린 스타트업 경영 방식을 구사해 빠른 시장 변화와 다양한 사용자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핵심 아이디어를 빠르게 제품화하고, 고객의 반응을 토대로 경영 방향 또한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세계 각 곳의 공장에 외주를 주고 운영하는 다른 기업과 달리 제작과정까지 내재화한 운영방식 또한 이런 경영 방식을 가능하게 한 요소입니다.


자동차 생산 과정에서도 테슬라는 다른 대기업과는 다르게 자동차를 시험하는 자리에 엔지니어를 함께 파견해 문제를 바로 수정하고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한 직원의 인터뷰 내용에서 그 차이가 극명히 드러납니다.


“BMW는 문제가 발생하면 3~4개 기업이 회의를 열어야 하고 서로 책임을 전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회사는 문제를 직접 고칩니다.”


많은 혁신은 기본적으로 일론 머스크가 늘 배우는 자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듭니다. 일론 머스크는 어려서부터 상당한 양의 책을 읽었다고 하는데요, 기업 경영에 있어서도 난해한 세계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려고 노력하는 강압적 태도의 경영인이었다고 합니다. 공장에서도 엔지니어를 붙잡고 질문을 던지며 그들의 지식을 배우고자 했다는데, 이 또한 인터뷰 내용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얼마나 잘 아는지 시험하려고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일론이 배우려고 노력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일론은 상대방이 아는 지식의 90퍼센트를 습득할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집니다.



일론 머스크는 과거 공적인 이미지와 가정생활 모두에서 흔들리며 위기를 겪기도 했고, 테슬라의 로드스터는 2007년 기술 산업계의 최대 실패작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일론 머스크에 대한 평가는 엇갈립니다. 일론 머스크가 관여하는 사업들이 해당 산업계에 진정한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주지 못한다는 사람도 있는 반면, 일론 머스크가 진정한 물건이며 미래의 기술 혁명을 이끌 가장 빛나는 별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평가가 엇갈리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닷컴 거품 이후 실리콘밸리에서 사라진 DNA라 할 수 있는, 엄청난 위험을 무릅쓰면서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고 장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내는 역할을 일론 머스크가 해냈다는 겁니다. 1960년대 케네디 대통령이 아폴로 계획으로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끌어올린 것처럼 일론 머스크의 화성 이주 계획은 다시금 미국인들의 자부심을 높이고 있습니다. 책 곳곳에도 드러나지만 아마 미국 현지에서 일론 머스크의 인기는 가히 대단할거라 생각됩니다.


많은 시행착오와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일론 머스크는 태양에너지 산업의 솔라시티’, 전기자동차 산업의 테슬라’, 항공 우주 산업의 스페이스 엑스라는 세 사업을 서로 연결해 안정적인 구조를 만들었습니다. 약간은 Captive Market 느낌까지 줄 정도로요.


물론 가정생활이나 직원을 대하는 태도에서는 독단적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머스크와 관련된 주요 인물 중에 인터뷰를 거부하고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까지 책으로나마 접한 CEO 중에는 재포스닷컴의 토니 셰이와 어니스트티의 세스 골드먼을 제외하고는 착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 누가 있었나 싶습니다.



아마 창업 열풍 속에서 성공을 위한 자세와 원칙 등 힌트를 얻기 위해 경영자 이야기를 담은 책을 찾는 분이 많을텐데요, 그런 분들께는 분명히 도움이 되는 책입니다. 저자는 내가 머스크와 대화하며 놀랐던 점은 언제든 자신의 재산 전부를 기꺼이 잃을 각오로 도전하는 태도였다고 합니다. 물론 미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창업 환경에서 이런 태도는 갖기도 힘들고 장려하기에도 적절치 않습니다. 다만 모두가 힘들 거라고 할 때, 사업내용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할 때도 꺾이지 않을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계기를 심어줄 수 있는 책입니다. 두께가 부담스러웠던 스티브 잡스를 다룬 책, 오히려 더 두껍게 나왔으면 좋았겠다 싶었던 제프 베조스의 책에 비해 분량도 적당한 책입니다.


그리고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만큼은 창업자들이 꼭 마음 속에 새겼으면 싶은 문장이 있습니다.


