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심
고은채 지음 / 답(도서출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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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 이상의 작품들을 접한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동시대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는 다르게 독특한 문장이나 표현법들은 '난해하다'라는 첫인상을 안겨줬으니 말이다. 까마귀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 시선을 그리고 있는 『오감도』는 13의 아해들을 반복적으로 부르고 있었고, 고교과정을 거친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접한 『날개』에서도 세상 무기력한 주인공의 모습들은 작품을 접하는 내내 혼란스러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의 작품이 내게는 그리 좋은 인상에 남지 않았지만, 고은채 작가에게는 그의 작품이 굉장히 인상깊었나보다.
  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에 '박제가 된 천재' 이야기를 듣던 고은채 작가는 그 문장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그는 그 문장을 바탕으로 ≪연심≫이라는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연심≫은 이상의 『날개』의 장면들을 연상시키게 한다. 『날개』를 오마주한 듯한 문장들도 여럿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이상의 『날개』 속 박제가 된 천재에 집중했던 것을 뒤집어버려 ≪연심≫에서는 큰 방에서 생활하는 아내의 삶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마치 심은휘라는 여자는 애당초 그 모습으로 박제가 된 사람이었던 것처럼. 언젠가 누군가에게 보이며 말하고 싶었다. 박제가 된 여인을 아시오? 그럴 때, 연애까지가 유쾌했소. _p.202

  1930년,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던 시대. 갓 학교를 졸업한 은휘는 평소 동경하던 언니들처럼 꾸며 입고 카페에 앉아 커피와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재우와 마주치게 된다. 자신을 대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철학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재우에게 은휘는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고, 이내 은휘의 풋내음나는 첫사랑이 시작된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의고 과묵하신 아버지와 망나니 오빠 심차상 밑에서 자란 은휘는 재우의 따뜻함에 더욱 빠지게 된다.
  한편, 아버지는 은휘를 심차상의 친구인 박동빈과의 결혼시키려고 한다. 평소 박동빈을 좋게 보지 않았던 은휘는 재우와 결혼하기 위해 집을 나온다.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모든 일들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은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게 된다. 재우는 은휘를 위로하면서 그녀에게 웃음을 다시 선사하려고 하지만, 그가 다니던 언론이 일본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된다. 재우가 경찰서에 끌려 다녀온 뒤로, 은휘는 집 안의 가장이 되어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은휘(恩輝)라는 이름도 참 좋지만, 나는 당신을 이렇게 부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건네준 수줍은 쪽지에 적혀 있었다. 연심(戀心), 사랑하는 마음, 또는 그리운 이. 이렇게 읽든 저렇게 읽든 아름다운 말이었다. 내가 그대를 이렇게나 연모한다는 절절한 새벽을 눌러쓴 사내의 연서였다. 부족한 잉크 대신 거친 흑연을 날카롭게 깎아 노트 한 귀퉁이를 찢어서 쓴 연심이라는 글자에 하루  온종일이 기뻤다. _p.27

 

 

 

  작은 방 문을 살짝 열면 보이는 발바닥. 고문을 당하고 돌아온 흉터 투성이의 발바닥의 주인인 재우는 『날개』 속 박제가 된 천재와 닮아있다. 늘상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그가 하는 일이라곤,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휴지 몇 장을 태우는 일. 고문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어에 능통하고 언론사에서 일할 정도로 엘리트였던 그였다. 이제 그는 작은 방에 박제되어 늘 똑같은 일상을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열심히 사모했던 은휘는 33번지 유곽에서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의 『날개』 속에서 그는 항상 남편에게 아스피린과 아달린을 먹이고, 자신이 일하는 시간에는 작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은휘 역시 박동빈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재우에게 그런 행동을 보인다. 

