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해서 비슷한 사람 - 양양 에세이
양양 지음 / 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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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이 짧아진다.

 

가을이 짧아지는 게 슬픈 건 여름이 길어져서도, 겨울이 길어져서도 아니다.

 

가을에는 가을만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가을이 짧아지는 것 가을의 모든 것이 함께 줄어든다는 것이다.

 

 

 

 




가을의 모든 것 중 하나는, 그러니까 가을의 일부는 쓸쓸함이다.

막 춥지도, 막 덥지도 않아서 더 나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는, 그런 때의 쓸쓸함.

이 삽화대로 그런 쓸쓸함은 어쩐지 풍선 같기도 하다.

가벼워서 공기 중을 떠돌아 다닐 수 있지만 그러고 보면 꽤 큰 부피를 차지하는 것.

내 숨결이 들어가야 하는 것, 조금만 불어도 금방 커져서 내 방을 가득 채울 수도 있는 것.

크게 부풀어오른 쓸쓸함은 작은 바늘에도 터질 수 있어서 항상 조심해야 한다.






이유를 묻자 슬픔이 시작되었다. 설명될 수 없는 것이 마음의 일이라면 나는 악착같이 그 편에 머무르고 싶었다.
'왜'를 생각하는 날마다 나는 울었다.
방법을 고민하자 모든 것이 지루해졌다.
춤을 어떻게 추는지 몰라서 나는 춤을 못 춰요.
이것이 내가 내뱉는 말 중에 가장 멋이 없는 말임을 진작 알고 있었다.
'왜'를 빼고, '어떻게'도 빼면, 남는 것은 나. 남는 것은 노래.
온전히 비어 있는 것들.
주어와 목적어가 전부인 세상을 늘 꿈에서 만난다.
나는 거기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 불순하지 않은 곳에서부터.
나는 노래한다.
노래는 흘러간다.

-61쪽





늦은 오후, 튀김집에서 해산물 튀김을 잔뜩 먹고 걸었던 바르셀로네타 해변 같다.

뾰루퉁하게 내다본 창밖, 길게 펼쳐졌던 영광 해안도로 같다.

어떤 삽화를 보면 어떤 스케치, 어떤 감정이 떠오른다.

떠올릴 만한 스케치와 감정이 많다는 건 복받은 일이다.

여행을 가는 건 스케치와 감정을 쌓아두기 위해서다.

하늘이 잔잔하고 모래가 물결치고 가로수가 야윈 수많은 풍경에서

나는 배불렀고 기분이 좋지 않았고 낯설었고 행복했다.

양양의 말대로, 생각보다 추억은 진했고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또 떠나가게 할 것이다.



 



보통의 책에서는 첫 장에서부터 작가의 이력이 나열된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서 어느 학교를 졸업했고 뭐하면서 살다가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

그런 정보는 그 책의 배경을 알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만 어떤 때에는 그 정보만으로도 벽이 생긴다.

이 사람은 나와 달라. 이 책은 나와 달라.

특히 에세이의 종류에서는 그 벽이 큰 영향을 끼친다. 

에세이는 작가가 느낀 걸 같이 느끼기 위해서 읽는 거니까.


난 양양을 모른다. 나이도, 얼굴도, 사는 곳도.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는 건 알지만, 어떤 음악을 하는지도 전혀 모른다.

그래서 알 수 있다. 그녀가 나와 비슷한 사람이라는 걸.

공감은 어쩌면 백지에서 시작되는 걸지도 모른다.






나무 아래 오래 앉아 있었습니다.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고는 가만히, 나무 아래 앉아 있다, 하고 읊조려보았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하고 싶어서 나무를 찾아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촘촘하게 엮여 있고, 때로 그것은 불청객 같았습니다.
한시도 우리는 서로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고요하고 싶었습니다.

-167쪽


가을이 짧아져서 슬플 때, 그 슬픔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을 때,

그런 때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나를 혼내지 않고도, 나를 간섭하지 않고도 나만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는 건 책밖에 없다.

이 책은 그래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고, 서로를 모르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쓸쓸해서 비슷한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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