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오전, 침대를 못 벗어나고 뒹굴거리는데 택배가 왔다.

 

뭔가 했더니 여자공감단 1차 미션을 잘 끝내서 받은 선물!

 

 

 



마스다 미리 작가님 한국말 되게 잘 쓰신다.

 

 

한국말 글씨체도 뭔가 작가님스러워!

 

감사합니다 이봄:-)

 

 

 

 

그리고 들이닥친 2차 미션.........

 

 





누구에게 줘야할지 많이 고민했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나 자신에게 선물하기'를 선택한 건

 

 

나는 '나는 나를 가장 좋아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올 한 해 동안 유난히 내게 좀 벅찬 일들이 많았던 건 내가 그런 사람이어서였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이 더 행복하기를 바랐으니까.

 

그러니까 이번엔.... 1년 동안 잘 살았다고, 다음 1년도 잘 살자고 셀프토닥토닥좀 하고 싶어서.

 

 

 

 


 

 

 

 

사랑스러운 뱃지다.

 

그녀가 딸기생크림케이크를 먹을 준비를 하고 있다.

 

저렇게 소박하고 달콤한 내년이 되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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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 양양 에세이
양양 지음 / 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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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이 짧아진다.

 

가을이 짧아지는 게 슬픈 건 여름이 길어져서도, 겨울이 길어져서도 아니다.

 

가을에는 가을만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짧아지는 것 가을의 모든 것이 함께 줄어든다는 것이다.

 

 

 

 




가을의 모든 것 중 하나는, 그러니까 가을의 일부는 쓸쓸함이다.

막 춥지도, 막 덥지도 않아서 더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그런 때의 쓸쓸함.

이 삽화대로 그런 쓸쓸함은 어쩐지 풍선 같기도 하다.

가벼워서 공기 중을 떠돌아 다닐 수 있지만 그러고 보면 꽤 큰 부피를 차지하는 것.

내 숨결이 들어가야 하는 것, 조금만 불어도 금방 커져서 내 방을 가득 채울 수도 있는 것.

크게 부풀어오른 쓸쓸함은 작은 바늘에도 터질 수 있어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유를 묻자 슬픔이 시작되었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일이라면 나는 악착같이 그 편에 머무르고 싶었다.
'왜'를 생각하는 날마다 나는 울었다.
방법을 고민하자 모든 것이 지루해졌다.
춤을 어떻게 추는지 몰라서 나는 춤을 못 춰요.
이것이 내가 내뱉는 말 중에 가장 멋이 없는 말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왜'를 빼고, '어떻게'도 빼면, 남는 것은 나. 남는 것은 노래.
온전히 비어 있는 것들.
주어와 목적어가 전부인 세상을 늘 꿈에서 만난다.
나는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불순하지 않은 곳에서부터.
나는 노래한다.
노래는 흘러간다.

-61쪽





늦은 오후, 튀김집에서 해산물 튀김을 잔뜩 먹고 걸었던 바르셀로네타 해변 같다.

뾰루퉁하게 내다본 창밖, 길게 펼쳐졌던 영광 해안도로 같다.

어떤 삽화를 보면 어떤 스케치, 어떤 감정이 떠오른다.

떠올릴 만한 스케치와 감정이 많다는 건 복받은 일이다.

여행을 가는 건 스케치와 감정을 쌓아두기 위해서다.

하늘이 잔잔하고 모래가 물결치고 가로수가 야윈 수많은 풍경에서

나는 배불렀고 기분이 좋지 않았고 낯설었고 행복했다.

양양의 말대로, 생각보다 추억은 진했고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또 떠나가게 할 것이다.



 



보통의 책에서는 첫 장에서부터 작가의 이력이 나열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뭐하면서 살다가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그런 정보는 그 책의 배경을 알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어떤 때에는 그 정보만으로도 벽이 생긴다.

이 사람은 나와 달라. 이 책은 나와 달라.

특히 에세이의 종류에서는 그 벽이 큰 영향을 끼친다. 

에세이는 작가가 느낀 걸 같이 느끼기 위해서 읽는 거니까.


난 양양을 모른다. 나이도, 얼굴도, 사는 곳도.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어떤 음악을 하는지도 전혀 모른다.

그래서 알 수 있다. 그녀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공감은 어쩌면 백지에서 시작되는 걸지도 모른다.