머스크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경쟁사가 놓쳤거나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던 성과는 테슬라를 일종의 라이프스타일로 바꾼 것이다. 테슬라는 고객에게 자동차를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지를 팔았고, 미래에 손을 뻗는 기분을 팔았고, 관계를 팔았다. 애플이 수십 년 전에 맥 컴퓨터를 팔고 다시 요즘 들어 아이팟과 아이폰을 팔며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애플에 열광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하드웨어를 사고 아이튠즈 같은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받고 나면 애플의 세상에 빨려 들어갔다.”


TED 기획자인 크리스 앤더슨은 일론 머스크의 유산은 그가 창출하는 부가 아니라, 그가 제시하는 지속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는 비전에 있다고 말했는데요, 아직도 왕성하게 진행중인 일론 머스크의 유산을 접하고자 하시는 분께 일독을 권합니다. 다만 한 가지. 저는 화성에 식민지를 건설하는 일이 실현되기 보다는 지구가 앞으로도 인간이 잘 살 수 있는 행성으로 남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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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붉은 사랑 -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그대가 있었다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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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있는 좋은 문장을 공유하는 어플리케이션이 있습니다. 작년부터 그 어플리케이션에 자주 올라오는 책이 있는데 바로 림태주 시인의 전작인 <이 미친 그리움>이라는 책입니다. 스스로를 무명 시인이라 겸손하게 칭하는 림태주 시인이 이번에는 산문집을 출간했습니다. <그토록 붉은 사랑>이라는 제목처럼 강렬한 붉은 색 바탕에 붉은 색 꽃이 흐드러진 그림까지 더해진 표지가 더욱 눈길을 끕니다.


림태주 시인은 계절이 바뀌고 세상이 변하는 동안 지나온 시간, 머물렀던 공간, 스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고 합니다. “사랑했던 일들과 이별했던 일들, 사랑하지 못했던 일들과 슬퍼하고 아파했던 일들을 붉은 잉크로 눌러 썼다는 시인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에 맞춰,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지니고 있을 감정을 담아냅니다.


시인은 자신이 쓴 시의 발원지는 어머니라 할 만큼 행간 곳곳에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묻어납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늘 시인에게 인생의 지혜를 주신 분이기도 합니다.


물살이 센 강을 건널 때는 물살을 따라 같이 흐르면서 건너야 한다. 너는 네가 세운 뜻으로 너를 가두지 말고, 네가 정한 잣대로 남을 아프게 하지도 마라. 네가 아프면 남도 아프고, 남이 힘들면 너도 힘들게 된다. 해롭고 이롭기는 이것을 기준으로 삼으면 아무 탈이 없을 것이다.” (17p, 어머니의 편지 에서)


세상 것은 욕심을 내면 호락호락 곁을 내주지 않지만, 욕심을 덜면 봄볕에 담벼락 허물어지듯이 허술하고 다정한 구석을 내보여줄 것이다.” (18p, 어머니의 편지 에서)



그리고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내 감정은 얼마나 깊숙한 곳에 머물러 있을 뿐인가 싶습니다. 잠시 작품 하나의 일부를 옮겨 보겠습니다.


꽃들이 피어 서로 마주 보며 수화를 한다. 깔깔거리며 웃고, 장난치며 떠든다. 오래 참아서 그런가. 무진장 고요하게 시끄러운 저 꽃님들.” (33p, 수화(手畵) 에서)


벚꽃을 보러 갔을 때도 많이 피어서 보기 좋구나, 사진 한 장 찍어 볼까 하는 생각만 했을 뿐 오랜 겨울을 견디고 오랜만에 만난 꽃들이 몸을 흔들어가며 대화를 나눈다는 생각을 어찌 해볼 수 있었을까요. 이래서 인문학 서적이나 전공 서적으로 지식을 쌓는 것 이상으로 문학 작품을 읽는 게 중요한가 봅니다. 세심한 관찰력과 상상력에 다시금 감탄합니다.


마당에 핀 분꽃씨앗을 가지고 놀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문장도 있고,


까맣게 여문 분꽃 씨를 귀에 대보면 보드랍게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린다. 이 앙증맞은 씨앗 안에 식물의 일생이 동그랗게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120p, 분꽃 씨를 받다가 에서)


학창시절에 배운 성북동 비둘기를 연상시키는, 회색으로 변해가는 주변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나는 문장도 있습니다.


길에서 우리는 유년의 삶을 살았고, 우정을 나눴고, 평화를 발명했다. 그 길이 사라졌고, 유희가 사라졌고, 그 길 위의 아이들이 사라졌다. 아스팔트가 발라진 새마을에 아이 없는 노인들이 최후를 살고 있다.” (75p, 길이 나를 키웠다 에서)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따뜻하면서도 감수성이 담긴 문장이 있기에 림태주 시인이겠죠. 많은 문장이 제 마음도 붉게 만듭니다.


