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심
고은채 지음 / 답(도서출판)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 이상의 작품들을 접한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동시대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는 다르게 독특한 문장이나 표현법들은 '난해하다'라는 첫인상을 안겨줬으니 말이다. 까마귀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 시선을 그리고 있는 『오감도』는 13의 아해들을 반복적으로 부르고 있었고, 고교과정을 거친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접한 『날개』에서도 세상 무기력한 주인공의 모습들은 작품을 접하는 내내 혼란스러움을 안겨주고 있었다. 그의 작품이 내게는 그리 좋은 인상에 남지 않았지만, 고은채 작가에게는 그의 작품이 굉장히 인상깊었나보다.
  고등학교 문학 수업 시간에 '박제가 된 천재' 이야기를 듣던 고은채 작가는 그 문장을 적어 놓았다고 한다. 그는 그 문장을 바탕으로 ≪연심≫이라는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연심≫은 이상의 『날개』의 장면들을 연상시키게 한다. 『날개』를 오마주한 듯한 문장들도 여럿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이상의 『날개』 속 박제가 된 천재에 집중했던 것을 뒤집어버려 ≪연심≫에서는 큰 방에서 생활하는 아내의 삶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마치 심은휘라는 여자는 애당초 그 모습으로 박제가 된 사람이었던 것처럼. 언젠가 누군가에게 보이며 말하고 싶었다. 박제가 된 여인을 아시오? 그럴 때, 연애까지가 유쾌했소. _p.202

  1930년, 자유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던 시대. 갓 학교를 졸업한 은휘는 평소 동경하던 언니들처럼 꾸며 입고 카페에 앉아 커피와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재우와 마주치게 된다. 자신을 대하는 다른 남자들과는 달리, 철학과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던 재우에게 은휘는 마음이 끌리기 시작했고, 이내 은휘의 풋내음나는 첫사랑이 시작된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의고 과묵하신 아버지와 망나니 오빠 심차상 밑에서 자란 은휘는 재우의 따뜻함에 더욱 빠지게 된다.
  한편, 아버지는 은휘를 심차상의 친구인 박동빈과의 결혼시키려고 한다. 평소 박동빈을 좋게 보지 않았던 은휘는 재우와 결혼하기 위해 집을 나온다. 가난하지만 사랑으로 모든 일들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은휘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소식을 듣게 된다. 재우는 은휘를 위로하면서 그녀에게 웃음을 다시 선사하려고 하지만, 그가 다니던 언론이 일본 정부에 의해 탄압을 받게 된다. 재우가 경찰서에 끌려 다녀온 뒤로, 은휘는 집 안의 가장이 되어 생계를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은휘(恩輝)라는 이름도 참 좋지만, 나는 당신을 이렇게 부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건네준 수줍은 쪽지에 적혀 있었다. 연심(戀心), 사랑하는 마음, 또는 그리운 이. 이렇게 읽든 저렇게 읽든 아름다운 말이었다. 내가 그대를 이렇게나 연모한다는 절절한 새벽을 눌러쓴 사내의 연서였다. 부족한 잉크 대신 거친 흑연을 날카롭게 깎아 노트 한 귀퉁이를 찢어서 쓴 연심이라는 글자에 하루  온종일이 기뻤다. _p.27

 

 

 

  작은 방 문을 살짝 열면 보이는 발바닥. 고문을 당하고 돌아온 흉터 투성이의 발바닥의 주인인 재우는 『날개』 속 박제가 된 천재와 닮아있다. 늘상 무기력하게 누워 있다가 그가 하는 일이라곤, 돋보기로 햇빛을 모아 휴지 몇 장을 태우는 일. 고문을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영어에 능통하고 언론사에서 일할 정도로 엘리트였던 그였다. 이제 그는 작은 방에 박제되어 늘 똑같은 일상을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열심히 사모했던 은휘는 33번지 유곽에서 일하는 여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의 『날개』 속에서 그는 항상 남편에게 아스피린과 아달린을 먹이고, 자신이 일하는 시간에는 작은 방에서 나오지 못하게 했다. 은휘 역시 박동빈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재우에게 그런 행동을 보인다. 

"……왜 나갔다 왔어요? 어딜 다녀왔기에 밤이 되어서 들어와요.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이유로요."
"돈."
"응?"
"저금통에 당신이 모아준 돈을 써보고 싶었어."
_p.196

  이상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창작한 작품이어서 그랬을까. ≪연심≫을 읽는 내내, 이상의 작품을 지울 수는 없었다. 워낙 내게도 강한 임팩트로(물론, 작가와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 작품이었기에,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에 대한 설정과 『날개』 속 경성 미스꼬시 옥상, 정오 사이렌, 날개 등의 클리셰들을 그대로 내비치고 있으니 이상의 작품이 고스란히 떠오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내가 처음 이 책을 만나게 되었을 때, 제목에서 오던 서정적인 느낌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연애, 사랑 등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던 책이었지만,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그에 대한 서정적인 느낌이 오히려 반감되어 가는 느낌이었다. 설정이나 개연성에서는 조금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연심≫이 서정적인 분위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고은채 작가만의 문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열여덟이라는 나이에 ≪연심≫을 창작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고은채 작가의 문체는 굉장히 자세한 묘사와 함께 그것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은유적 표현이 눈에 두드러진다. 처녀작인 ≪연심≫에서 이 정도니, 앞으로 더 다듬어진 문장은 어떤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낼지 기대됐다. 이상의 클리셰를 지우고 고은채만의 클리셰를 만든다면, 아마 더욱 인상깊고 서정적인 소설을 써내지 않을까. 훗날, 그녀의 차기작이 나오게 되는 때가 매우 기대된다.

  어쩌면 우리는 말이에요, 발이 맞지 않아서 서로를 지독히 괴롭혔던 절름발이인지도 몰라요. 그러니 이제 편안히 걸으세요. 그리고 우리의 후생이라는 것이 있다면 절대로, 절대로 만나지 맙시다. 사랑하는 나의 날개.
  나, 이럴 때 연애까지가 유쾌했어요.
_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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