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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한 것들 - 슬프도록 아름다운 독의 진화
정준호.박성웅 외 지음, EBS 미디어 기획 / Mid(엠아이디) / 2015년 5월
평점 :
품절

독은 우리 생활과 거리가 먼 주제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우리는 많은 독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담배에 들어가는 니코틴과 술에 들어가는 에탄올은 사람들이 가장 널리 쓰는 독 중 하나이자, 많은 국가들에서 합법적으로 소비할 수 있는 독입니다. 작년 외식업계의 트렌드 중 하나였던 매운맛을 내는 데 쓰이는 캡사이신도 대표적인 식물독 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가까이에 캡사이신을 넣은 물대포를 사용하는 곳이 있으니, 돌려 말하면 사람들에게 독을 쏘아대는 셈입니다.
얼마 전 EBS 다큐프라임에서 독(毒)을 주제로 한 4부작을 방송했습니다. 하지만 방송 시간을 놓쳐 본방사수를 못했던 터에 방송 내용이 책으로 출간되어 방송 다시보기 전에 먼저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독이라 번역하지만, 영어에서는 톡신(toxin), 베놈(venom), 포이즌(poison)이 미묘하게 다른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자료를 더 찾아보니 상처를 내고 직접 독을 주입하는 경우는 venom, 몸에 독을 가지고 있어서 만지거나 먹어야 중독되는 경우는 poison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독의 진화과정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달리기’에 비유합니다. 독을 가진 생물과 경쟁하려면 독에 대한 저항성을 가지도록 진화해야 하고, 독을 가진 생물은 또 다시 경쟁에 앞서 나가기 위해 더 강력한 독을 만들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멈추는 순간 뒤처지고 도태되는, 그래서 이 책의 부제목이 ‘슬프도록 아름다운 독의 진화’인가 봅니다. 모든 생명체의 행동에 무의미한 건 없죠. 독해진 생물들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독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거고, 독을 이겨내기 위한 과정에서 생물들은 또 진화하게 됩니다. 인간들은 그저 독이라 부를 뿐이지만, 진화에 독이라는 관점을 넣어 생각하니 진화라는 과정이 더 신비롭게 느껴집니다.
책을 읽기 위해선 우선 독을 바라보는 관점의 변화가 필요한데요, 인간에게 해가 되는지 아닌지로 독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켜서 구분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저자는 독을 가지게 된 생물들은 대체로 ‘불쌍한’ 생물들이라고 합니다. 독을 만드는 데 많은 노력과 비용이 소모되고, 독 자체가 자신의 목숨을 위협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죠. 사실 저는 인간의 관점은 차치하고, 책을 읽는 내내 독을 가진 생물들의 정교함과 자연의 위대함에 대해 경탄했습니다.

책에 등장하는 독한 것들 중 가장 놀랍게 접한 것은 보석말벌입니다. 보석말벌은 외과수술보다 정교한 방식으로 바퀴벌레를 마취시켜 애벌레의 먹잇감으로 활용합니다. 첫 번째 독침은 바퀴벌레의 가슴 부위에 위치한 신경절을 정확히 찔러 독을 주입하고 2~3분간 마취시킵니다. 그 후 두 번째 독침을 머리에 위치한 신경절과 뇌 부위에 찌른다고 합니다. 그럼 바퀴벌레는 죽지는 않지만 도망치는 반응을 담당하는 뇌 부위가 활성화되지 않아 보석말벌이 이끄는 대로 끌려갑니다. 보석말벌은 이에 더해 바퀴벌레의 더듬이를 반쯤 갉아 먹어 주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 후 알과 함께 굴속에 놓아둡니다. 말 그대로 좀비가 된 바퀴벌레는 이후 부화한 애벌레들의 먹이로 쓰입니다.
이 외에도 갖가지 독한 생물이 등장해 천재적인 전략과 정교한 기술을 선보이는데요, 정말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가, 우리가 다른 생물을 미물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하는 반성까지 하게 됩니다.
‘잘 쓰면 약 못 쓰면 독’이라는 말처럼 독을 인간에게 유용하게 활용하거나 피해를 줄이려는 과학자들의 노력도 눈에 띄었습니다. 해파리에 쏘여 발생하는 이루칸지 증후군에 대한 원인을 밝히고자 한 ‘잭 반스’ 박사는 14살 아들과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직접 이루칸지상자해파리에 쏘였다고 하는데요, 심각하고 숭고한 상황이지만 연구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생물학자들의 상황에 약간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독에 대한 많은 연구 덕분에 인간은 약을 발전시켰고, 생물독 연구를 통해 중추신경계에 작용하는 약물 분야 연구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독을 사용하는 생물들이 마치 공격기술과 방어기술을 익히는 유단자들 같다는 생각.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독을 독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시각일 뿐이고, 다른 생명체에게는 살아가기 위한 수단일 뿐이죠. 그리고 이에 맞춰 인간 또한 공격기술과 방어기술을 익히며 유단자가 되고 있습니다.
매년 여름 해수욕장에서 해파리에 쏘였다는 피서객의 뉴스가 나옵니다. 며칠 전엔 해파리를 잡아먹은 쥐치를 방류해 사고를 예방한다는 기사도 있었습니다. 쥐치는 반세기 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잡히면 ‘재수 없는 물고기’로 불리며 버려지기 일쑤였다는데, 이제 기사 제목에서 ‘착한 물고기’라는 별명을 얻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개입이 어떤 결과를 나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개입해 오히려 나비효과를 만든 사례로 등장하는 ‘사탕수수두꺼비’ 같은 상황이 또 벌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도 되고, 독에 대한 관리 소홀은 3,500여 명의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사망한 인도의 보팔 참사와 같은 독성가스 유출사고는 후유증까지 유발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독해지고 싶어서 독해진 게 아니라, 주변 환경과 진화적 경쟁에 따라 독해질 수밖에 없었던 독한 생물들에 대한 오해를 조금이나마 풀어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제목은 독하지만 내용은 알찬 책입니다. 화질 좋은 사진으로 벌레나 뱀 등이 많이 나와 섬뜩함을 느낄 분도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런 기분을 충분히 상쇄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으니 꾹 참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는 오해를 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