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링 인 폴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눈 감았다 뜨니 여름이 지났다. 부드러운 니트와 스웨터에 손이 닿게 되는 계절이 왔다.

 

어깨에 얇은 담요를 두르고 앉은 내 앞에는 코코아 한 잔과 한 권의 책이 있다. 

 

나는 그 책의 표지를 들여다 본다. 나는 이 표지를 좋아한다.

 

오묘한 푸른색 바탕 위에 단정하게 쓰인 글씨체가 인상적이다.

 

백수린의 소설집 <폴링 인 폴>은 계절로 따지자면 여름과 가을 사이에 서 있는 책이다.

 

 

 

나는 당신의 몸을 잘 봐두었다. 옆구리에 있는 세 개의 점과 배꼽 아래쪽에 나 있는 소용돌이 모양의 털 같은 것을. 유난히 긴 팔과 굵은 발목을. 사시사철 갈라져 있는 발뒤꿈치를. 그러나 당신의 몸 역시 천천히 시간 속에서 마모되고 소멸될 것이다. 그렇다면 내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당신에게 남는 것은 또 무엇일까. 미처 말이 되지는 못하지만 당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간직되어 있을 당신의 기억들일까. 불완전하기만 한 나의 기억들일까. 나는 당신을 부축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당신의 어깨가 앙상했다.

-<꽃 피는 밤이 오면>, 237쪽

 

 

 

백수린은 여름보다는 개운하고, 가을보다는 따뜻한 문장을 쓴다.

 

언어를 잃어가는 이야기를, 나의 폴을 보내는 이야기를, 여선배의 카페를 찾아가는 이야기를


후끈거리며 덥지도 않게, 으슬으슬히 서늘하지도 않게 쓴다.


내가 가장 좋아한 단편은 뜻밖에도 소설집의 가장 첫머리에 있었던 <감자의 실종>이었다.


나는 아무 일 없이 누워서 멍하니 잡생각을 하는 일을 좋아하는데, 그 잡생각 중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는 것은


'언어'에 대한 상념이었다. 언어를 이용해서 서사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 나의 전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모로 누워 벽을 보고 있었다면, '벽'은 언제부터 '벽'이 되었을까,


'벽'의 어원이 있다면 그 어원의 어원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하는, 말 그대로의 잡생각들.


그러다가, 언어가 더 발전하면서 어느 날 '벽'이 더 이상 '벽'이 아니게 되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에까지 빠져드는 것이다.




나는 결코 남과 다른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개와 감자와 신념 사이에 틈이 생겼다는 사실보다 나는 더욱 두렵게 만들었던 것은 내가 더이상 남들처럼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나는 밤이 늘어났다. 내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수만 있다면.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내 의도와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먼저 고개를 든다는 점이었다.

-<감자의 실종>, 21쪽



 

<감자의 실종>의 화자는 성우다. 


성우는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내 목소리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내 언어로 관객에게 전달하는 사람이다. 

 

언어와 깊이 맞닿아 있는 사람일 수록 언어에 대한 혼란이 올 수 있는 것은 언어가 그만큼 유동적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언어는 살아 움직인다. 다만 호흡이 인간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길기 때문에 기껏해야 백 년을

 

사는 우리는 언어의 생기 넘치는 움직임을 보지 못할 뿐이다.

 

<감자의 실종>은 언어의 움직임과 그것을 목도한 화자에 대한 이야기였고, 

 

나는 어쩐지 이 소설이 다른 소설들보다 더 반가웠다.

 

 

표제작인 <폴링 인 폴>은 <감자의 실종>가 마주하는 언어의 얼굴에서 나아가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

 

즉 소통에 대한 이야기다. 이 소설에는 두 가지의 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하나는 폴과 폴의 아버지, 다른 하나는 폴과 화자 사이에 존재하는 소통의 부재다.


이러한 구성을 위해 선택된 장치는 폴이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그냥 외국인이 아닌, 한국인의 얼굴과 미국인의 생각을 가진 재미교포라는 장치가


폴의 아버지-폴-화자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가능하게 했다.


