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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지의 최전선
이어령.정형모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김정운교수의 『에디톨로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에디톨로지’라는 흥미로운 개념 외에도 제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김정운교수가 이어령교수를 언급한 부분인데요, 아주 조금만 옮겨보겠습니다.
“솔직히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를 만나도, 속으로 ‘그 정도 생각은 나도 한다’며 항상 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만 만나고 나면 열등감에 풀이 죽는다. 팔십 노인에게 당할 재간이 도무지 없다.”
이어령교수의 『디지로그』를 읽었지만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의 융합‘이라는 큰 주제 외에 세세한 내용은 먼 기억이 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책을 읽어보려는 찰나 『지의 최전선』이라는 신작을 발견했습니다. 『디지로그』는 10년 전에 나온 책이니 상당히 시대를 앞서 간 셈이죠. 두 책은 교집합을 이루는 소재도 있는데다, ’디지로그‘라는 개념을 접한 상태라면 더 많은 부분을 소화시킬 수 있을테니 두 권을 함께 읽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지의 최전선』의 경우, 어차피 한 번 읽는 것으로는 석학의 사고와 지혜를 모두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판단 아래, 막히는 부분이 있어도 일단은 끝까지 읽어본 후 다시 책을 펼쳐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이어령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한 정형모기자마저도 “좌우간 이 교수의 얘기를 아무리 들어도 뭔 얘기인지 어렵긴 마찬가지다”라고 할 정도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교수가 대화를 주고받는 형태로 쓰인 책이라 제목이 주는 압박에 비하면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우선 상식으로 알아두기에 좋은 흥미로운 내용이 많은데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여러 개념에서 큰 주제를 뽑아내는 이어령교수의 내공은 쉽게 비교하자면 싸구려 재료만 있는 냉장고에서 고급스럽고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광경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지(知)’라는 단어에서 으레 연상되는 학구적인 내용만을 다루지 않고, 우리의 일상, 기술의 변화, 정치ㆍ경제ㆍ사회적 사건, 역사, 국제정세 등에서 ‘지의 최전선’으로 다가가기에 더 많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처음 지의 최전선은 인문학자나 지적인 것을 업으로 하는 지성인들만의 싸움인 줄 알았다. 헌데 그 전선이 바로 방역의 전선이요, 경제의 전선이요, 정치의 최전선임을 이번 메르스 사태로 깨달은 것이다. 이 글을 연재하던 그 당시보다 훨씬 더 실감하고 그 의미를 통감하게 된다.” (178p)
3D 프린팅 기술로 시작된 이야기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 디지로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서에서 동으로 이동할 문명의 축이라는 주제로 확산됩니다. 여기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문제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옛 지도로 보는 관점, 중국과 미국의 네트워크 전략까지 연결됩니다. 원주율(파이)로 시작한 이야기는 일리아스와 삼국지, 소설(novel)의 어원까지 넘나들며 빅데이터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 인류 문명의 역사는 지혜의 시대가 지식의 시대로, 지식의 시대가 정보의 시대로, 정보의 시대가 데이터의 시대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데이터에서 태곳적 지혜로 거슬러 올라가는 U턴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어령교수가 풀어내는, 시대를 아우르고 분야를 아우르는 지의 향연은 7대의 컴퓨터를 사용하며 에버노트에 1만개가 넘는 노트를 저장한 데이터의 힘이자, 지혜-지식-정보-데이터를 선순환 시키는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의 최전선‘에 다가가기 위해 갖춰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뽑은 키워드는 관심, 관찰, 관계 그리고 상상입니다.
“관심, 관찰 그리고 관계. 인문학을 문사철이라고 하지만 모든 지적 프로세스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종교든 정치든, 바로 그 세 가지야.” (185p)
“책이나 도서관에 있는 것은 이미 누군가 생각한 것들, 즉 소트(thought)야. 과거분사지. 하지만 나는 지금 검색을 통해 싱킹(thinking)하고 있어. 싱킹은 think의 현재분사야. 질이 달라.” (188p)
더 중요한 것은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상상이다.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문학적 마인드다. 그것도 과거를 소트(thought)하는 인문학이 아니라 현재를 싱킹(thinking)하는 살아 있는 인문학. (199p)
가슴으로 느끼는 관심을 머리와 눈으로 관찰하고, 관찰한 데이터 간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 그 관계 맺기에 필요한 것이 싱킹(thinking)인 것 같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인 ‘디지로그’ 역시 결국엔 관계의 문제겠죠. 『지의 최전선』을 읽으며, 인문학이 강조되는 시기에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인문학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thought가 아닌 thinking, 단순한 앎으로 끝나는 게 아닌 시대를 읽고 미래를 상상하기 위한 인문학.
책 표지에 적힌 글이 흥미롭습니다.
인터페이스 혁명의 시대를 읽는 새로운 지문화학(geoculture)
지문화학(geoculture)에 대해 검색해보니, 지정학(geopolitics)을 근거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합니다. 세계체제 내에서 그 정당성이 널리 인정되는 규범과 담화 양식으로 정의하며, 체제를 통제할 수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같다고 합니다. 풀어낸 설명을 읽어도 그 개념이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지만, 그 규범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령교수가 전하는 아래 메시지에서 우리가 왜 새로운 지문화학을 위한 지의 최전선에 있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공감하게 됩니다.
“미래 학자들 말이 틀리는 이유 알아? 그들은 언제나 이런 세상을 만들자가 아니라 이런 세상이 온다고 말해. 하지만 미래는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그렇다고 역사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지. 그 비전이 천천히 오더라도 오늘 그것을 보여줘야 해.“ (96p)
미래 학자들 말이 틀리는 이유 알아? 그들은 언제나 이런 세상을 만들자가 아니라 이런 세상이 온다고 말해. 하지만 미래는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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