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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ㅣ 안전가옥 오리지널 1
조예은 지음 / 안전가옥 / 2019년 6월
평점 :
인간들이 녹아내렸다.
그들이 허물던 모든 것처럼 허무하게 녹아 사라졌다.
뉴서울파크엔 내 발바닥 같은 분홍색 젤리 덩어리만이 남았다.
놀이동산. 곳곳엔 형형색색의 풍선들이 떠있고 신나는 퍼레이드 음악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입장하는 사람들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번져있다. 신이 난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고, 두 손을 꼭 잡은 커플들은 장난치며 지도를 본다. 테마파크에 대해 떠올리면 사람들은 흥겨운 분위기, 그리고 그곳에 있는 즐거운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뉴서울파크'는 사뭇 다르다.
인스타그램을 보다 강렬한 표지에 이끌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정도로 너무 재밌었다.'라는 후기 때문이었을까. 최근 들어 오로지 유희를 위해 책을 읽은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더 이 책이 읽고 싶었다. 그리고 첫 장부터 절반까지 쉬지 않고 읽었다. 읽는 내내 나는 '뉴서울파크'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행복한 것 같은 테마파크, 그리고 그 속에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 경계를 넘는 순간 현경은 전에 한 번 경험한 적 있는, 푸딩으로 몸을 던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아주 포근하고 축축한 공기가 자신의 전신을 감쌌다. 그리고 펼쳐진 광경을 바라봤다. 달콤한 젤리로 가득한 유원지, 서로에게 어떤 위협도 가하지 않고 말랑말랑한 젤리가 되어 녹아내리는 인간들. 노래처럼 울려 퍼지던 비명들은 곧 사그라들었다. / p. 195
스토리 프로덕션 안전가옥의 첫 번째 오리지널 시리즈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는 자주 싸우는 부모님이 걱정되는 유지라는 꼬마 아이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행복한 순간을 만들고 싶어서 찾아온 테마파크에서 여느 때처럼 싸우고 있는 부모님을 지켜보던 유지는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한다. 뉴서울파크에서 두 번째로 유명한 다람쥐통을 타러 갔던 유지는 입구에 굳게 묶인 쇠사슬을 보고 실망한다. 그렇게 돌아서는 순간, 연두색 직원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아저씨가 나타났고 '절대 헤어지지 않도록' 만드는 젤리를 건넨다.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누구나 변하지 않는,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그런 행복한 감정을 느끼기에 좋은 장소인 테마파크.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순간들이 계속될 것만 같은 그런 장소에 닥쳐온 기괴한 현상. 서로 엉겨 붙은 채 녹아내리던 사람들은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오묘한 감정을 보인다. 사랑이라고 하기엔 언뜻 집착 같기도 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감정.
주아의 엄마가 주아를 떼어내려 할수록 둘은 더욱더 서로를 옭아맸다. 둘은 하나가 되어 쓰러졌다. 그리고는 모든 걸 포기한 듯이 함께 녹기 시작했다. 얼굴과 어깨가, 팔과 팔이, 다리와 손이 하나가 되어 어그러졌다. 천천히 녹아내리는 덩어리들 사이로 한때 주아의 얼굴이었던 부분이 꿈틀거렸다. 그 둥근 덩어리는 주위를 돌아보는 것처럼 차분히 회전했다. 방황하던 주아의 머리가, 그중에서도 아직 녹지 않은 하얗고 섬뜩한 안구가 유지를 향했다. / p. 47
젤리는 아직 너무 어려서 모를 뿐이다.
떠나거나, 떠나지 않는 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란 사실을.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모든 인간들이 녹아내린 뉴서울파크에 혼자 남은 꿈냥이는 '영원한 것'에 대해 생각한다. 자신이 사랑했던 자신을 떠나버린 인간들을 생각하며, 사랑에 영원하다는 것은 없다고 단정 짓는다. 그러나 분홍색 젤리로 가득 찬 뉴서울파크를 걷던 꿈냥이는 자신도 몰랐던 기억의 조각들을 꺼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정을 주었던 모든 것들이 떠나지 않길 바라게 된다. 세상에서 제일 조절하기 어려운 게 마음이 아닐까. 영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은 하지만, 그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기에.
대체 누가 이 사람들에게 젤리를 먹였는지, 그런 것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연두색 모자를 눌러 쓴 젤리장수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더 중요했던 건 젤리를 먹은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젤리가 되어 한곳에 모인 그들은 그렇게 영원히 함께했을까. 그들이 원한대로 절대 헤어지지 않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