나무 아래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만히, 나무 아래 앉아 있다, 하고 읊조려보았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하고 싶어서 나무를 찾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촘촘하게 엮여 있고, 때로 그것은 불청객 같았습니다.
한시도 우리는 서로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고요하고 싶었습니다.

-167쪽


가을이 짧아져서 슬플 때, 그 슬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을 때,

그런 때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나를 혼내지 않고도, 나를 간섭하지 않고도 나만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건 책밖에 없다.

이 책은 그래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서로를 모르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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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생물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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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딸을 둘이나 낳고 시댁의 눈치를 봤다. 딸을 하나만 낳았을 땐 괜찮았다. 그 첫째는 네 살 때 책을 줄줄 읽었고, 시댁과 친정을 통틀어 가장 기대주였다. 그런데 둘째까지 딸일 필요는 없었다. 아빠는 둘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분만실을 나갔다.

셋째는 드디어 아들이었다. 막내인 데다가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셋째는 아무것도 잘 하지 않아도 집안의 보물이 되었다. 모두가 첫째와 셋째를 사랑했다.

 

 

 

작년 소설 수업에서 자전소설 과제로 냈던 글의 일부다.

 

아들이 필요한 집의 둘째딸로 태어난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나는 누군가의 한숨으로 탄생했다.

 

모두를 실망하게 한 원인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이 조금 억울할 때도 있었다.

 

내가 여자라는 성별을 골라서 태어난 거라면 덜 억울했을까.


그러나 그건 서막이었을 뿐 이후로도 여자라서 고충을 겪는 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힘에서 밀리는 것부터, 한 달에 한 번은 끙끙 앓아야 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회적 차별까지.


그럼 다시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만약 내게 성별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봤다. 답을 내리는 건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 이건 모순적이다. 그렇게 불평불만하면서 선택권을 주면 고민도 않고 또 여자로 태어나겠다니.


과연 '여자라는 생물'은 그런 것일까.




유쾌한 밤이었어.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것 같은 발걸음으로 플랫폼 계단을 다 올라가자, 한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 다 20대 중반일까.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마주 서 있는 남자는 난감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싸우는 건가. 아니면 이별 얘기인가.

옆을 지나갈 때, 여자 쪽이 훌쩍훌쩍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런 커플을 뒤로 하고, 개찰구를 나와 성큼성큼 걸어갔다. 좀 전까지의 즐거웠던 기분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무엇에? 

좀 전에 훌쩍거리며 울던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화를 내고 있었다. 


- 55쪽

 

 

 

과연 '여자라는 생물'은 그런 것일까-의 질문에 대해 마스다 미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한다.

 

그녀와 나는 국적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연령대도 다르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나에게서 멀지 않다.

 

그녀가 들려주는 일화들이 그 점을 가르쳐준다. 

 

나의 나라, 나의 일, 나의 나이는 당신의 나라, 당신의 일, 당신의 나이와 다르지만

 

나라는 생물은 당신이라는 생물과 다르지 않다. '여자라는 생물'은 그런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일화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화까지 나지는 않지만, 어딘가 씁쓸해지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솔로라서 자유롭고 시간과 돈을 나를 위해 쓸 수 있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돼서 좋지만,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는 길에 남자 앞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지나칠 때면

 

나의 즐거움이 약간은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다. 

 

농담 몇 마디, 단 거 몇 개면 채워지는 나의 행복이란 영영 깊이를 획득할 수가 없는 가벼운 존재라고.

 

그렇다고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때의 잠깐의 씁쓸함 때문에 지금의 일상과 자유를 놓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무슨 얘기냐면, 나는 역시 답이 없는 여자라는 생물이라는 것이다.

 

말했듯이, 나는 내 할 일과 주위 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이면 충분히 행복해지는 사람이니까.

 

그런 점에서 마스다 미리는 거의 내 롤모델과 비슷하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고, 그 직업으로도 벌이가 충분하고, 결혼과 출산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게 내가 원하는 미래라서 그녀의 소박한 그림 한 컷 한 컷이 부러웠다.

 

물론 그녀도 지금에 오기까지, 아니 지금조차도 주변의 수많은 간섭과 혼자만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하여금 현재의 모습을 지킬 수밖에 없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혼담 상대 중 한 사람이 결혼상대로 내걸었던 조건이다.

'저녁은 반드시 가족이 함께 먹고 싶다.'