나는 지금 '연결고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사실 '연결'이라는 말은 제외해야 옳을 것이다.


폴의 아버지와 폴 사이에는 부자 간이라고 볼 수 없는 단절이 있었고 폴과 화자 사이에는 일방적인 짝사랑,


상대방에게는 말할 수 없는, 그러니까 차라리 없는 게 나은 짝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두 소통의 부재는 결국 서로 통하는 사랑의 부재다.


재미있는 지점은, 폴과 폴의 아버지 사이의 단절과 폴과 화자 사이의 단절에는 폴의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폴과 폴의 아버지의 단절을 악화시킨 것은 폴이 유리코와 사랑에 빠진 일이었다.


유리코 또한 물론 화자에게도, 폴에게도, 폴의 아버지에게도 외국인이다.


심지어 한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일본인.

 

화자가 고백 한 번 해보지 못하고 폴에 대한 마음을 숨겨야 했던 것도 폴이 유리코를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단절은 서로 다른 결말을 갖는다.

 

폴의 아버지는 당신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유리코가 건넨 손수건을 받아든다.

 

너무나 달라져버린 한국에 대한, 이 한국에서 잠든 아버지에 대한 슬픔을 삼십 년만에 흘려내고 아들의 결혼을

 

허락한 것이다. 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폴은 이승과 저승이라는 세계, 그리고 한국과 미국이라는 

 

먼 공간과 삼십 년이라는 긴 시간을 초월하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외부인(유리코)를 완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화자가 폴로부터 영원히 끊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는 해피엔딩이 누군가에게는 새드엔딩이고,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이별일 수 있다는

 

아이러니는 이 소설에서 어렵지 않게 풀어져 있다.




"폴."

나는 또 돌아서려는 폴을 붙잡았다. 그가 천천히 뒤돌았다.

"폴, 한국 이름은 뭐야?"

내 질문에 폴이 씩 웃더니 대답했다.

"Junchan."

준찬. 폴의 부모가 그에게 준 이름에는 외국인이 구분해 발음하기 힘든 음운인 'ㅈ'과 'ㅊ'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ㅈ'과 'ㅊ'대신 원순성을 동반한 유성 파찰음 j와 무성 파찰음 ch 그리고 'ㅏ'와 'ㅐ'의 중간 발음인 'a'로 이루어진 폴의 이름을 입속으로 가만히 불러보았다. 내가 온전히 발음할 수 없고, 폴의 부모도 온전히 발음할 수 없을 그 이름, Junchan. 그라는 사람은 준찬과 Junchan 사이의 어딘가에 존재할 것이었다.

-<폴링 인 폴>, 87쪽




화자가 폴과 이별하는 방식은 폴의 한국 이름을 입속으로 불러보는 것이었다.


온전히 발음할 수 없는 이름, 앞으로도 부를 일이 없을 이름. 그 이름을 부르면서 화자는 자신 안에 있던


폴을 보냈고, 그래서 이 둘의 이별은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결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백수린의 등단작인 <거짓말 연습>에서도 언어와 소통은 커다란 메타포로 나타난다.

 

형태는 다르지만 <밤의 수족관>과 <자전거 도둑> 또한 '소통'의 문제를 끊지 않고 이어나가고 있다.


서영채 문학평론가가 해설에서도 말했듯이, "백수린의 소설들은 소통 실패에서 생겨난 병리적 증상들의


집합처로 읽히기도 한다."(266쪽) 그리고 바로 그 다음에 "한발 물러서" 낸 의견처럼, 어쩌면 이러한


소통의 부재에서 생겨난 증상들이 결국은 우리 삶의 본래 모습일 것이다.


꾸미지도 않고, 더 덜어내지도 않은 본연 그대로의 모습.



지금 내 앞에는 미지근하게 식은 코코아와 책 한 권이 있다.


나는 다시 이 책의 표지를 들여다본다. 나는 이 표지를 좋아한다.


잔디밭에 비가 내리는 것 같기도 하고, 울창한 숲을 지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비가 그친 뒤 숲을 지나고 나면 완연한 가을이 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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