"……왜 나갔다 왔어요? 어딜 다녀왔기에 밤이 되어서 들어와요.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이유로요."
"돈."
"응?"
"저금통에 당신이 모아준 돈을 써보고 싶었어."
_p.196

  이상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작품이어서 그랬을까. ≪연심≫을 읽는 내내, 이상의 작품을 지울 수는 없었다. 워낙 내게도 강한 임팩트로(물론, 작가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 작품이었기에,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에 대한 설정과 『날개』 속 경성 미스꼬시 옥상, 정오 사이렌, 날개 등의 클리셰들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으니 이상의 작품이 고스란히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내가 처음 이 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제목에서 오던 서정적인 느낌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연애, 사랑 등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책이었지만,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그에 대한 서정적인 느낌이 오히려 반감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설정이나 개연성에서는 조금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연심≫이 서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은채 작가만의 문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연심≫을 창작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고은채 작가의 문체는 굉장히 자세한 묘사와 함께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은유적 표현이 눈에 두드러진다. 처녀작인 ≪연심≫에서 이 정도니, 앞으로 더 다듬어진 문장은 어떤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낼지 기대됐다. 이상의 클리셰를 지우고 고은채만의 클리셰를 만든다면, 아마 더욱 인상깊고 서정적인 소설을 써내지 않을까. 훗날, 그녀의 차기작이 나오게 되는 때가 매우 기대된다.

  어쩌면 우리는 말이에요, 발이 맞지 않아서 서로를 지독히 괴롭혔던 절름발이인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제 편안히 걸으세요. 그리고 우리의 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절대로, 절대로 만나지 맙시다. 사랑하는 나의 날개.
  나, 이럴 때 연애까지가 유쾌했어요.
_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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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인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9
기예르모 델 토로 외 지음, 조영학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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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뱀파이어에 대해 상상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햇빛이 드리워지지 않는 검은 암막 커텐을 친 방에 놓인 관 속에서 긴 검은 망토를 두르고 창백한 얼굴과 뾰족한 송곳니를 내세우고 있는 모습이 가장 먼저 연상될 것이다.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오자면, 소설 ≪트와일라잇≫의 뱀파이어 에드워드처럼 백옥같다 못해 창백한 피부와 미남형 얼굴을 가진 섹시한 이미지를 연상할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동안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본 뱀파이어는 보통의 사람들처럼 살아 있는 무언가로 그려지고 있던 셈이다.

  ≪스트레인≫은 뉴욕 JFK 공항에 여객기 한 대가 불시착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관제탑과 착륙에 대해 통신하던 중, 돌연 여객기와의 통신이 끊기게 된다. 모든 창문의 햇빛 가리개가 내려져 있었고,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듯이 비행기 주변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질병관리센터에서 일하는 에프는 급히 공항으로 달려 갔고 비행기 안을 수색하기 시작한다. 비행기 안 승객들은 4명의 생존자만을 제외하고 모두가 마치 잠든 것처럼 죽어 있었다. 에프는 시체들에게서 사후 경직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알아차리고, 그들의 죽음이 석연치 않음을 느낀다. 에프와 그의 팀들은 사망자들과 4명의 생존자들로부터 알 수 없는 전염병이 퍼졌을 것이라고 짐작하며 사건의 진실에 대해 샅샅이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 빌어먹을 개기일식인지 엄폐인지가 빨리 끝나, 다시는 이런 기분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확신하고 싶었다. 그녀는 색안경을 통해, 암흑의 승리를 거두고 의기양양해하는 살인마 달을 올려다 보았다. 문득 다시는 해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_p.128

 

 

 

 

  영화감독이자 ≪스트레인≫의 저자인 기예르모 델 토로는 뱀파이어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동안의 뱀파이어들은 보통의 사람들처럼 살아 있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면, 기예르모 델 토로가 만든 뱀파이어들은 마치 어떤 전염병에 의해서 감염된 것마냥 행동한다. 일정 순간이 지나 뱀파이어로서의 각성 상태가 되면, 그들은 의식도 없이 본능에만 충실하여 움직이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도 이성적인 생각을 할 수 있어 보이는 고전의 뱀파이어들과는 달리, 아무 생각도 없이 심장 소리에 반응하는 모습은 마치 '좀비'를 떠올리게 한다. ≪스트레인 1≫에서는 뱀파이어가 목덜미를 물어 흡혈하는 장면이 아닌, 목과 같은 곳에서 거머리가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알던 뱀파이어와는 전혀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2권에서 마스터 뱀파이어가 등장한다면, 판이 뒤집힐 수도 있을 것 같다.
  한 편, 기예르모 델 토로는 ≪스트레인≫을 통해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아픔인 9.11테러를 형상화한다. 뱀파이어의 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도시 전역이 마비 되는 과정은 마치 9.11테러 당시의 비극을 그려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일이면 저들은 각자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게다가 신나게 떠벌릴 얘깃거리까지 생기지 않았는가.
  열두 살짜리 우리 조카애가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어……
  열두 살짜리 내 사촌이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거든……
  우리 옆집 열두 살짜리 여자애가 그 비행기에 탔더라고……
 _p.246