그대와 같은 세상 안에 머물 수 있기를. 그대와 같은 시간 속에 머물 수 있기를. 그대가 없다면 나도 없기를.” (131p, 마루나무 아래에서 쓰는 편지 에서)


따뜻해서 봄이 왔고 그대가 붉어서 가을이 왔습니다. 그대가 그대의 계절입니다.” (139p, 그대의 그대의 계절입니다 에서)


몸은 대나무와 같다. 안을 비워야 푸르고 단단해지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다.” (209p, 내 몸에 쓰는 이력서 에서)


그리고 특히 사랑법이라는 글은 사랑으로 고민하는 모든 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기다리다가 나는 알았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가 오는 동안 나도 그에게 가는 일이란 것을 알았다. 기다리는 일이 멈춤이 아니라 끊임없는 운동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그것이 사랑의 법칙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기다리는 방법을 찾아 헤매지 않고 기다림의 등불을 켰더라면 사랑은 벌써 내게 도착했을 것이다. 덜 고달프로 덜 방황했을 것이다. 너무 많이 배우느라, 영리하게 구느라 이 단순한 사랑법을 오래도록 깨우치지 못했다. 사랑은 사랑하면 되는 것!” (141p, 사랑법 에서)



이 책의 특별한 면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우선 봄여름가을겨울에 얽힌 글 뒷부분에 시인의 계절로 엮인 19편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시인으로서 림태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시이자, 각 시 바로 뒷페이지에 작가의 말을 덧붙여 시를 쓴 배경과 감상포인트가 있어 시인 입장에서 시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물론 바로 작가의 말을 보는 것보다 독자 나름대로 의미를 파악해보는 게 좋겠죠. 정답은 없고, 독자의 수 만큼 느낌도 다를테니까요.


더욱 특별한 것 것은 시낭송 음원이 함께하는 책이라는 겁니다. 목차를 보면 마이크 아이콘이 표시된 시가 12편 있는데요, 유튜브에서 그토록 붉은 사랑을 검색해 듣거나 출판사 행성B 블로그에서 음원을 다운로드 받을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전문 성우가 읽어주는 시를 들으니 제가 눈으로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입니다. 물론 내심 림태주 시인의 육성을 듣고 싶기도 했지만요.


예전에 낭독의 발견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엔 고전평론가 고미숙이 <낭송의 달인 호모 큐라스>라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요, 묵독(默讀)이 어울리는 책도 있지만 시나 수필은 소리 내서 읽으면 또 다른 감성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유튜브로 시낭송을 들으니 낭독의 힘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그대가 있었다라는 부제처럼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감성은 지난날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그리움입니다. 하지만 중간에 섞인 아들과의 썰전이나 스님과 나누는 대화가 나오는 부분을 읽을 때는 입가에 미소가 번지기도 합니다.



참 알찬 책입니다. 글 중간 중간 시인의 손글씨와 백중기 화백의 그림이 더해져 한번 더 음미하며 글을 읽으라고, 잠시 쉬며 천천히 행간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글도 글이지만 백중기 화백의 그림이 있어 이 책이 더 붉게 빛나는 것 같습니다. 27점의 그림이 실려 있는데, 그림이 참 좋아 찾아보니 작년 10월에 인사동에서 전시회를 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접하면 얼마나 멋질까 싶지만 어쩔 수 없이 백중기 화백의 홈페이지에서 조금 더 크게 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대가 그대의 계절이다'라는 글에는 여자친구에게 선물하고 싶다며 시인의 책에 서명을 받고자 찾아온 청년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능하다면 저도 꼭 만나 뵙고 시인의 멋들어진 글씨를 책에 받고 싶을 만큼 오래 간직하고픈 책입니다. 시인은 북촌에 있는 한옥카페 북스쿡스에 자주 방문하는 것 같은데, 저도 햇살 좋은 날 이 책을 들고 한번 방문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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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강산 3 박정배의 음식강산 3
박정배 지음 / 한길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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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채널을 돌리다보면 어디에선가 음식과 관련한 화면이 나올 정도로 음식 프로그램이 인기입니다. 요리법이나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부터 요리대결 프로그램까지 이제 음식은 예능프로그램의 소재로도 쓰입니다. 사실 음식만큼 남녀노소 불문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아이템이 있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매일 음식을 먹고 있고, 단순히 생존과 결부된 음식 섭취가 아니라 이제는 삶의 질과 관련된 측면에서 음식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워낙 많은 프로그램에서 맛집으로 소개하는 음식점이 많아진데다 블로거맛집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맛집의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큰 기대를 가지고 방문했다가 실망하고 오는 경우도 생깁니다. 사람마다 음식에 대한 취향이 다른 점도 있겠지만 지나치게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음식이 소개되거나 면밀한 검토 없이 소개되는 이유도 있을거라 생각되는데요, 그런 점에서 <음식강산 3 : 고기 굽는 화롯가에 이야기꽃이 핀다>라는 책은 많이 다른 느낌을 줍니다.