그것만 지켜주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가족이 모두 모인 시끌벅적한 저녁식사. 다함께 밥을 먹는 일은 분명 즐거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얘길 듣는 순간, 왠지 소름이 끼쳤다. '그것만 지켜주면?'


- 102쪽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온 가족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빠와 아이들이야 저녁 약속을 잡을 수 없다는 불편에 그치겠지만, 엄마에게는 그 이상이다.


아이가 한 명이라고 해도 인원은 셋이고, 셋 다 먹고 싶어하는 음식, 그중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음식을


매일매일 생각해야 하고 그 생각의 결과물을 만족스럽게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다함께 밥을 먹는 일은 분명 즐거울 것'이지만, 그 즐거움의 이면에는 그 식사를 위해 고민하고 장을 보고


남편과 아이들의 귀가 시간에 맞춰 요리하고 '맛있어야 할 텐데' 불안해했던 엄마의 시간들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자가 가정을 만든다는 것은 매일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을 꼬집어 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 의의가 있다.


특히나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여성성에 대한 시각이 더 보수적인 나라인데,


'그것만 지켜주면?'이라고 소름이 끼쳤다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책이 나와줘야


여자들은 (가정이 있든 없든) 카타르시스를 느낄 뿐 아니라 남자들도 더 생각할 여지를 갖게 될 것이므로.

 

여전히 여자들에게 감춰야할 것, 소리내서 말하면 안 될 존재인 '생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당신의 생리 팬티를 서랍에서 꺼내 보여줄 때의 정경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커튼 너머로 석양이 비쳤다. 작은 서랍장 앞에서 엄마는 반듯하게 앉아 있고, 나는 그 옆에서 힘없는 아기사슴처럼 서 있었다. 엄마에게 새 생리 팬티를 건네받고, 생리대 사용법을 배웠다.

 

- 113쪽

 

 

아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갱년기가 기다리고 있을 터다. 기분이 가라앉는다거나 이유 없이 울고 싶어진다거나 온몸에 땀이 난다거나.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나의 갱년기는 어떤 버전으로 찾아올지 불안하기도 하다. 초경을 맞았을 때의 불안함에는 엄마가 같이 있어주었다. 앞으로는 가까이 있는 친구와 정보를 교환하면서 극복해나가야할지도 모른다.

"폐경이 되니 이제 여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어떤 잡지에서 폐경을 맞이한 뒤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헐, 하고 놀랐다.

나도 그런 기분이 들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들지 않을 것 같다.

폐경 후, 여자가 여자가 아니게 된다면 대체 무엇이 되는 거지?

생리가 왔을 때, 열한 살의 나는 '여자가 되었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사실뿐이었다.

 

- 117-118쪽




마스다 미리는 초경 당시 소녀로서의 설레임과 불안함을 회고한 뒤 중년이 되어 폐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폐경에 대한 관점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것 중 하나다.


분명히 폐경은 준비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 신체의 변화일 뿐 


내가 여자라는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폐경이 여자가 아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초경은 여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인데,

 

초경, 즉 생리를 시작한다는 것은 여자에게 자궁이 있다는 것, 임신이 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임신은 여자가 가진 수만 가지의 능력 중 하나다. 물론 그건 아주 위대하고 엄청난 능력이다.


그러나 단지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여자라는 존재를 증명한다고 단정지어버리면

 

그 외에 여자가 가지는 여자만의 힘과 능력은 도외시하는 꼴이 아닌가.


아직 초경을 맞지 않은 어린 소녀도, 폐경을 한 중년 여성도, 여자는 모두 여자 자체로 아름답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에게 '공감'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자공감단'이라는 명칭이 좋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그녀에게 공감하는 지점이 많기 때문이다.


공감이야말로 남녀를 통틀어 인간이 가진 훌륭한 능력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이 나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므로.


마스다 미리는 나를 모르지만, 나도 그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는 작가로서, 나는 독자로서, '여자'라는 단 하나의 접점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여자공감단이 되어 받은 도서와 공감단 카드.

 

 

 

그 자전소설의 분위기는 약간 우울하게 쓰였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아주 사랑받는 둘째딸이 되었다. 

 

엄마는 아직까지 가끔 그 일에 대해 사과하시는데, 나는 굉장히 작은 미안함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정말이지 즐겁고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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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책감 문학동네 시인선 61
임경섭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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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연락 없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술도 안 마셨다는 그 애는 몇 년 전 이야기를 자꾸 꺼냈다.

