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는 생물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엄마는 딸을 둘이나 낳고 시댁의 눈치를 봤다. 딸을 하나만 낳았을 땐 괜찮았다. 그 첫째는 네 살 때 책을 줄줄 읽었고, 시댁과 친정을 통틀어 가장 기대주였다. 그런데 둘째까지 딸일 필요는 없었다. 아빠는 둘째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분만실을 나갔다.

셋째는 드디어 아들이었다. 막내인 데다가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것만으로, 셋째는 아무것도 잘 하지 않아도 집안의 보물이 되었다. 모두가 첫째와 셋째를 사랑했다.

 

 

 

작년 소설 수업에서 자전소설 과제로 냈던 글의 일부다.

 

아들이 필요한 집의 둘째딸로 태어난 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이, 나는 누군가의 한숨으로 탄생했다.

 

모두를 실망하게 한 원인이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문제였다는 것이 조금 억울할 때도 있었다.

 

내가 여자라는 성별을 골라서 태어난 거라면 덜 억울했을까.


그러나 그건 서막이었을 뿐 이후로도 여자라서 고충을 겪는 건 한두 개가 아니었다. 


힘에서 밀리는 것부터, 한 달에 한 번은 끙끙 앓아야 하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회적 차별까지.


그럼 다시 근원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만약 내게 성별을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봤다. 답을 내리는 건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사실 이건 모순적이다. 그렇게 불평불만하면서 선택권을 주면 고민도 않고 또 여자로 태어나겠다니.


과연 '여자라는 생물'은 그런 것일까.




유쾌한 밤이었어. 콧노래라도 흥얼거릴 것 같은 발걸음으로 플랫폼 계단을 다 올라가자, 한 커플이 눈에 들어왔다.

두 사람 다 20대 중반일까. 여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마주 서 있는 남자는 난감한 얼굴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싸우는 건가. 아니면 이별 얘기인가.

옆을 지나갈 때, 여자 쪽이 훌쩍훌쩍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런 커플을 뒤로 하고, 개찰구를 나와 성큼성큼 걸어갔다. 좀 전까지의 즐거웠던 기분은 이미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나는 화를 내고 있었다.

무엇에? 

좀 전에 훌쩍거리며 울던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에 화를 내고 있었다. 


- 55쪽

 

 

 

과연 '여자라는 생물'은 그런 것일까-의 질문에 대해 마스다 미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한다.

 

그녀와 나는 국적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연령대도 다르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나에게서 멀지 않다.

 

그녀가 들려주는 일화들이 그 점을 가르쳐준다. 

 

나의 나라, 나의 일, 나의 나이는 당신의 나라, 당신의 일, 당신의 나이와 다르지만

 

나라는 생물은 당신이라는 생물과 다르지 않다. '여자라는 생물'은 그런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일화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화까지 나지는 않지만, 어딘가 씁쓸해지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나는 솔로라서 자유롭고 시간과 돈을 나를 위해 쓸 수 있고 감정에 얽매이지 않아도 돼서 좋지만,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오는 길에 남자 앞에서 울고 있는 여자를 지나칠 때면

 

나의 즐거움이 약간은 하찮게 느껴지는 것이다. 

 

농담 몇 마디, 단 거 몇 개면 채워지는 나의 행복이란 영영 깊이를 획득할 수가 없는 가벼운 존재라고.

 

그렇다고 연애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그때의 잠깐의 씁쓸함 때문에 지금의 일상과 자유를 놓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무슨 얘기냐면, 나는 역시 답이 없는 여자라는 생물이라는 것이다.

 

말했듯이, 나는 내 할 일과 주위 지인들과 맛있는 음식이면 충분히 행복해지는 사람이니까.

 

그런 점에서 마스다 미리는 거의 내 롤모델과 비슷하다.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고, 그 직업으로도 벌이가 충분하고, 결혼과 출산에 얽매이지 않는 것.

 

이게 내가 원하는 미래라서 그녀의 소박한 그림 한 컷 한 컷이 부러웠다.

 

물론 그녀도 지금에 오기까지, 아니 지금조차도 주변의 수많은 간섭과 혼자만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로 하여금 현재의 모습을 지킬 수밖에 없게 한 사람들이 있었다.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혼담 상대 중 한 사람이 결혼상대로 내걸었던 조건이다.

'저녁은 반드시 가족이 함께 먹고 싶다.'

그것만 지켜주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가족이 모두 모인 시끌벅적한 저녁식사. 다함께 밥을 먹는 일은 분명 즐거울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얘길 듣는 순간, 왠지 소름이 끼쳤다. '그것만 지켜주면?'