저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가끔 맛집프로그램을 보면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반응과 평가가 거슬립니다. 맛이 좋은 건 이해가 가는데 입 한가득 음식을 넣은 채 양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소위 쌍따봉), 최고라고 외치는 모습이 영 자연스럽지 않고 보기에 불편합니다. 요리를 소개하는 글도 마찬가지죠. 그런데 이 책 속에 담긴 음식점들 대부분은 해당 음식을 개발했거나, 원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대를 이어 맛과 원칙을 유지하는 곳들입니다. 사실 음식점 외관만 보면, 정보가 있는 상태에서 알고 찾아가지 않는 이상 그냥 스쳐 지나갈만한 허름한 음식점도 많이 있습니다.



예부터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습니다. 저자의 글이 좋은 이유 중 하나가 과하지 않다는 겁니다. 책을 읽으며 가봐야겠다 싶은 식당리스트는 점점 길어졌지만, 그건 결코 미사여구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책 뒷표지에 적힌 요리연구가이자 칼럼리스트인 박찬일의 평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유행처럼 가벼운 글들이 더 사랑받는 세상에서 박정배의 글은 본질을 흐리는 기교 대신 육중한 팩트 한 줄을 더 쓰려고 든다.”


이 책은 해산물을 소재로 쓰인 <음식강산 1>과 국수를 소재로 한 <음식강산 2>에 이어 육고기를 소재로 한 책입니다. 아마 1권과 2권 보다 더욱 미식가들을 자극하는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목차만 살펴보더라도 제주의 육고기, 육회, 소불고기, 쇠갈비, 설렁탕, 곰탕, 순대, 족발, 부대찌개, 돼지국밥, 감자탕, 치킨과 통닭, 삼계탕, 마포의 고기문화까지 (삼겹살은 저자가 미처 다루지 못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푸짐하다 못해 넘쳐나는 느낌입니다.


1권과 2권이 2013년에 출간됐으니 새로운 책이 나오기까지 2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는데요, 그동안 맛있는 고기집을 많이 돌아다녔으니 부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테이블과 달리 때론 혼자 고기를 구워 먹어야 했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맛을 평가하고 다른 음식점과 오묘한 차이를 찾으며 글을 쓰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란 생각이 듭니다.



김홍도도 고기를 구워먹는 그림을 그린 걸 아시나요?

행려풍속도 후원유연이라는 병풍 첩을 보면, 숯불이 가득한 난로 위에 불판을 놓고 7명의 사람이 고기를 구워먹는 그림이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고기는 입맛을 자극하는 음식임에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전통을 가진 음식점의 육고기 요리를 담았더라도 이 책에 단순히 음식 소개만 담겼다면 만족도가 떨어졌을 겁니다. <음식강산>은 여느 음식 책과 같이 전국의 식객에게 꼭 가봐야 할 음식점 리스트를 제공하는 역할도 하지만, 그 음식이 어디서 시작되서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됐는지, 그 음식과 얽힌 사회적 사건이나 변화상은 무엇인지까지 알려주는 역할까지 합니다.


그래서 위에서 보여드린 김홍도의 그림 외에도 옛 문헌, 신문기사, 음식과 관련된 연구자료, 그리고 음식에 얽힌 저자의 추억까지 동원해서 책을 급하게 읽어 체하지 않게, 천천히 소화시키며 읽을 수 있게 구성되었습니다. 인용되는 심문기사를 보면 그리 옛날도 아닌데 지금 쓰이는 단어나 표현과 많이 달라 읽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쇠고기 육회 먹는 법을 소개한 1931523일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직설적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잘 와 닿는 표현이 많습니다. 한편으론 2100년 쯤 2015년 신문기사를 본 사람들의 반응도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것을 넘우(너무) 과하게 먹으면 쇠똥내가 나기는 하나 고소한 맛으로는 내장 중에 제일입니다.”

