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로빈 스턴 지음, 신준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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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인정과 칭찬,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가 이런 것들을 약속하며 다가오면 그에게 끌린다. (p. 240)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환경에 따라 다양한 관계 속에 놓이게 된다. 가족, 친구, 연인, 직장 상사, 동료 등등. 이 모든 관계가 건강하다고 느껴진다면 좋을 테지만, 그것이 내 마음대로 이루어지기는 쉽지 않다. 때로 건강하지 못한 관계 속에서 우리는 늘 불안하고 힘든, 그래서 위태로운 감정 끝에 놓이는 경우가 있다. 특히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벌어지는 친밀한 관계의 정서적 학대는 우리에게 큰 아픔을 주기도 한다.

  나는 사랑하는 관계에서 어느 정도 자기희생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사랑이 항상 쉽지는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사랑의 본질은 그것이 '관계'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거기에는 사랑의 기쁨이라는 밝은 면과 사랑의 슬픔이라는 어두운 면이 공존한다. 상대방의 행동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p. 124)

  정신분석가이자 심리치료사로 활동하는 로빈 스턴은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학대를 의미하는 심리 용어 '가스라이팅'을 최초로 규정한다. 그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를 통해 독자들에게 '가스라이팅'에 대해서 쉽게 풀어낸다. 로빈 스턴은 정서적으로 누군가를 조종하려는 행위인 가스라이팅을 결코 가해자의 잘못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본래 '관계'라는 것이 두 사람 사이에서 성립되는 것이기에 그는 가스라이팅 역시 가해자와 피해자가 함게 만든 비정상적인 관계라고 바라본다.

  문제는 가스라이팅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가해자의 이해와 인정, 사랑을 받고자 하는 소망, 이 모든 것들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과 걱정에서 가스라이팅이 시작된다.  (생략) 가해자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피해자는 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어 할 때, 가스라이팅이 시작된다. (p. 34)

   로빈 스턴은 영화 <가스등>에서 영감을 받아 '가스라이트 효과'를 정립한다. 현실에서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은 대부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모르며 피해자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피해자들은 가해자가 옳을지도 모른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치명적인 가스등 탱고에 갇힌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가스라이팅의 3가지 단계를 그가 상담했던 내담자들의 예시를 통해 설명한다.
  잠깐의 불편함과 의견 불일치를 겪는다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는 1단계부터 시작해 자신감을 얻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인정이 필요하지만 가스라이팅에 대해 지각할 수는 있는 2단계를 거쳐 가해자는 이상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조차 포기하게 되는 3단계까지 로빈 스턴은 각 단계별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특징을 써 내려간다.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원하는 삶을 만들겠다는 다짐, 가스라이팅을 배제하려는 노력이다. 그런 노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떨쳐버리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p. 254)

