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부 매뉴얼
루시아 벌린 지음, 공진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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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실 아직 쓰여지지도 않았다. 내가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복잡한 세부 묘사로, 이 여자를 실제로 있을 법한 인물로 만들어서 사람들이 이 여자에게 동정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 <관점> 중에서



소설은 작가의 삶과 맞닿아 있다. 자신의 생각, 경험들을 조각조각 잘라 소설 이곳 저곳에 투영한다. 소설이 좋아 자주 읽다보니 그런 부분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유독 글을 읽는 속도가 느려지고, 자주 곱씹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작가의 생각이, 그리고 자전적 경험이 드러나는 그 순간들이 계속 눈에 밟힌다. 마지막 책장을 덮는 그 순간까지.


사후 11년 만에 떠오른 루시아 벌린의 《청소부 매뉴얼》도 그런 소설 중 하나였다. 24살에 첫 단편 소설을 발표한 그녀는 자신의 삶을 가져와 소설 속에 넣는다. 칠레에서 보낸 10대의 일부, 실패한 3번의 결혼, 싱글맘으로서 네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일한 경험, 알코올 중독 등 타인이 본다면 소설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던 삶의 일부분을 써 내려간다. 소설 같은 삶, 삶과 같은 소설. 루시아 벌린, 그녀의 삶과 소설 작품들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대부분의 나이 든 청소부들은 나를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많이 배운' 여자라서 청소부 일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당장 다른 일을 찾을 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 나는 곧바로 알코올중독자인 남편이 자식을 넷이나 남기고 죽었다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다.

/ <청소부 매뉴얼> 중에서



루시아 벌린의 단편 소설 속에는 병동 사무원, 교사, 청소부, 간호보조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여성 화자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이 화자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들이 보낸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 또는 짧은 시간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일상은 그리 빛나지 않는다. 그녀들에게 일상을 바꿀만한 특별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 특히 《청소부 매뉴얼》은 더욱 그렇다. 청소부로서 자신이 느꼈던 고단한 삶을 아주 담담하게 말한다.


그래서 《청소부 매뉴얼》을 읽는 동안 조금은 힘들었다. 나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녀의 경험들은 먹먹하면서도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일으켰다. 지금의 나와 비슷한 나이에 첫 단편 소설을 썼단 루시아 벌린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가히 짐작할 수 없었다. "나는 마침내 울고 만다."라는 《청소부 매뉴얼》의 마지막 구절처럼, 어쩌면 그녀는 그 삶을 살아내는 동안 울고 싶은 순간들을 참았으리라, 그저 그렇게까지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보통 늙어가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 어떤 것들을 보면 아픔을 느끼는데, 스케이트 타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다. 머리를 휘날리며 긴 다리로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는 그들은 얼마나 자유로워 보이는지. 또 어떤 것들은 나를 공황 상태에 빠뜨린다, 샌프란시스코 고속철도 문이 그렇다. 열차가 정지하고도 한참 기다려야 문이 열린다. 아주 오랜 시간은 아니지만 너무 길다. 시간이 없는데.

/ <카르페디엠> 중에서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까지 이 이야기들은 눈에 밟힌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온몸을 휘감는다. 분명 날카롭게 쓰인 문장들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면서 동시에 날카롭게 느껴진다. 허구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이 소설들은 그렇게 뇌리에 박힌다. 맞닿은 삶이 생각나 더욱 오랫동안, 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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