 

나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들이라 별 대꾸를 할 수가 없었고, 듣고만 있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도대체 왜 하는 거야?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그 애는 대답했다. 미안하다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애가 이야기를 돌려말했던 게 아니었다. 

 

내게 그 이야기를 주절주절 하는 행위가 그 애가 할 수 있는 사과였다는 걸 내가 몰랐다.

 

사과를 하기 위해서 그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라 그 이야기 자체가 사과의 또다른 형식이었다는 거다.

 

모든 이야기는 어떤 감정, 예를 들면 미안함, 고마움 같은 것들의 본체이다.

 

 

임경섭 시인의 시집 <죄책감>에 실린 시들은 저마다 다른 종류, 다른 형식의 '죄책감'에 관한 시다.

 

한 장 한 장,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 죄책감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창밖으로

애인의 눈곱만한 시간들이 던져질 때마다

발톱 먹은 쥐가 둔갑해 나타날 거라는

해묵은 아버지의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나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이미 아버지가 많았다

 

발톱이 버려질 때마다

쥐보다 내가 더 싫다며

애인은 꼭 비명을 지르고

나는 사랑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는 핀잔이

오늘은 잉태한다고도 믿었지만

한 번도 말하지는 않았다

 

- <척, 한> 중 일부



 

'말'이 필요하지 않은 감정들이 있다. '언어'의 옷을 입고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


이 시의 화자에게는 그런 감정들이 차오르고 있다.


애인의 비명을 지르는 행위는 감정이 텅 빈 것을 들키지 않으려는 방어 기제다. 그래서 화자는 침묵을 지킨다.

 

애인이 비명을 지를 때 화자가 '말'을 하지 않는 것은 화자의 감정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감정을 지키다'니, 이 말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 추상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어떤 감정은 너무 연약하거나 점성과 밀도가 낮은 것들이라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혹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지키는 것이 아니다. 


불안이나 익숙함, 행복 같은 것들은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니까.


다만 너무 묽어져서 그 색깔이 바래고, 또는 너무 짙어져서 본래의 의미가 사라지게 될 수는 있다.


소리내어 말하지 않고 감정을 지키는 행위는 감정의 본질을 지키는 행위이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것이 감정의 본질을 지키는 일이라는 점은 다음 시에서도 잘 드러난다.




너의 무릎과 나의 무릎의 사이를 시간이라 해두고

너의 무릎과 나의 무릎의 떨림을 생각하자


(…)


관성적으로 젖혀지는 고개들, 출렁이는 저 외면들이

널 완성하고 있다 촘촘히 쌓인 외면,

그 동음이의어들 사이로

오롯이 떨고 있는 너의 무릎이 보일 때쯤

여자의 무릎이 나의 무릎에 닿았다가 떨어진다

사라진다


다시 무릎과 무릎의 사이를 시간이라 해두자

저기 무수한 간격 사이로 사라진 너를 두고

정차하면 흩어지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이제껏 떠밀려 왔다


- <베일> 중 일부




임경섭 시인 특유 '표현하지 않는 감정'의 유려함은 말 그대로 '표현하지 않을 수록' 그 깊이를 더한다.


단 네 줄의 <가을>과 심지어 단 두 줄의 <너의 장례>가 그랬다.


'표현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백을 만든다. 여백은 다시 생각을 낳는다.


<가을>의 네 행과 <너의 장례>의 두 행 아래 너른 여백은 너른 고민과 성찰을 불러들인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은 다른 감정을 끌어온다는 명제가, 이 두 시에서 성립한다.


이 두 시는 여기서 인용하지 않는다. 시집에서 직접 읽기를 권한다.


<가을>이라는 제목으로 쓸 수 있는 네 줄과 <너의 장례>라는 제목으로 쓸 수 있는 두 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이 시집을 펼친다면, 그리고 그 두 시를 만난다면 그 먹먹한 성찰이 두 배가 되지 않을까.



앞서 말한대로, 이 시집은 한 장 한 장 넘길 수록 감정을 쌓아올린다.


임경섭 시인의 언어는 뻑뻑하지 않고 부드러워서 어떤 감정이든 차곡차곡 쌓인다.


