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불능 - 인간과 기계의 미래 생태계
케빈 켈리 지음, 이충호.임지원 옮김, 이인식 감수 / 김영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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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학자 서민교수의 책 서민적 글쓰기서평의 금기사항이라는 부분에 나오는 네 가지 금기사항 중 세 번째로 모르는 얘기를 쓰지 말자고 거론하며, 서평은 자신이 유식해 보이기 위해 쓰는 게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지난해 제 기준에서는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고 서평도 꽤 많이 남겼지만 통제 불능이란 책만큼 두꺼운 책도, 이해하기 어려운 책도 없었습니다. 서민 교수의 책을 인용한 이유도 통제 불능에 대해서는 서민교수의 금기사항을 정말 잘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애초에 이 책을 선택한 건 워쇼스키 감독의 영화 <매트릭스>에 결정적 영감을 준 바로 그 책!“이라는 카피 때문이기도 합니다. 인간과 기계가 얽히는 미래 생태계라는 주제는 유토피아건 디스토피아건 이미 많은 책과 영화에서 다룬 내용이고, 재미와 함께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는 게 사실입니다. 2의 기계 시대(청림출판)가장 인간적인 인간(책읽는수요일) 같은 책도 늘 위시리스트에 보관되어 있는 책이죠. 물론 말씀드린 대로 두껍고 어려운 책입니다. 900페이지가 넘는 두께는 차치하고라도 한국공학한림원이 발간에 참여했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의 수준을 반증하는 셈입니다.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 책은 태어난 것들과 만들어진 것들의 결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와 함께 기계들은 점점 생물학적 속성을 띠어가고 생물은 점점 공학적 속성을 띠어간다는 문장이 정말 인상 깊게 다가왔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기계들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고 생명과 유사한 특성을 갖춰 가는지 체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원서가 1994년에 나왔다는 걸 감안하면 (기계와 무관해서일수도 있겠지만) 제 입장에서는 놀라운 예측이라 생각합니다.

 

비단 기계에만 적용되는 이론은 아닙니다. 저자는 생태계나 생명체 등으로 알려진 생물 공동체와 로봇, 기업, 경제, 컴퓨터 회로 등과 같이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든 만들어진 것이든 생명과 유사한 특성(lifelikeness)’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살아 있는 계라고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저자가 명명하기를 이 계를 비비시스템(vivisystem)'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책은 경제, 생태계, 인간문화, 다윈의 진화론에 도전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 등 온갖 영역의 비비시스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해의 폭과 무관하게 이 책을 읽는 시간이 의미 있었던 이유는 제가 이전에 읽은 책을 되새겨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막대한 힘을 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이해와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종말이라는 대담한 화두까지 던진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사피엔스(2015년에 읽은 책 중 가장 추천하는 책), 그리고 뇌과학과 사이언스 픽션을 다룬 많은 영화를 떠오르게 한 미치오 카쿠(Michio Kaku)마음의 미래는 우리의 미래를 생각해 보는 데 많은 도움이 되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페이스북의 마크 주커버그는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영화 아이언맨에 나오는 자비스같은 인공지능 시스템을 개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역설적이게도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어벤져스 :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는 통제 불능 상태가 된 자비스가 등장하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많은 비비시스템이 등장하게 될 겁니다. ‘생명과 유사한 특성(lifelikeness)’을 가지고 있다면 과연 통제한다고 해서 인간이 원하는 방향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책 표지에 적힌 글처럼 제어하려 들지 마라! 그것이 기계를 현명하게 제어할 유일한 방법이다!”가 맞는 방향인지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통제 불능이라는 책 제목 자체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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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코리아 2016 -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의 2016 전망
김난도 외 지음 / 미래의창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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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경제적 환경은 점점 빠르고 불확실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불확실함은 불안을 가져오기 마련이고, 국내외 연구소의 예측을 찾아보건 점집에 가서 조언을 듣건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미래를 대비하고자 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불투명한 상황일수록 미래에 대한 예측을 풀어내는 책도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보기엔(검색을 해서 숫자를 세어보진 않았으니) 작년보다 '트렌드'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이 많이 늘어난 것 같습니다. 트렌드 관련 책을 내는 것도 트렌드인가 봅니다.