 

 

 

  ≪스트레인≫을 읽는 내내, 뛰어난 묘사력이 굉장히 눈에 띄었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영화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어서일까, ≪스트레인≫을 읽으면서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미국에서 2014년에 동명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좀비물'을 괜찮게 보는지라, 아마 소설을 다 읽은 뒤 기회가 된다면 드라마까지 보지 않을까 싶다.) 장을 넘길 때마다 스릴감 있고 속도감 있는 문체들로 하여금 금방 읽을 수 있었던 소설이었다. 특이하게도 8 챕터로 크게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에서도 공간별로 내용을 전개하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마치 시나리오를 읽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기도 했다.
  2권이 되면 진짜 뱀파이어가 등장할 것 같은데, 우리가 평소에 알던 뱀파이어와는 얼마나 이미지가 매치될지 궁금하다. 기회가 된다면, 델 토로의 뱀파이어 3부작을 다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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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
가도이 요시노부 지음, 임경화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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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 역사소설은 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픽션과 논픽션이 결합되어 전개되거나, 또는 역사적 배경 속에 한 인물을 넣어 인물의 경험들을 나열한다. ≪이에야스,에도를 세우다≫는 역사적 인물에게 집중해 그가 남긴 업적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된 소설이다. 가노이 요시노부 작가는 일본의 에도 막부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업적을 5개의 파트로 구분하여 전개한다. 
  일본 통일을 이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간토 8주의 땅을 하사한다. 그러나 이는 히데요시 자신을 제외하면 일본 최고의 다이묘인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어 간토 8주로 이동하게 된다. 이에야스는 모두가 비운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간토 8주를 자신의 기반으로 다지고자 한다.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이에야스는 각 분야의 여러 전문가들을 고용해 '에도'를 세운다.

  '무궁한 발전의 여지가 있는 땅.'
  일본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과 쌀과 흙과 돈을 투입한 거대한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그 대모험의 결과가 지금 순백의 지붕 너머로 눈 아래 펼쳐져 있었다.
  '내 도시다.'
  이에야스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_p.360

 

  ≪이에야스,에도를 세우다≫는 굉장히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에야스의 인물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계획을 시행하기 위해 동원된 인물들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이에야스의 큰 뜻을 실현하는 데에 동원된 인물들은 모두 이에야스의 목표를 위해 일을 시작하지만 결국 그것이 자신 일생의 큰 목표인 것처럼 열심히 노력한다. <제1화 강줄기를 바꾸다> 에서는 다다쓰구와 그의 자손들(3대에 걸친 작업)이, <제2화 화폐를 주조하다>에선 쇼자부로, <제3화 식수를 끌어오다> 에서는 도고로, 로쿠리로, 그리고 기스가, <제4화 석벽을 쌓다>에서는 고헤이, 기산타, 마지막 <제5화 천수각을 쌓다> 에서는 이에야스의 아들인 히데타다가 눈에 띈다. 이들 모두가 이에야스의 뜻을 알아차리고 그에 부합하는 결과를 얻어내고자 한 것 자체가 에도 시대를 열기 위한 큰 공이었다.