   로빈 스턴은 단순히 가스라이팅에 대한 개념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들이 이것을 지각하고 벗어나기 위한 방법들을 제시한다. 스스로 가스라이팅을 배제하고 만족스럽지 못한 관계를  변화시키거나 청산하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느끼게 해주고 생명력과 즐거움을 가진 관계들을 택할 수 있도록 만든다. 특히 로빈 스턴은 관계의 순간마다 내가 느끼는 감정 상태에 집중하기를 강조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를 읽으면서 그동안 힘들고 지친 관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친밀하다고 믿었던 관계에서 괴로움을 느낄지언정,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편이 내게 더 좋다고 생각했던 때가 떠올랐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 관계를 청산하기로 마음먹었고 오히려 그 편이 훨씬 자유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내가 오로지 피해자의 입장이라고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든지 가스라이트 효과에 있어서 피해자가 될 수 있으며, 혹은 반대로 가해자가 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사실을 명심한다면, 많은 관계들이 건강해지고 즐거워질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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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공간 - 평행우주, 시간왜곡, 10차원 세계로 떠나는 과학 오디세이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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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여행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굉장히 흥미로운 소재로 사용된다. 주인공들은 타임 머신을 타고 과거나 미래를 오간다. 혹은 타임 머신과 같은 기구가 없어도, 터널이나 특정 장소를 통해 시간 여행을 한다. 시간 여행자들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로 잡거나 혹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미리 보고 돌아와 미연에 방지한다. 얼마나 비현실적인가! 그래서 우리는 이런 시간 여행이 단순히 즐겁고 발칙한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로 시간 여행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일까?
  미래학자 미치오 카쿠는 우리가 아직 밝혀내지 못한 물리학의 영역들을《초공간》을 통해 설명한다. 3차원의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시작을, 미치오 카쿠는 수학과 물리학을 바탕으로 풀어낸다.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의 세계를 넘어서 우주로 나아가 양자역학, 시간 여행, 블랙홀과 웜홀, 평행 우주의 세계를 그려내고 우주의 미래까지 우주 물리학에 관한 광범위한 과정을 500여 페이지에 담아낸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잉어와 상상력을 벗어나 있다. 잉어와 나 사이의 거리는 수십 cm밖에 안 되는데, 수면을 경계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잉어와 나는 서로 왕래할 수 없는 다른 우주에 사는 거나 마찬가지다. 두 우주 사이의 경계는 얇디얇은 수면일 뿐인데, 잉어는 그 장벽을 넘지 못하고 자기가 사는 곳이 유일한 세상이라 믿으며 평생을 살아간다. (p. 22)

  미치오 카쿠는 독자들이 복잡한 초공간 이론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과학을 중심으로 역사, 문화, 종교, 철학을 오가며 설명한다. 자신의 경험을 털어 놓으며, 또 다른 차원에 관한 이야기를 굉장히 흥미롭게 시작한다. 이외에도 과학과는 거리가 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SF 관련 영화나 소설의 줄거리를 인용한 것이 굉장히 인상적인 책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나 <거울 나라의 앨리스> 등 많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소설을 설명 방식에 사용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흔히 '물리학의 언어는 수학'이라고 말한다. 갈릴레오는 "우주의 언어는 수학이다.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주라는 위대한 책을 읽을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 예나 지금이나 물리학(자연)은 수학으로 서술된다. (p. 514)

  《초공간》은 '자연은 근본적인 단계로 갈수록 단순해진다'라는 전제 조건을 기반으로 전개된다. 다시 말하자면, 차원이 높아질수록 물리학 분야는 조금 더 쉽게 설명이 가능해지기 때문에 미치오 카쿠는 차원의 이야기를 수학자의 시선부터 시작한다. 0차원의 점, 1차원의 선, 2차원의 길이와 폭을 가진 면, 3차원의 길이, 폭, 깊이를 가지고 있는 입체도형까지, 수학의 관점에서 차원이 더 깊어지기 시작하고 이내 물리학적인 관점에서의 고차원 이야기가 진행된다. 초공간 이론이 어떤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구성되었는지 미치오 카쿠는 오랜 시간을 통해 설명한다.

  창조의 과정도 경이롭지만, 다른 우주로 통하거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웜홀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은 더욱 경이롭고 신기하다. 평행우주는 정말로 존재하는가?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가 이미 정해진 과거를 바꿀 수 있을까? (p. 345)