 

아무튼 그 많은 트렌드 책 중 제가 선택한 책은 트렌드 코리아 2016입니다. 저는 '트렌드 코리아'시리즈를 2014년부터 읽었는데, '트렌드 코리아'시리즈는 2009년부터 꾸준히 발간되어 여타 책에 비해 신뢰감이 가는 게 사실입니다. 김난도교수가 최근 출간한 에세이는 일부 독자들에게 안 좋은 평을 받기도 하지만 트렌드 분석에 있어서는 김난도교수가 센터장으로 있는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가 충분히 좋은 정보를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는 매년 예상되는 소비트렌드를 10개의 큰 주제로 묶어냅니다. 매년 당해년도 띠에 해당하는 동물 이름을 넣어서 만드는 올해의 키워드슬로건은 'MONKEY BARS'입니다. 멍키바는 구름다리 형태를 띤 놀이기구로 초등학교 운동장에 설치된 걸 많이 보셨을 겁니다. 실제로 많이 놀아보셨을 테구요. 아무튼 소비트렌드 분석센터는 ‘2016년 대한민국을 둘러싼 정치사회경제적 위기의 깊은 골을 원숭이가 구름다리를 넘듯 신속하고 현명하게 무사히 건너, 안정된 2017년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을 담아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각각의 키워드는 은유적이고, 세부적으로 실린 트렌드는 상당히 구체적이니 이 글에서 트렌드를 요약 정리하는 건 어렵기도 하거니와 불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나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을 위해 출판사에서 친절하게 한 줄로 정리한 키워드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Make a 'Plan Z' : ‘플랜 Z', 나만의 구명보트 전략

잔고가 0원이어도 소비는 우아하게, 당신의 플랜Z 는 무엇인가?

 

Over-anxiety Syndrome : 과잉근심사회, 램프증후군

걱정을 사서 하는 사람들, 사회적 불안장애가 대한민국을 덮친다.

 

Network of Multi-channel Interactive Media : 1인 미디어 전성시대

지금은 1인 미디어 시대. 개인방송 시청률, 공중파를 앞지르다.

 

Knockdown of Brands, Rise of Value for Money : 브랜드의 몰락, 가성비의 약진

거대 브랜드의 종말, 핵심 가치에 집중하라.

 

Ethics, on the Stage : 연극적 개념소비

가면을 쓴 착한 소비.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Year of Sustainable Cultural Ecology : 미래형 자급자족

100세 시대. 어떻게 지속적으로 잘 먹고 잘살 수 있을까?

 

Basic Instincts : 원초적 본능

B급과 비주류, 루저와 질서파괴자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파헤친다.

 

All's Well That Trends Well : 대충 빠르게, 있어 보이게

모든 것이 있어 보이는 있어빌러티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Rise of 'Architec-kids' : ‘아키텍키즈’, 체계적 육아법의 등장

체계적 육아에 팔을 겉어붙인 아키텍키즈의 설계자는 바로 30대 엄마들.

 

Society of the Like-minded : 취향 공동체

해시태그로 하나 되는 취향 공동체가 뜬다.

 


물론 예측은 예측일 뿐일 수도 있고, 프로파간다대중 유혹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보듯 유행이 될 거라는 여론을 만들어 유행을 만들어내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에드워즈 버네이즈는 "우리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사람들의 통제를 받으며 우리의 생각을 주조하고 취향을 형성하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고 말했다고 하죠. 이 책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훨씬 더 많은 트렌드가 생겨날 수도 있을 겁니다. 변화가 빠른 시기니까요.