- 102쪽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온 가족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저녁을 함께 먹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빠와 아이들이야 저녁 약속을 잡을 수 없다는 불편에 그치겠지만, 엄마에게는 그 이상이다.


아이가 한 명이라고 해도 인원은 셋이고, 셋 다 먹고 싶어하는 음식, 그중에서 엄마가 할 수 있는 음식을


매일매일 생각해야 하고 그 생각의 결과물을 만족스럽게 내놓아야 한다는 것은 차라리 고문에 가깝다.


'다함께 밥을 먹는 일은 분명 즐거울 것'이지만, 그 즐거움의 이면에는 그 식사를 위해 고민하고 장을 보고


남편과 아이들의 귀가 시간에 맞춰 요리하고 '맛있어야 할 텐데' 불안해했던 엄마의 시간들이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여자가 가정을 만든다는 것은 매일 누군가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분을 꼬집어 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더 의의가 있다.


특히나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여성성에 대한 시각이 더 보수적인 나라인데,


'그것만 지켜주면?'이라고 소름이 끼쳤다는 말을 당당히 할 수 있는 책이 나와줘야


여자들은 (가정이 있든 없든) 카타르시스를 느낄 뿐 아니라 남자들도 더 생각할 여지를 갖게 될 것이므로.

 

여전히 여자들에게 감춰야할 것, 소리내서 말하면 안 될 존재인 '생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엄마가 당신의 생리 팬티를 서랍에서 꺼내 보여줄 때의 정경을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커튼 너머로 석양이 비쳤다. 작은 서랍장 앞에서 엄마는 반듯하게 앉아 있고, 나는 그 옆에서 힘없는 아기사슴처럼 서 있었다. 엄마에게 새 생리 팬티를 건네받고, 생리대 사용법을 배웠다.

 

- 113쪽

 

 

아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갱년기가 기다리고 있을 터다. 기분이 가라앉는다거나 이유 없이 울고 싶어진다거나 온몸에 땀이 난다거나. 간헐적으로 들어오는 정보에 나의 갱년기는 어떤 버전으로 찾아올지 불안하기도 하다. 초경을 맞았을 때의 불안함에는 엄마가 같이 있어주었다. 앞으로는 가까이 있는 친구와 정보를 교환하면서 극복해나가야할지도 모른다.

"폐경이 되니 이제 여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고 보니 어떤 잡지에서 폐경을 맞이한 뒤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여자들이 있었다.

헐, 하고 놀랐다.

나도 그런 기분이 들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들지 않을 것 같다.

폐경 후, 여자가 여자가 아니게 된다면 대체 무엇이 되는 거지?

생리가 왔을 때, 열한 살의 나는 '여자가 되었다'고는 느끼지 않았다. 거기에 있는 것은 사실뿐이었다.

 

- 117-118쪽




마스다 미리는 초경 당시 소녀로서의 설레임과 불안함을 회고한 뒤 중년이 되어 폐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폐경에 대한 관점은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하는 것 중 하나다.


분명히 폐경은 준비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내 신체의 변화일 뿐 


내가 여자라는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폐경이 여자가 아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초경은 여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인데,

 

초경, 즉 생리를 시작한다는 것은 여자에게 자궁이 있다는 것, 임신이 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임신은 여자가 가진 수만 가지의 능력 중 하나다. 물론 그건 아주 위대하고 엄청난 능력이다.


그러나 단지 임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곧 여자라는 존재를 증명한다고 단정지어버리면

 

그 외에 여자가 가지는 여자만의 힘과 능력은 도외시하는 꼴이 아닌가.


아직 초경을 맞지 않은 어린 소녀도, 폐경을 한 중년 여성도, 여자는 모두 여자 자체로 아름답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에게 '공감'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자공감단'이라는 명칭이 좋다. 


이제까지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그녀에게 공감하는 지점이 많기 때문이다.


공감이야말로 남녀를 통틀어 인간이 가진 훌륭한 능력이다.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타인이 나와 같다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므로.


마스다 미리는 나를 모르지만, 나도 그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는 작가로서, 나는 독자로서, '여자'라는 단 하나의 접점으로 공감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여자공감단이 되어 받은 도서와 공감단 카드.

 

 

 

그 자전소설의 분위기는 약간 우울하게 쓰였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아주 사랑받는 둘째딸이 되었다. 

 

엄마는 아직까지 가끔 그 일에 대해 사과하시는데, 나는 굉장히 작은 미안함으로도 충분하다.

 

나는 여자로 태어나서 정말이지 즐겁고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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