  양자이론까지 도달한 그는, 어쩌면 독자들이 가장 궁금했을 시간 여행, 평행 우주, 블랙홀과 웜홀의 세계에 대해 설명한다. 아쉽게도 우리는 극히 발달한 문명을 가지지 못해 시간 여행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광활한 우주 너머의 세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그 자체로 굉장히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이 우주 어딘가에 또 다른 차원이 존재한다고 생각해보라
  《초공간》에서 보여준 우주의 미래처럼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또 다른 차원의 우주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은 계속될 것이다.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의 우주 용사 버즈 라이트이어는 이렇게 외쳤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To infinity… and bey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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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랭 레몽 지음, 김화영 옮김 / 비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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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힘들거나 지칠 때,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을 찾게 된다. 나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집'을 자주 찾게 되는데 오죽하면 '힘들다'라는 말 대신 '집에 가고 싶다'라는 말이 습관처럼 입에 배어 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을 생각하고 추스를만한 곳으로는 집이 최고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아늑하고 따뜻한 집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기분을 받기도 한다.
  더구나 집이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집에 있는 모든 기억과 추억들이 함께 연상되는 느낌을 받는다. 사진첩을 보는 것처럼, 머릿속 한 편에서는 집에 얽힌 기억들이 속속히 떠오른다. 맛있는 음식이 차려진 저녁 식사, 가족들과 함께 즐기는 주말의 저녁, 외출 후 돌아오면 항상 반겨주는 반려견…… 그래서 때로는 '집'은 그 자체로 기억의 조각들을 품고 있는 하나의 상자처럼 느껴진다.

  딴 사람이 들어 살고 있었구나, 우리 집에. 그렇게 생각하자 정말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이나 그 집이 우리 집이었지? 그 집으로 이사 갔을 때 나는 여섯 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스물다섯 살이었고. 그렇게 따져보니 한 이십 년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십오 년도 넘었다. 그렇대도 그 집은 우리 집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p. 18)

  알랭 레몽은 《하루하루가 작별의 나날》을 통해 집과 관련한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풀어낸다. 가장 친한 친구 이브를 통해 오래전 떠난 트랑의 옛집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된 알랭 레몽은 누군가 살고 있다는 사실에  섭섭함을 느끼게 된다. 10남매를 둔 가정에서 자란 그는 12명의 가족이 함께 옹기종기 살았던 유년기를 떠올리게 된다. 막 전쟁이 끝난 이후의 베이비 붐 세대를 대표하는 알랭 레몽은 그의 유년기를 자세하고 섬세하게 서술하는데, 마치 한국의 6·25 전쟁이 끝난 직후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들과 더불어 트랑에는 돌연 새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는 현대적이 된 것이다. 이제 더는 궁벽한 곳에 처박힌 촌동네가 아닌 것이었다. 시커멓고 기다란 도관들이 차츰 마을 한복판으로 뻗어 들어옴에 따라 하루가 다르게 발전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p. 63)

  알랭 레몽은 자신의 유년기를 서서히 털어놓으면서, 그것은 작별의 시간이었노라고 고백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은 사랑하는 모든 것들과 작별할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의 모든 하루하루는 작별의 나날이었다'라는 샤토브리앙의 <무덤 저 너머의 회상>의 한 대목을 떠올린다. 그는 성숙과 성장의 과정을 과거와의 작별하는 것과 같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커서 나이를 먹고 세상을 발견한다. 큰 아이들은 일을 하고 알리스에게는 벌써 애들이 있다. 그리고 가장 어린 축인 우리는 조금씩 달라진 세상과 만난다. 각자는 기숙사 혹은 다른 곳에서 친구들을 사귄다. 처음으로 해보는 여행들, 예민해지는 의식. 돌연 중요해진 정치적 감각, 타 문화나 제3세계 혹은 당시 유행하던 표현처럼 세계의 기아문제 쪽으로 열리는 관심. 문득 트랑이 형편없이 작아 보인다. 지평선이 폭발하고 사방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p. 103)