  한 편, ≪이에야스,에도를 세우다≫를 읽다보면 이에야스의 계획들은 대부분 한 시대를 평정한 왕들과 비슷해 보인다. 전쟁이 없던 평화로운 에도 막부 시대를 세운 이에야스의 모습은 마치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과 비슷해 보인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하고, 수로를 설치하고, 화폐를 통일한 것처럼 이에야스는 에도성의 성벽을 쌓고, 식수를 끌어오기 위해 지하수로를 설치했으며 독자적으로 화폐를 제조하여 통일했다. 그 역시 일본을 완전히 장악하고 통일하기 위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에야스의 큰 야심이 아니었더라면, 그는 일본을 평화의 시대로 만들 수 있었을까. 

  히데타다의 단순한 무용론보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과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검은색이 땅의 색, 더러움의 색, 사육을 탐내는 까마귀떼의 색, 전쟁의 색이라면 흰색은 '평화'의 색이다. 부정하지 않은 색. 태양빛을 연상시키는 재생의 색. 이 세상의 모든 색을 품는 색. 그런 색을 에도성의 천수각이라는 상징적인 건물에 채택함으로써 천하의 만백성에게,
  '전쟁은 끝났다.'
   그 사실을 이에야스는 드높이 선언한 것이다.
_p.364

  에도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쓰네가와 고타로의 ≪금색기계≫를 읽고 '에도시대'의 시작에 대해 궁금했었다. 그 궁금증을 ≪이에야스, 에도를 세우다≫를 통해 흥미롭고 재밌게 해결한 것 같다. 일본 역사를 잘은 알지 못해 어디까지가 픽션이고, 어디까지가 논픽션인지는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그것을 구분할 수 없어 소설과 역사적 사실을 넘나들며 흥미롭게 읽었던 것 같다.
  또한, 이에야스의 인물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다. 에도 시대 이전까지만 해도 도요토미 가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를 마냥 배신의 인물로 인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마냥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는데에만 치중했더라면 그렇게 평화로운 시대가 지속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 이면에는 그가 드러내지 못한 생각이 또 숨어 있지는 않았을까.

  "나머지 반은 미래가 아니고 과거다."
  "과거요?"
  " 흰색은 탄생의 색일 뿐만 아니라 죽음의 색이기도 하다,"
  이에야스는 감상적인 말투로 말했다.
  죽은 사람의 피부는 창백하다. 해골을 백골이다. 성불하지 못한 혼이 이 세상에 떠도는 이른바 영혼이나 원령도 흰 옷을 입고 있다. 흰색은 모든 색을 품는 색인 동시에 모든 색을 잃은 색이기도 하다.
 "흰색은 죽음의 색…."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그것을 덕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건  무수히 죽은 사람들 덕분이니까."
_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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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의 키스 푸른도서관 80
유순희 지음 / 푸른책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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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타인을 열정적으로 좋아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좋아서 왜 좋은지 특별한 이유를 댈 수 없을 만큼. 특히나 이성에 눈을 뜨는 10대때는 유독 그런 경험들이 자주 일어난다. 나도 그랬다. 내가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건 아이돌 가수였다. 흔히들 부르는 '안방수니(TV로만 아이돌을 응원하는 팬)'에 그쳤지만 그래도 그 시절, 아이돌은 내 모든 것이었다. MP3를 이용해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잡지 등을 통해 그들의 사진을 모으는 등 아이돌은 나의 생활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세 번의 키스≫에는 나의 10대처럼 아이돌을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10대 소녀들이 등장한다. 육아에 지친 엄마와 세 동생들에게 치여 피곤함을 느끼던 소라는 현아의 제안으로 방송국에 아이돌 '블랙'을 보러 간다. 영어 단어를 외우며 블랙이 등장하기만을 기다리던 소라는, 블랙의 멤버인 시준을 보고 익숙함을 느낀다.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던 중, 소라는 유년시절 상파울루에서 머물면서 한인교회에서 자신을 챙겨주던 오빠였음을 깨닫는다. 시준과의 추억을 회상하던 소라는 그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그의 뒤를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소라와 현아, 그리고 마녀라는 닉네임으로 불리는 또 한 명의 소라는 흔히 말하는 '사생팬'이다. 유순희 작가는 어렸을 적, 자신이 만난 극성팬이었던 친구의 마음을 알고 싶은 마음에서 ≪세 번의 키스≫를 집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세 번의 키스≫는 사생팬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타인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큰 나머지 자신을 잊어가는 청소년들의 마음을 어루어 만져준다.
  유순희 작가는 언론에서 접했던 사생팬의 모습들을 ≪세 번의 키스≫에 자세하게 녹여낸다. 세 소녀들은 숙소 앞에서 스케줄이 끝난 가수들을 기다리는 것은 물론이고, 숙소 비밀번호를 알아내 밤에 몰래 찾아 들어가기도 하며 택시 타고 그들의 밴을 따라 간다거나 얼굴을 한 번 보겠다는 이유로 일부러 사고를 내기도 한다. 소설 속의 모습만이 아니라 실제 있는 일들이라고 생각하니 읽는 내내 소름이 돋기도 했다.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상관없으나 상대방이 그것을 싫어한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유순히 작가는 사생팬의 심각성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팬지는 원래 꽃잎이 흰색이었는데, 지상에 내려온 큐피드가 너무 예뻐서 뚫어지게 쳐다보다 키스를 했대. 그러자 꽃잎이 노랗게 물들었지. 두 번째 키스를 하자 자줏빛으로 물들었고, 세 번째 키스를 하자 보라색으로 물들었대. 그래서 흰색이었던 꽃잎은 세 개의 빛깔이 한데 모인 지금의 팬지가 되었다는 거야. 팬지는 세 번의 키스로 신비롭고 특별한 꽃이 된 거지. _p.58