 

그래서 저 개인적으로는 트렌드 자체에 대한 관심 외에도 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접하는 목적으로 이 시리즈를 읽곤 합니다. 같은 사회 환경에 살아가지만 수업이 만들어지는 취향의 니치(niche). 10개의 키워드를 보면 이미 제가 속해 있는 트렌드도 있는 반면 '이런 사람들도 있구나'하는 트렌드도 많아 많이 놀라곤 합니다.

 

소비 트렌드를 다룬 책이지만 본디 소비라는 것이 정치적 환경이나 사회적 환경에도 큰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과연 2016년이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바람대로 '원숭이가 구름다리를 넘듯'이 될지 아니면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겠죠. 부디 트렌드 코리아 2017서문에서는 그 바람이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글을 접하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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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6-01-04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권하는냐옹이님, 친구신청 해주셔서 감사해요.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책권하는냐옹이 2016-01-05 12:00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님 안녕하세요. 제가 더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자주 뵐게요~
 
지구촌 아름다운 거래 탐구생활 - 착한 사회를 위한 공정무역 이야기 착한 사회를 위한 탐구생활 시리즈
한수정 지음, 송하완 그림 / 파란자전거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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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판단 착오였습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공정무역 이야기니 적당한 수준에서 공정무역의 개념과 필요성을 이야기할 거라는 예상은 책을 펼침과 동시에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커피는 공정무역 영역의 대표적인 상품 중 하나입니다. 저는 커피를 무척 즐기는데다 공정무역 커피 사업을 하는 NGO 대표와도 예전부터 인연이 있어 꽤 빠른 시기에 공정무역 커피를 접했고 점차 소비를 늘려가고 있습니다. 2015년에도 참 많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 중 4월에 벌어진 네팔의 지진 소식 또한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네팔 공정무역커피를 더 자주 이용하고 있기도 하죠.

 

마침 이 책은 네팔커피농부들과 공정무역 사업을 펼치는 단체의 담당자가 쓴 책이기도 합니다. 얇지만 내용 구성과 흐름이 빼어나 주대상층인 청소년만이 아니라 공정무역이란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아주 얕은 수준으로 알고 있는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도 아주 좋은 책입니다.

 


단순히 공정무역의 필요성을 강조하기 전에 칭기즈칸, 십자군전쟁, 르네상스 시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까지 역사적 흐름을 두루 살피고, 아프리카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행한 노예사냥, 산업혁명과 제국주의를 아우르며 공정하지 않은 경제문제를 통해 공정무역의 필요성을 전달합니다. 공정무역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단순히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 공정무역의 현장에서 활동하며 체득한 경험이 더해지면서 저자의 내공까지 느낄 수 있습니다.

 

아마 이 책을 읽은 독자라면 공정무역이 단순히 우리보다 잘 못사는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인류 모두를 위한 바른 길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조가 응급조치라면 궁극적으로 자립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공정무역은 치료를 넘어 면역력을 높여주는 셈이랄까요?

 

세계공정무역기구(WFTO)와 페어트레이드인터내셔널(FI)는 공정무역을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고 합니다.

 

"공정무역은 대화와 투명성, 존중을 바탕으로 공평하고 정의로운 국제무역의 동반자가 될 것을 약속합니다. 특히 경제 발전의 혜택으로부터 소외된 저개발 국가의 생산자와 노동자들에게 더 나은 거래 조건을 제공하고 그들의 권리를 보호해, 지속 가능한 발전에 이바지합니다.“

 


저자는 공정무역의 네 가지 원칙으로 대화, 투명성, 존중, 지속가능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네 가지 원칙이 비단 공정무역에만 필요한 원칙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나라의 기업 환경에서도, 흔히 갑질로 불리는 무분별한 행동을 없애는데도 이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의 현장 경험이 많이 담겨있는 점도 책이 술술 읽히는 이유 중 하나인데요, 저자의 에피소드 중 2012년 네팔 출장이 참 인상적입니다. 저자는 짧은 출장기간에 계약을 마무리해야 했지만, 시간에 쫓기는 저자의 마음과 달리 마을주민들은 환영 행사를 열고 집으로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처음의 우려와 달리 계약은 아주 쉽게 이루어졌는데요, 주민들을 가까이에서 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농민들을 이해하게 되면서 서로가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두뇌싸움을 해야 하는 일반 계약과 달리 서로를 존중하는 계약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읽은 이어령교수의 지의 최전선이라는 책에 인상 깊은 문장이 있습니다.