그리고 그 감정들은 맨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시, 이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한 <죄책감>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계단을 내려갔다

짐을 부리자마자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만큼 계단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곳이 계단이라 믿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눈이 쌓인 곳으로 소리도 사라졌다

길이 길이었던 곳으로

계단이 계단이었던 곳으로

우리는 내려갔다

내려가도 내리막이었다

멀리서 벼랑을 때려대는 파도는

몇천 년이고 그래왔다는 듯이

파도였다


우리는 계속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다가 우리는

우리가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을 다

해보기도 하였다


- <죄책감 -천부에서> 전문




죄책감은 '책임'을 갖는 마음이다. 책임이라는 것은 많은 감정을 담고 있다. 


사랑일 수도 있고, 동정일 수도 있고, 고마움일 수도 있고, 의무감일 수도 있고, 주체의식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책임감을 갖는다는 건 이렇게 복잡한 마음까지 책임지는 일이다.


책임은 또한 과오를 뒤돌아보는 마음과 열린 결말, 그 뒤의 가능성을 갖는다.


그때 그렇게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했더라면.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러니까 죄책감은 '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책'이 중요한 마음이다.


죄는 과거의 일이고 책임이 현재, 미래의 일이므로. '계속 계단을 내려'가는 일처럼 말이다.


우연이겠지만 이 시집이 이렇게 산뜻한 노란색인 것도 그 점을 생각하게 한다.


우중충하게, 무채색으로, 잿빛처럼 죄의식에 우울해할 일이 아니라


선명하게, 밝게, 강렬하게 책임감을 가지면 될 일이라고.


그러다 보면 '길을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별 시답잖은 생각'이 언젠가 진짜가 되지 않겠느냐고.



이제 나는 다시 그 친구를 생각한다. 맨 정신에도 더듬거리며 횡설수설하던 그 목소리.


나에게는 그 친구의 죄책감은 예쁜 노란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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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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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감았다 뜨니 여름이 지났다. 부드러운 니트와 스웨터에 손이 닿게 되는 계절이 왔다.

 

어깨에 얇은 담요를 두르고 앉은 내 앞에는 코코아 한 잔과 한 권의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의 표지를 들여다 본다. 나는 이 표지를 좋아한다.

 

오묘한 푸른색 바탕 위에 단정하게 쓰인 글씨체가 인상적이다.

 

백수린의 소설집 <폴링 인 폴>은 계절로 따지자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서 있는 책이다.

 

 

 

나는 당신의 몸을 잘 봐두었다. 옆구리에 있는 세 개의 점과 배꼽 아래쪽에 나 있는 소용돌이 모양의 털 같은 것을. 유난히 긴 팔과 굵은 발목을. 사시사철 갈라져 있는 발뒤꿈치를. 그러나 당신의 몸 역시 천천히 시간 속에서 마모되고 소멸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당신에게 남는 것은 또 무엇일까. 미처 말이 되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을 당신의 기억들일까. 불완전하기만 한 나의 기억들일까. 나는 당신을 부축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당신의 어깨가 앙상했다.

-<꽃 피는 밤이 오면>, 237쪽

 

 

 

백수린은 여름보다는 개운하고, 가을보다는 따뜻한 문장을 쓴다.

 

언어를 잃어가는 이야기를, 나의 폴을 보내는 이야기를, 여선배의 카페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후끈거리며 덥지도 않게, 으슬으슬히 서늘하지도 않게 쓴다.


내가 가장 좋아한 단편은 뜻밖에도 소설집의 가장 첫머리에 있었던 <감자의 실종>이었다.


나는 아무 일 없이 누워서 멍하니 잡생각을 하는 일을 좋아하는데, 그 잡생각 중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상념이었다. 언어를 이용해서 서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나의 전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모로 누워 벽을 보고 있었다면, '벽'은 언제부터 '벽'이 되었을까,


'벽'의 어원이 있다면 그 어원의 어원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하는, 말 그대로의 잡생각들.


그러다가, 언어가 더 발전하면서 어느 날 '벽'이 더 이상 '벽'이 아니게 되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까지 빠져드는 것이다.




나는 결코 남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개와 감자와 신념 사이에 틈이 생겼다는 사실보다 나는 더욱 두렵게 만들었던 것은 내가 더이상 남들처럼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나는 밤이 늘어났다. 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내 의도와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먼저 고개를 든다는 점이었다.

-<감자의 실종>, 21쪽



 

<감자의 실종>의 화자는 성우다. 


성우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 목소리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내 언어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언어와 깊이 맞닿아 있는 사람일 수록 언어에 대한 혼란이 올 수 있는 것은 언어가 그만큼 유동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언어는 살아 움직인다. 다만 호흡이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길기 때문에 기껏해야 백 년을

 

사는 우리는 언어의 생기 넘치는 움직임을 보지 못할 뿐이다.

