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길로

길을 통하여 세상으로 나왔고 길을 통하여 사람들과 만났다
빛과 그림자를 보았고
눈물과 한숨을 익혔다
길을 통하여 빛보다 그늘이
더 빛난다는 것을 배웠고
사람들보다 더 많은 별들이
사람들 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침내 나는 길을 통하지 않고는
꽃도 보지 못하고
열매도 따지 못하게 되었지만

나는 내가 길에 갇혀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어느 날 나는 길 밖으로 나왔다
더 많은 세상으로 나왔고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더 많은 빛과 그림자를 보았고
- P38

더 많은 눈물과 한숨을 겪었다 그리고
별들보다도 더 많은 나무와 풀이
사람들 속에서 자라고 있다는 걸 알면서
세상도 사람들도 길이 되었다
별들도 나무와 풀도 길이 되었다

그런 다음
세상을 통해서 사람들을 통해서
사람들 속에 사는 별들을 통해서
나는 다시 길로들어갔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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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어제 2심 판결 후에 산불 피해를 살피러 경북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를 만난 자리에서 어느 이재민이 뭐 하다 이제 오느냐고 일갈했다는 뉴스보도가 있었다. 또 다른 노인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모습을 뉴스 영상으로 보았다.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는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거기에 있는 모습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다른 상황이었다면 다르게 들렸을까.

어리석음이 종종 늙음의 얼굴로 온다는 것은 기필코 늙는 존재인 내게도 섬뜩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다가도 그 어리석음이 마침내 늙음에서 개화했겠나, 인생 곳곳에 만발했을 것이다. 남의 인생을 이렇게 함부로 생각하며 앉아 있다. 시국이 이래서 헛소리하는 이들을 향한 원망과 분노가 있다.
시국을 핑계로 미운 것을 마음껏 미워하며 분풀이하는 심보는 아니고? - 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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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나는 손상되었습니다.
엄중함을 엄중함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받은 상처로 사랑하는 것,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남은 상처로 손상되었고 그 일부를 일기에 담았습니다.
지난 겨울과 봄은 나름으로 삶을 가꾸며 살아도 권한을 가진 몇 사람이 작정한다면 도리 없이 휩쓸리고 뒤흔들릴 수밖에 없는 작은 존재,
내가 그것이라는 걸 실감한 국면이자 계절이었습니다.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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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코미디언이 가장 두려워하는 관객은 누구일까? 정답, 비건이다. 본인이 피곤하게 살기로 했으면 잠자코있을 것이지 왜 웃음이라는 사치를 바란단 말인가? 일단 비건이 관객으로 왔다면 웬만해서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역시 고기를 못 먹어서인지 잔뜩 예민한 얼굴을 하고와서는 웃기는커녕 얼마나 말이 많은지. 하는 농담마다 되도않는 딴지를 걸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기 일쑤다.
"방금 ‘돼지 같다‘는 표현을 쓰셨나요?"
"공연이 잘되면 치맥을 하시겠다고요?"
"동물을 펫숍(애완동물 가게)에서 샀다고 하셨나요?"
"지금 사용하시는 빨대는 일회용품인가요?"
등등 그야말로 호환마마보다 무섭다. 이런 관객을 만나면 코미디언은 준비해온 농담은커녕 내내 반성만 해도 모자라다. 차라리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킹키가 관객인게 낫다. ‘섹스가 그렇게 좋냐‘고 놀리면 되니까. 비건을 웃기려고 했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
그런데 만약 코미디언이 비건이라면? 문제는 한층 더심각해진다. 사람들은 내가 자기소개를 할 때 가장 많이 웃는다.
"비건이고 코미디언이라고요?" - P13