  그의 이런 생각은 함께 실려있는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그려진다. 그는 <한 젊은이가 지나갔다>를 통해 자신의 청춘의 격정을 그려낸다. 알랭 레몽은 자신의 젊은 날의 초상을 이 글 안에 담아낸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어머니, 우울증을 앓고 있는 동생 아녜스에 대한 연민과 사랑 그리고 신부가 되고 싶었던 자신의 열정과 또, 반대로 신부가 되기를 포기하게 만든 젊은 날의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그러면서 그는 청춘의 격정을 '젊은이'라고 지칭하며, 또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을 암시한다. 젊은이가 지나갔으니 다음에 또 누군가 지나가지 않겠는가.
  '집'을 통해서 유년시절의 기억과 청춘, 그리고 방황까지 그려낸 알랭 레몽. 담담한 듯 툭툭 내뱉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생각할 것이 참 많았던 소설이다. 그의 솔직하고 담백한 고백의 글들은 기억 속 어딘가에 잠재워져 있는 그 아련한 느낌을 다시 꺼내게 만들었다. 때로는 특별한 기교가 없어도,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은 문장들이 감성을 톡, 하고 건드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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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좀 쉬며 살아볼까 합니다
스즈키 다이스케 지음, 이정환 옮김 / 푸른숲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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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갑자기 평소와 다른 하루를 시작해야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타의에 의한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자의에 의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갑자기 내 신체의 일부를 뜻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설마 했는데…… 정말 그런 날이 왔다. 말을 할 수 없고 손가락을 움직일 수도 없다. 시야는 흐물흐물 일그러져 보인다. 보행에는 지장이 없는 듯하다. 아, 이건 분명히 뇌의 문제다. (p. 27)

  언제나 같은 일상을 보낼 것이라고 믿었던 저자 스즈키 다이스케는 어느 날 찾아온 몸의 이상 신호에 당황스러워한다. 며칠 전부터 보였던 전조증상 중 하나였던 쉽사리 잘 움직이지 않던 손가락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스즈키 다이스케는 자신에게 찾아온 이 변화에 난감한 모습을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그 누가 "나는 내일 큰 병에 걸릴 거야!"라고 장담하면서 하루를 보낼까. 갑작스레 찾아온 뇌질환에 당황하면서도 스즈키 다이스케는 자신의 투병기, 《숨 좀 쉬며 살아볼까 합니다》를 유쾌하게 적어내려 간다.

  "그래, 이거야!" 하고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실제로는 손뼉을 치고 싶어도 왼손이 자유롭지 않아서 오른손으로 허공을 가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납득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장애의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아, 이런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p. 42)

  왼쪽 시야를 잃어버리고 타인과 정상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에 이름을 붙여주면서까지 움직이려고 한다. 기자이자 작가인 직업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 1만 번이 넘는 타이핑을 연습하고 또 연습한다. 스즈키 다이스케는 뇌질환이 찾아온 것에 절망하지 않는다. 누군가 보기에는 암담한 상황(기자이자 작가인 내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해 타이핑을 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면)이라고 여기고 좌절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오히려 기자 정신을 발휘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 투병 기록들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병원에서의 투병 기록을 마치고 돌아온 스즈키 다이스케는 그동안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규칙과 강박관념들을 벗어던지기로 한다. 오전 시간을 반드시 활용해야 되고, 밥은 꼭 정해진 시간에 먹어야 하고, 바쁜 게 좋은 거라고 여유 없이 살아가던 그였기 때문이다. 기자나 작가로서의 일을 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휴식이라고 생각하며 밀린 집안일 등을 하고 있던 그는, 비로소 자신을 답답하고 힘들게 만들었던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음식점처럼 딱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제공해달라고 요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규칙은 내가 정해 채찍질을 해왔을 뿐이다. 정말 한심하다. 눈물이 흐른다. (p. 135)

  한편 병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열심히 물리치료를 받던 그는 자신이 취재했던, 사회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그들을 위한 의료 복지 시스템의 구축이 너무 약하고 부실함을 꼬집어낸다. 간혹 '일본 사회는 한국 사회의 n 년 후의 모습이다'라는 말을 들을 적이 있었는데, 스즈키 다이스케가 집어낸 일본 사회의 문제가 결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머지않아 n 년 후의 한국의 모습은 고스란히 보여주는 느낌이었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일본에서는 재활치료사들이 고령자의 퇴원과 일상생활 복귀를 돕는 일로도 힘에 부쳐서 일손이 부족한 상태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발달장애가 있는 어린이나, 사회 적응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 또는 생활이 어려운 이들에게 재활치료를 베풀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의사가 '병명'을 특정하지 않으면 재활치료사들이 손을 쓸 수 없는 환경에서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는 가벼운 장애를 끌어안고 있는 사람은 도움을 받기가 더더욱 어렵다. (p. 75)