  유순희 작가는 팬지를 통해서 세 소녀들을 빗대어 보여준다. 팬지의 꽃말이 '나를 생각해주세요'다.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 그들 곁에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짝사랑을 하는 소녀들의 모습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적절한 꽃이다. '우리 오빠가 나를 생각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환상 속에 놓인 소녀들의 모습은 수줍은 팬지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순희 작가는 팬지를 통해서 또 다른 메세지를 전한다. '나'를 생각해주세요. 짝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갈구하다 점점 잊혀지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자각할 수 있도록 말이다. 여린 그들의 마음이 상대방에게 거절당해 좌절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먼저 생각해야 된다고.

  예전에 나는 누군가 세 번의 키스로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를 바랐어. 그런데 세 번의 키스는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해 주어야 하는 거더라.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세 번의 키스를 해 주는 거야. 특별해지라고, 아름다워지라고, 신비로워지라고…. _p.172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이 소설은 굉장히 울림있게 다가온다. 타인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우리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는지…. 아직은 여리고 여린 청소년들을 유순희 작가는 그렇게 사랑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특별합니다. 아름답습니다. 신비롭습니다. 여러분이 이 진실을 굳게 믿어 주길 바랍니다. 그래서 좌절했던 자리에서 다시, 수치를 겪었던 자리에서 다시, 비웃음을 날렷던 자리에서 다시, 존엄한 인간으로 우뚝 일어서 주길 바랍니다. 꽃과 나무를 가지치기하며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의 손길처럼 이 사회의 상처를 치료하고, 슬픔을 위로하고, 고통을 함께하는 품격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_p.180 작가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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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마디를 행운에 맡기지 마라 - ‘대통령의 통역사’가 들려주는 품격 있는 소통의 기술
최정화 지음 / 리더스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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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는 항상 어떻게 입을 열어야 할지 고민한다. 그 고민에 깊이 빠지면 쉽게 입을 열지 못하고 그저 웃는 것으로 그 상황을 넘기려고 한다. 그러다 간혹 운 좋게 입이 트이게 되면, 그 흐름이 끊기지 않게 끊임없이 말하려고 노력한다. 만남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오늘 나는 제대로 말한 걸까? 혹시나 나도 모르게 실수해서 상대방에게 내 이미지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은 아닐까?" 상대방과 진정한 소통을 했는지 의심하며 나는 항상 내 첫마디를 행운에 맡겼다.
  ≪첫마디를 행운에 맡기지 마라≫의 저자 최정화는 전두환 대통령부터 노무현 대통령까지 역대 대통령 5인의 정상회담 통역사였다. 그녀는 2,000회 이상 국제회의에 참석한 경험을 바탕으로 '격 있는 말하기'를 할 수 있는 소통의 기술들을 독자들에게 전해준다. 그녀가 만났던 수많은 고위급 정상들이나 유명 인사들과의 일화들을 통해 알 수 있는 실용적인 스피치 노하우들은 격 있는 자리에서는 물론 일상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첫마디를 행운에 맡기지 마라≫ 속에는 저자 최정화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통(通)하는 스피치 노하우들이 다양하게 들어 있다. 그 일화들을 읽으면서 그동안 나의 대화 방식에 대해 되돌아 보았다. 역시나 나는 '격 있는 말하기'로부터는 많이 멀어져 있던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격 있는 말하기'를 실천하기 위해 내가 보완해야 될 점들을 찾아 적어내려 가기 시작했다.