자기소개가 나의 가장 성공한 농담이다. 앞서 언급한 딴지도 전부 내가 한 말이다. 나는 가장 불편한 관객이며 안 웃긴 코미디언이다. 그럼에도 나는 비건으로 농담을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동료 코미디언들을 앉혀놓고 비건을 주제로 농담을 도전했다. 나는 점점 뜨거워지는데 애들은 점점 차가워져서 그 방에 기후위기가 오는 줄 알았다. 무대가 끝나자 다들 ‘미안하다‘, ‘반성하겠다‘ 하고 줄줄이 고해성사를 했다.웃음 타율이 0에 수렴했다. 연민과 반성은 코미디언으로 받을수 있는 최악의 성적이다. 비건보다 차라리 살인, 전쟁, 강간, 낙태, 납치, 나치, 정치, 근친, 기근으로 웃기는 편이 쉽다. 실제로 대부분의 코미디언이 이 주제들을 빼놓곤 농담할 거리를 찾지 못한다. 농담은 금기와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의문이 남는 일이다. 비전이야말로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금기가 아닌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보니 나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고기도 안 먹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 취미는 다도이고, 즐겨 듣는 음악은 클래식이며, 쉬는 날에는 책을 읽으며 반신욕을 하고, 심지어 직업은 작가였다. 내 모습은 영락없는 속세의 수행자였다. 어쩌다 이렇게 깨끗, 아니 ‘깩끝‘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코미디언이라는 사실 자체가 반전이었다. - P14

누가 이렇게 살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에 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면서 스님처럼 산 적이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속세에 나와 산 지가 벌써 10년이었다. 정작 출가스님이 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아빠였다. (농담이 아니다.) 마침 얼마 전 그가 출가한 지 7년만에 처음으로 재회한 일이 있었다. 식당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데 둘 중 한 명만이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그게 누구였을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스님보다 더 스님이 된 건가? 스님이 왜 고기를 먹느냐고 묻자 아빠, 아니스님, 아니 아빠, 아니 그분은 말했다. ‘현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그렇게 스님보다 현상에 집착한 지 3년이 넘었다. 그런데 애초에 현상을 무시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지구라는 현상 속에 살고, 웃음이라는 현상을 욕심내고, 우리가 과거에 내렸던 결정으로 말미암은 현재라는 현상에 산다.스님은 잘 살고 있는 걸까?
사실 나의 현상을 초래한 사건은 아주 사소하다.그냥 친구랑 밥 좀 먹으려고 그랬다. 친한 친구가 어느 날부터 비건이 된다고 하길래 걔랑 밥 먹으려면 고기를 못 먹는대서 나도 안 먹기로 한 거다. 정작 내가 뭘 먹고 뭘 먹지 않겠다는데 가장 반기를 든 것은 엄마였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졸업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 P15

관종이 되고 싶다면 비건을 강력 추천한다. 사람들의 화제의 중심에 늘 당신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재채기를 두 번연속으로 할 경우 "어머, 비건이라 감기 걸렸네", 간식을 먹을 경우 "그거 비건 맞아요?", 화를 낼 경우 "풀만 먹으니까 확실히 예민하네", 마른 경우 "고기를 안 먹으니까 빼빼 말랐잖아", 살이 찐 경우 "비건인데 왜 이래, 고기 몰래 먹는 거 아니야?" 등 비건을 대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놀라울 정도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나라가 진정 단일민족국가가 맞구나 느낄 것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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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적 시간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나나보조의 이야기가 오래전 과거를 되새기며 세상의 내력을 밝히는, 역사의신화적 전승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순환적 시간관에 따르면 이 이야기는 역사이자 예언이요, 다가올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시간이 회전하는 원이라면 역사와예언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으뜸사람의 발자국은 우리 뒤의 길에도 있고 우리 앞의 길에도 있다.
인간의 모든 힘과 약점을 지닌 채 나나보조는 최선을 다해 으뜸명령을 따랐으며 새 보금자리에 토박이가 되려고 노력했다. 그의 뒤를 따라 우리도 여전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명령은 너덜너덜해졌으며 많은 조항이 잊혔다. - P304

하지만 순환적 시간관을 입증하기라도 하듯 과학과 기술은 나나보조의 접근법을 받아들여 자연에서 설계 모형을 찾고 생체모방 설계를 활용함으로써 토착과학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땅에 대한 지식을 존중하고 땅의 수호자들을 보살핌으로써 우리는 토박이가 되어 간다.
나나보조는 길고 튼튼한 다리로 동서남북 네 방향을 누볐다. 그런데 우렁차게 노래하다가 새의 경고 울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바람에갈색곰님의 공격을 받고 말았다. 그 뒤로는 남의 영역에 접근할 때는온 세상이 제 것인 양 섣불리 들어서지 않았다. 그는 숲 가장자리에 가만히 앉아 초대를 기다렸다.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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