천엽은 여러 번 정히 써서야 똥내가 업서집니다. 만일 것허물이 밀려 버서지는 것(밀려 벗어지는 것)은 상한 것으로 횟감으로는 더욱 부적당합니다. 천엽을 잘게 썬 후에 헌겁(헝겊)으로 싸고 단단이 짜서 그대로 먹거나 기름과 소곰과 호초가루에 주물러 먹거나 합니다.”


1971718일 선데이서울에 실린 글은 그 당시 마포나루 분위기를 상상하게 합니다.


짠물에 시달리던 어부 장사꾼들이 비릿한 비위를 기름기가 텁텁한 양지머리탕으로 풀로 나서 한 그긋에 15, 즉 쌀 반말 값을 선뜻 내놓고 가던 시절이었다.”



특정 음식이 특정 지역에서 융성하게 된 사회적 배경도 함께 설명되어 있습니다.

경상도에 불고기골목이 많은 이유는 1960년대 말에 본격화된 경부고속도로나 산업도시 건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합니다. 포천 이동갈비는 미군부대에서 버린 갈비를 주워 포를 떠서 먹으면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에 담긴 슬픈 역사의 흔적도 많이 소개되는데요, 평양에서 갈비가 유행한 이유는 일제강점기 군인들의 병식(병식)에 있어 육식이 가장 중요한 식재료였기 때문이라는 것, 1일본에 돼지고기를 많이 수출하던 1970년대에 돼지머리와 다리, 내장과 피, 돼지껍데기, 뼈 등 돼지 부산물을 일본이 수입하지 않아 이를 이용한 요리가 융성했다는 점 등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요리의 이면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음식의 언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스탠퍼드대학교에서 7만 명 이상이 수강한 강의 내용을 옮긴 책인데요, 음식에서 인류의 역사와 세계의 문화, 사회, 심리, 언어까지 두루 살피는 흥미로운 책입니다. 상대적으로 스케일은 작지만 이 책도 한국판 음식의 언어라 해도 좋을 만큼 음식과 연관된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곰탕과 설렁탕의 어원, 불고기, 주물럭 등 음식의 명칭에 대한 뒷이야기까지 접할 수 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무엇보다 이 책이 마음에 드는 점은 최근에 뜨고 있는 음식점이 아닌 오랜 기간 맛을 지켜온 음식점을 대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시대가 흐르고 새로운 세대가 등장하고, 각 세대가 지닌 생각이 달라지다보니 세대 간의 갈등도 생겨나지만, 이 음식점들은 최소한 맛에 있어서는 세대를 통합하고 있는 셈입니다.


저자가 자동차로 이동하기보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처음엔 차가 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가, 어쩌면 술을 곁들이기 좋아하기 때문에 일부러 차를 안가지고 다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웃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을 대표하는, 즉 서울에서 각지로 전파된 음식은 없다고 알고 있었는데 설렁탕은 서울 음식이라는 것 또한 새로 알게 된 상식입니다. 지금은 이전했지만, 예전 인사동에서 일할 때 매일 지나치던 이문설농탕 건물을 사진으로나마 보니 반가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모일 회)음식을 먹으려고 그릇 곁으로 모여드는 장면을 묘사한 문자라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그릇 곁으로 모여들어 고기를 드시며 會食(회식)을 즐기는 분들이 계실 텐데요, 고기를 즐기는 분들께는 특히 소장 가치가 충분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마 음식강산 시리즈가 이 책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육고기에 이어 또 어떤 음식강산이 펼쳐질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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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것들 - 슬프도록 아름다운 독의 진화
정준호.박성웅 외 지음, EBS 미디어 기획 / Mid(엠아이디)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독은 우리 생활과 거리가 먼 주제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많은 독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담배에 들어가는 니코틴과 술에 들어가는 에탄올은 사람들이 가장 널리 쓰는 독 중 하나이자, 많은 국가들에서 합법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독입니다. 작년 외식업계의 트렌드 중 하나였던 매운맛을 내는 데 쓰이는 캡사이신도 대표적인 식물독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까이에 캡사이신을 넣은 물대포를 사용하는 곳이 있으니, 돌려 말하면 사람들에게 독을 쏘아대는 셈입니다.