1) 말의 본질은 '메세지'에 있다.
  목적에 맞게 말하는 것은 현대인이 갖추어야 할 필수 자질이기도 하다.
  "말하기는 '스킬'이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아는 것이고 그것을 전하는 일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바로 알아야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이 나온다." _p.49
  상대방과 대화 중에 내가 입이 트였을 때, 나는 간혹 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파악하지 못한 채 말한다. 스스로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는데 상대방은 오죽했을까. 내 이야기에 동조하고는 있지만,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는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졌다. 

2) 첫마디에 신경 써라.
  사람들은 만나다보면, 첫인상에 신경을 쓴다. 깔끔한 이미지를 위해 단정한 옷을 차려 입거나 외적인 컴플렉스를 가리기 위해 공들여 화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만나자마자 느껴지는 오라(aura), 이미지, 외모보다 1시간 이상 대화를 나눈 후에 갖게 되는 인상이 진짜 인상이라고 할 수 있다.(p.54)  그래서 첫마디를 어떻게 떼느냐에 따라 상대방에게 나의 대한 인상이 정해질 수 있다. 아마 여기까지는 '좋은 첫인상'을 염두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문장에는 꽂히지 말아야 한다. '꼭 이 문장을 넣어야 해'라는 강박이 생기면, 거기에만 얽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특별한 문장에 꽂혀 있지 않았나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문장에 꽂히면 그 문장을 꼭 써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나보다. 굳이 그 문장이 아니어도 자연스럽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할 문장들은 충분히 많음에도 말이다.

3) 상대방 눈높이에 맞춘 소통을 해라.
  진정한 어른은 상대를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 둘 줄 안다. 그가 나와 같은 선상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 마음이 열리고 말이 통한다. 상대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이 무릎을 굽히거나, 그의 발밑에 받침대 몇 개 정도는 놓아둘 줄 아는 어른의 소통이 더욱 절실한 오늘이다. _p.139
  나는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을 얼마나 배려하고 있을까. 간혹 타인과 대화를 하다보면,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하는 말의 핵심들을 생략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을 당시에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낀다. 모든 잘못은 나에게 있음에도 말이다.
  상대방과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방에 대해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고, 그와 눈높이를 맞추며 대화하다보면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통할 것이다. 왜 나는 '상대방'이 아닌 '나'에게 초점을 맞추어 대화하고 있었을까.

 

 

 

 

 

  ≪첫마디를 행운에 맡기지 마라≫ 속에 녹아 있는 저자 최정화만의 실용적인 스피치 노하우들은 결국 품격 있는 소통의 기술들이었다. 나의 입을 통해서 나오는 말들이라고 해서 오로지 '나의 언어'인 것은 아니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이상이 필요하다. '나의 언어'가 곧 '너의 언어'이고 '너의 언어'가 곧 '나의 언어'임을 생각한다면, 언제든지 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품격 있는 소통이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겠다는 신념에서 오롯이 배어 나오는 향기가 있다. 이런 향기를 지닌 사람은 스치기만 해도 뒤돌아보게 만든다. 서로가 서로를 소중히 여긴다는 마음만 충분히 전해도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그리고 우리 삶이 한층 더 향기로운 품격으로 가득할 것 같다. _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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