 

관심, 관찰 그리고 관계. 인문학을 문사철이라고 하지만 모든 지적 프로세스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종교든 정치든, 바로 그 세 가지야.”

 

저자의 경험이야말로 관심, 관찰, 관계의 프로세스가 잘 진행된 사례라는 생각이 듭니다. 공정무역이 대한 작은 관심이 좋은 관계를 넘어 인문학적 통찰까지 연결될 수도 있는 거겠죠.

 

책을 덮은 지금 우분투(Ubuntu)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우분투는 아프리카어로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협동보다는 경쟁이 우선인 시대, 조금 느리더라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공정무역의 원칙에서, 그리고 노예사냥의 피해를 입은 아프리카에서 배웁니다. 오늘 제가 마시는 공정무역 커피 한 잔이 선한 나비효과로 되돌아오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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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차별화는 제품의 외양을 바꾸거나 기능을 몇 개 더 추가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안고 있는 문제점, 그들의 미충족 니즈를 찾아내 해결해줄 때 생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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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지의 최전선
이어령.정형모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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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김정운교수의
에디톨로지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에는 에디톨로지라는 흥미로운 개념 외에도 제 눈길을 끄는 부분이 있습니다. 김정운교수가 이어령교수를 언급한 부분인데요, 아주 조금만 옮겨보겠습니다.

 

솔직히 나는 누군가에게 지적 열등감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다. 아무리 유명한 학자를 만나도, 속으로 그 정도 생각은 나도 한다며 항상 건방을 떨었다. 그러나 이어령 선생만 만나고 나면 열등감에 풀이 죽는다. 팔십 노인에게 당할 재간이 도무지 없다.”

 

이어령교수의 디지로그를 읽었지만 디지털 기반과 아날로그 정서의 융합이라는 큰 주제 외에 세세한 내용은 먼 기억이 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책을 읽어보려는 찰나 지의 최전선이라는 신작을 발견했습니다. 디지로그10년 전에 나온 책이니 상당히 시대를 앞서 간 셈이죠. 두 책은 교집합을 이루는 소재도 있는데다, ’디지로그라는 개념을 접한 상태라면 더 많은 부분을 소화시킬 수 있을테니 두 권을 함께 읽는 것도 좋은 독서 방법인 것 같습니다.

 


지의 최전선의 경우, 어차피 한 번 읽는 것으로는 석학의 사고와 지혜를 모두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판단 아래, 막히는 부분이 있어도 일단은 끝까지 읽어본 후 다시 책을 펼쳐보자는 마음으로 책을 읽었습니다. 이어령교수와 인터뷰를 진행한 정형모기자마저도 좌우간 이 교수의 얘기를 아무리 들어도 뭔 얘기인지 어렵긴 마찬가지다라고 할 정도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와 교수가 대화를 주고받는 형태로 쓰인 책이라 제목이 주는 압박에 비하면 술술 읽히는 책입니다. 우선 상식으로 알아두기에 좋은 흥미로운 내용이 많은데다, 연관성 없어 보이는 여러 개념에서 큰 주제를 뽑아내는 이어령교수의 내공은 쉽게 비교하자면 싸구려 재료만 있는 냉장고에서 고급스럽고 맛있는 음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광경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라는 단어에서 으레 연상되는 학구적인 내용만을 다루지 않고, 우리의 일상, 기술의 변화, 정치경제사회적 사건, 역사, 국제정세 등에서 지의 최전선으로 다가가기에 더 많이 공감할 수 있습니다.