얼마 전 EBS 다큐프라임에서 독()을 주제로 한 4부작을 방송했습니다. 하지만 방송 시간을 놓쳐 본방사수를 못했던 터에 방송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어 방송 다시보기 전에 먼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독이라 번역하지만, 영어에서는 톡신(toxin), 베놈(venom), 포이즌(poison)이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상처를 내고 직접 독을 주입하는 경우는 venom, 몸에 독을 가지고 있어서 만지거나 먹어야 중독되는 경우는 poison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독의 진화과정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달리기에 비유합니다. 독을 가진 생물과 경쟁하려면 독에 대한 저항성을 가지도록 진화해야 하고, 독을 가진 생물은 또 다시 경쟁에 앞서 나가기 위해 더 강력한 독을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멈추는 순간 뒤처지고 도태되는, 그래서 이 책의 부제목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독의 진화인가 봅니다. 모든 생명체의 행동에 무의미한 건 없죠. 독해진 생물들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거고, 독을 이겨내기 위한 과정에서 생물들은 또 진화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그저 독이라 부를 뿐이지만, 진화에 독이라는 관점을 넣어 생각하니 진화라는 과정이 더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책을 읽기 위해선 우선 독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한데요, 인간에게 해가 되는지 아닌지로 독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서 구분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저자는 독을 가지게 된 생물들은 대체로 불쌍한생물들이라고 합니다. 독을 만드는 데 많은 노력과 비용이 소모되고, 독 자체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죠. 사실 저는 인간의 관점은 차치하고, 책을 읽는 내내 독을 가진 생물들의 정교함과 자연의 위대함에 대해 경탄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독한 것들 중 가장 놀랍게 접한 것은 보석말벌입니다. 보석말벌은 외과수술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바퀴벌레를 마취시켜 애벌레의 먹잇감으로 활용합니다. 첫 번째 독침은 바퀴벌레의 가슴 부위에 위치한 신경절을 정확히 찔러 독을 주입하고 2~3분간 마취시킵니다. 그 후 두 번째 독침을 머리에 위치한 신경절과 뇌 부위에 찌른다고 합니다. 그럼 바퀴벌레는 죽지는 않지만 도망치는 반응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지 않아 보석말벌이 이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보석말벌은 이에 더해 바퀴벌레의 더듬이를 반쯤 갉아 먹어 주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후 알과 함께 굴속에 놓아둡니다. 말 그대로 좀비가 된 바퀴벌레는 이후 부화한 애벌레들의 먹이로 쓰입니다.


이 외에도 갖가지 독한 생물이 등장해 천재적인 전략과 정교한 기술을 선보이는데요, 정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가, 우리가 다른 생물을 미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반성까지 하게 됩니다.


잘 쓰면 약 못 쓰면 독이라는 말처럼 독을 인간에게 유용하게 활용하거나 피해를 줄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도 눈에 띄었습니다. 해파리에 쏘여 발생하는 이루칸지 증후군에 대한 원인을 밝히고자 한 잭 반스박사는 14살 아들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이루칸지상자해파리에 쏘였다고 하는데요, 심각하고 숭고한 상황이지만 연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생물학자들의 상황에 약간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독에 대한 많은 연구 덕분에 인간은 약을 발전시켰고, 생물독 연구를 통해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 분야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을 사용하는 생물들이 마치 공격기술과 방어기술을 익히는 유단자들 같다는 생각.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독을 독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각일 뿐이고, 다른 생명체에게는 살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죠그리고 이에 맞춰 인간 또한 공격기술과 방어기술을 익히며 유단자가 되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 해수욕장에서 해파리에 쏘였다는 피서객의 뉴스가 나옵니다. 며칠 전엔 해파리를 잡아먹은 쥐치를 방류해 사고를 예방한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쥐치는 반세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잡히면 재수 없는 물고기로 불리며 버려지기 일쑤였다는데, 이제 기사 제목에서 착한 물고기라는 별명을 얻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개입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개입해 오히려 나비효과를 만든 사례로 등장하는 사탕수수두꺼비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되고, 독에 대한 관리 소홀은 3,500여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사망한 인도의 보팔 참사와 같은 독성가스 유출사고는 후유증까지 유발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독해지고 싶어서 독해진 게 아니라, 주변 환경과 진화적 경쟁에 따라 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독한 생물들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제목은 독하지만 내용은 알찬 책입니다. 화질 좋은 사진으로 벌레나 뱀 등이 많이 나와 섬뜩함을 느낄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분을 충분히 상쇄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꾹 참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오해를 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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