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코미디언이 가장 두려워하는 관객은 누구일까? 정답, 비건이다. 본인이 피곤하게 살기로 했으면 잠자코있을 것이지 왜 웃음이라는 사치를 바란단 말인가? 일단 비건이 관객으로 왔다면 웬만해서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역시 고기를 못 먹어서인지 잔뜩 예민한 얼굴을 하고와서는 웃기는커녕 얼마나 말이 많은지. 하는 농담마다 되도않는 딴지를 걸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불편하게 만들기 일쑤다.
"방금 ‘돼지 같다‘는 표현을 쓰셨나요?"
"공연이 잘되면 치맥을 하시겠다고요?"
"동물을 펫숍(애완동물 가게)에서 샀다고 하셨나요?"
"지금 사용하시는 빨대는 일회용품인가요?"
등등 그야말로 호환마마보다 무섭다. 이런 관객을 만나면 코미디언은 준비해온 농담은커녕 내내 반성만 해도 모자라다. 차라리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킹키가 관객인게 낫다. ‘섹스가 그렇게 좋냐‘고 놀리면 되니까. 비건을 웃기려고 했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
그런데 만약 코미디언이 비건이라면? 문제는 한층 더심각해진다. 사람들은 내가 자기소개를 할 때 가장 많이 웃는다.
"비건이고 코미디언이라고요?" - P13

자기소개가 나의 가장 성공한 농담이다. 앞서 언급한 딴지도 전부 내가 한 말이다. 나는 가장 불편한 관객이며 안 웃긴 코미디언이다. 그럼에도 나는 비건으로 농담을 만들고 싶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있었다. 언젠가 동료 코미디언들을 앉혀놓고 비건을 주제로 농담을 도전했다. 나는 점점 뜨거워지는데 애들은 점점 차가워져서 그 방에 기후위기가 오는 줄 알았다. 무대가 끝나자 다들 ‘미안하다‘, ‘반성하겠다‘ 하고 줄줄이 고해성사를 했다.웃음 타율이 0에 수렴했다. 연민과 반성은 코미디언으로 받을수 있는 최악의 성적이다. 비건보다 차라리 살인, 전쟁, 강간, 낙태, 납치, 나치, 정치, 근친, 기근으로 웃기는 편이 쉽다. 실제로 대부분의 코미디언이 이 주제들을 빼놓곤 농담할 거리를 찾지 못한다. 농담은 금기와 궁합이 잘 맞기 때문이다. 의문이 남는 일이다. 비전이야말로 모두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금기가 아닌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보니 나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고기도 안 먹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 취미는 다도이고, 즐겨 듣는 음악은 클래식이며, 쉬는 날에는 책을 읽으며 반신욕을 하고, 심지어 직업은 작가였다. 내 모습은 영락없는 속세의 수행자였다. 어쩌다 이렇게 깨끗, 아니 ‘깩끝‘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내가 코미디언이라는 사실 자체가 반전이었다. - P14

누가 이렇게 살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어릴 적에 절에서 행자 생활을 하면서 스님처럼 산 적이 있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속세에 나와 산 지가 벌써 10년이었다. 정작 출가스님이 된 건 내가 아니라 우리 아빠였다. (농담이 아니다.) 마침 얼마 전 그가 출가한 지 7년만에 처음으로 재회한 일이 있었다. 식당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데 둘 중 한 명만이 열심히 고기를 먹었다. 그게 누구였을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스님보다 더 스님이 된 건가? 스님이 왜 고기를 먹느냐고 묻자 아빠, 아니스님, 아니 아빠, 아니 그분은 말했다. ‘현상‘에 집착하지 말라고.
그렇게 스님보다 현상에 집착한 지 3년이 넘었다. 그런데 애초에 현상을 무시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우리는 지구라는 현상 속에 살고, 웃음이라는 현상을 욕심내고, 우리가 과거에 내렸던 결정으로 말미암은 현재라는 현상에 산다.스님은 잘 살고 있는 걸까?
사실 나의 현상을 초래한 사건은 아주 사소하다.그냥 친구랑 밥 좀 먹으려고 그랬다. 친한 친구가 어느 날부터 비건이 된다고 하길래 걔랑 밥 먹으려면 고기를 못 먹는대서 나도 안 먹기로 한 거다. 정작 내가 뭘 먹고 뭘 먹지 않겠다는데 가장 반기를 든 것은 엄마였다.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을 졸업한 지가 10년이 넘었는데도 말이다.  - P15

관종이 되고 싶다면 비건을 강력 추천한다. 사람들의 화제의 중심에 늘 당신이 있을 것이다. 당신이 재채기를 두 번연속으로 할 경우 "어머, 비건이라 감기 걸렸네", 간식을 먹을 경우 "그거 비건 맞아요?", 화를 낼 경우 "풀만 먹으니까 확실히 예민하네", 마른 경우 "고기를 안 먹으니까 빼빼 말랐잖아", 살이 찐 경우 "비건인데 왜 이래, 고기 몰래 먹는 거 아니야?" 등 비건을 대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놀라울 정도의 통일성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나라가 진정 단일민족국가가 맞구나 느낄 것이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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