 

<감자의 실종>은 언어의 움직임과 그것을 목도한 화자에 대한 이야기였고, 

 

나는 어쩐지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보다 더 반가웠다.

 

 

표제작인 <폴링 인 폴>은 <감자의 실종>가 마주하는 언어의 얼굴에서 나아가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

 

즉 소통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는 두 가지의 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하나는 폴과 폴의 아버지, 다른 하나는 폴과 화자 사이에 존재하는 소통의 부재다.


이러한 구성을 위해 선택된 장치는 폴이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그냥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의 얼굴과 미국인의 생각을 가진 재미교포라는 장치가


폴의 아버지-폴-화자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가능하게 했다.


나는 지금 '연결고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연결'이라는 말은 제외해야 옳을 것이다.


폴의 아버지와 폴 사이에는 부자 간이라고 볼 수 없는 단절이 있었고 폴과 화자 사이에는 일방적인 짝사랑,


상대방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러니까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짝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두 소통의 부재는 결국 서로 통하는 사랑의 부재다.


재미있는 지점은, 폴과 폴의 아버지 사이의 단절과 폴과 화자 사이의 단절에는 폴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폴과 폴의 아버지의 단절을 악화시킨 것은 폴이 유리코와 사랑에 빠진 일이었다.


유리코 또한 물론 화자에게도, 폴에게도, 폴의 아버지에게도 외국인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

 

화자가 고백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폴에 대한 마음을 숨겨야 했던 것도 폴이 유리코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단절은 서로 다른 결말을 갖는다.

 

폴의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유리코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든다.

 

너무나 달라져버린 한국에 대한, 이 한국에서 잠든 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삼십 년만에 흘려내고 아들의 결혼을

 

허락한 것이다. 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폴은 이승과 저승이라는 세계, 그리고 한국과 미국이라는 

 

먼 공간과 삼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초월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외부인(유리코)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화자가 폴로부터 영원히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는 해피엔딩이 누군가에게는 새드엔딩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이별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이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풀어져 있다.




"폴."

나는 또 돌아서려는 폴을 붙잡았다. 그가 천천히 뒤돌았다.

"폴, 한국 이름은 뭐야?"

내 질문에 폴이 씩 웃더니 대답했다.

"Junchan."

준찬. 폴의 부모가 그에게 준 이름에는 외국인이 구분해 발음하기 힘든 음운인 'ㅈ'과 'ㅊ'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ㅈ'과 'ㅊ'대신 원순성을 동반한 유성 파찰음 j와 무성 파찰음 ch 그리고 'ㅏ'와 'ㅐ'의 중간 발음인 'a'로 이루어진 폴의 이름을 입속으로 가만히 불러보았다. 내가 온전히 발음할 수 없고, 폴의 부모도 온전히 발음할 수 없을 그 이름, Junchan. 그라는 사람은 준찬과 Junchan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었다.

-<폴링 인 폴>, 87쪽




화자가 폴과 이별하는 방식은 폴의 한국 이름을 입속으로 불러보는 것이었다.


온전히 발음할 수 없는 이름, 앞으로도 부를 일이 없을 이름. 그 이름을 부르면서 화자는 자신 안에 있던


폴을 보냈고, 그래서 이 둘의 이별은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결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백수린의 등단작인 <거짓말 연습>에서도 언어와 소통은 커다란 메타포로 나타난다.

 

형태는 다르지만 <밤의 수족관>과 <자전거 도둑> 또한 '소통'의 문제를 끊지 않고 이어나가고 있다.


서영채 문학평론가가 해설에서도 말했듯이, "백수린의 소설들은 소통 실패에서 생겨난 병리적 증상들의


집합처로 읽히기도 한다."(266쪽)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한발 물러서" 낸 의견처럼, 어쩌면 이러한


소통의 부재에서 생겨난 증상들이 결국은 우리 삶의 본래 모습일 것이다.


꾸미지도 않고, 더 덜어내지도 않은 본연 그대로의 모습.



지금 내 앞에는 미지근하게 식은 코코아와 책 한 권이 있다.


나는 다시 이 책의 표지를 들여다본다. 나는 이 표지를 좋아한다.


잔디밭에 비가 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울창한 숲을 지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비가 그친 뒤 숲을 지나고 나면 완연한 가을이 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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