 

처음 지의 최전선은 인문학자나 지적인 것을 업으로 하는 지성인들만의 싸움인 줄 알았다. 헌데 그 전선이 바로 방역의 전선이요, 경제의 전선이요, 정치의 최전선임을 이번 메르스 사태로 깨달은 것이다. 이 글을 연재하던 그 당시보다 훨씬 더 실감하고 그 의미를 통감하게 된다.” (178p)

 


3D 프린팅 기술로 시작된 이야기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 디지로그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지고, 서에서 동으로 이동할 문명의 축이라는 주제로 확산됩니다. 여기서 이어지는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문제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 옛 지도로 보는 관점, 중국과 미국의 네트워크 전략까지 연결됩니다. 원주율(파이)로 시작한 이야기는 일리아스와 삼국지, 소설(novel)의 어원까지 넘나들며 빅데이터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합니다.

 

우리 인류 문명의 역사는 지혜의 시대가 지식의 시대로, 지식의 시대가 정보의 시대로, 정보의 시대가 데이터의 시대로 옮겨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데이터에서 태곳적 지혜로 거슬러 올라가는 U턴의 시대가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어령교수가 풀어내는, 시대를 아우르고 분야를 아우르는 지의 향연은 7대의 컴퓨터를 사용하며 에버노트에 1만개가 넘는 노트를 저장한 데이터의 힘이자, 지혜-지식-정보-데이터를 선순환 시키는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의 최전선에 다가가기 위해 갖춰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제가 뽑은 키워드는 관심, 관찰, 관계 그리고 상상입니다.

 

관심, 관찰 그리고 관계. 인문학을 문사철이라고 하지만 모든 지적 프로세스는 인문학이든 자연과학이든 종교든 정치든, 바로 그 세 가지야.” (185p)

 

책이나 도서관에 있는 것은 이미 누군가 생각한 것들, 즉 소트(thought). 과거분사지. 하지만 나는 지금 검색을 통해 싱킹(thinking)하고 있어. 싱킹은 think의 현재분사야. 질이 달라.” (188p)

 

더 중요한 것은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상상이다. 그 상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문학적 마인드다. 그것도 과거를 소트(thought)하는 인문학이 아니라 현재를 싱킹(thinking)하는 살아 있는 인문학. (199p)

 

가슴으로 느끼는 관심을 머리와 눈으로 관찰하고, 관찰한 데이터 간에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는 것. 그 관계 맺기에 필요한 것이 싱킹(thinking)인 것 같습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합성어인 디지로그역시 결국엔 관계의 문제겠죠. 지의 최전선을 읽으며, 인문학이 강조되는 시기에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인문학이 어떤 것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thought가 아닌 thinking, 단순한 앎으로 끝나는 게 아닌 시대를 읽고 미래를 상상하기 위한 인문학.

 


책 표지에 적힌 글이 흥미롭습니다.

 

인터페이스 혁명의 시대를 읽는 새로운 지문화학(geoculture)

 

지문화학(geoculture)에 대해 검색해보니, 지정학(geopolitics)을 근거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합니다. 세계체제 내에서 그 정당성이 널리 인정되는 규범과 담화 양식으로 정의하며, 체제를 통제할 수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와 같다고 합니다. 풀어낸 설명을 읽어도 그 개념이 완전히 정리되지는 않지만, 그 규범을 만들어내는 건 결국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령교수가 전하는 아래 메시지에서 우리가 왜 새로운 지문화학을 위한 지의 최전선에 있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공감하게 됩니다.

 

미래 학자들 말이 틀리는 이유 알아? 그들은 언제나 이런 세상을 만들자가 아니라 이런 세상이 온다고 말해. 하지만 미래는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그렇다고 역사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지. 그 비전이 천천히 오더라도 오늘 그것을 보여줘야 해.“ (96p)

미래 학자들 말이 틀리는 이유 알아? 그들은 언제나 이런 세상을 만들자가 아니라 이런 세상이 온다고 말해. 하지만 미래는 오는 게 아니라 만드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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