  《숨 좀 쉬며 살아볼까 합니다》를 읽으면서 심각한 것을 알면서도 스즈키 다이스케의 문체와 표현방식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그 누가 자신의 투병 기록을 이렇게 솔직하고 유쾌하게 써 내려갈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바쁘게 일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휴식 다운 휴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한 번쯤은 숨 좀 쉬며 기지개를 활짝 펴는 것도 나를 위해 좋을 것 같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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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토피아 - 실리콘밸리에 만연한 성차별과 섹스 파티를 폭로하다
에밀리 창 지음, 김정혜 옮김 / 와이즈베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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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 책을 쓰는 목적은 몇몇 중요한 질문을 제기하고, 동시에 그런 질문에 대한 답을 들려주기 위함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여성은 어떻게 IT라는 경기장 바깥으로 밀려나 구경꾼 신세가 되었을까? 다시 경기장 안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을까? (p. 27)

  많은 스타트업 기업들의 성공 신화를 써 내려가며 현대판 유토피아라고 불리는 실리콘밸리. IT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라면 한 번쯤은 꿈꿔봤을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블룸버그 테크놀로지>, <블룸버그 스튜디오 1.0>의 앵커이자 총괄 제작자 에밀리 창은 꿈으로 가득 찬 공간의 이면에 가려진 비밀들을 《브로토피아》를 통해 폭로한다. 저자 에밀리 창은 200명이 넘는 기술 산업 종사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실리콘밸리의 성공 신화로 가려져 밝혀지지 않았던 성차별과 섹스파티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

  언론 매체 사이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다. 인터넷 세상의 이야기는 특정 연령대의 천재 너드나 브로가 이끄는 IT 스타트업의 이야기라야 이른바 '잘 팔린다'는 것이다. 아무리 유능하고 성공적이어도 날마다 일과 가정을 양립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이야기는, 두둑한 배짱으로 감수하는 천재 IT 혁명가라는 고정관념에 맞지 않다. (p. 184)

  누구에게나 열려 있을 것 같은 실리콘밸리의 이면은 생각보다 어두웠다. 도전적이고 창의적인 생각만 있다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될 것 같았던 실리콘밸리에는 사실 우리가 생각지 못한 거대한 고정관념이 있었다. '프로그래머는 고독하고 자기중심적이어야 한다.', '기업가는 진취적이고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라는 말도 안 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실리콘 밸리 속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다양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CEO, 벤처캐피털리스트, 엔지니어들은 남성 중심적 사고에 갇혀 그들만의 문화를 조성하였고, 여성을 비롯한 LGBTQ 소수자들은 그 문화 속에서 언제나 소외당해야만 했다. 저자 에밀리 창은 다양성이 결여된 이 실리콘밸리를 '브로토피아'라고 지칭한다.

  아주 못된 짓을 하는 소수의 사람과 방관자 증후군을 앓는 다수의 사람이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즉 많은 사람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뒷짐 진 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습니다. (p. 241)

  소위 초엘리트라고 불리던 소수의 사람들은 자신들만의 문화를 구축하고 그것이 어디론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쉬쉬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실리콘밸리에서 벌어지는 폭로는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인터넷 트롤링 피해를 겪고 그것을 막고자 노력했던 게임 개발자 브리애나 우, 상사의 성추행 사실을 블로그를 통해 고발한 뒤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던 우버의 전직 엔지니어 수전 파울러, 그리고 <옵션 B>의 저자이자 페이스북의 COO 셰릴 샌드버그 등 IT 계의 종사하고 있는 여성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드러내고 그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한다. 그들의 노력으로 그동안 방관되어 있던 문제들은 세상의 눈앞에 고스란히 던져진다.
  하지만 이 문제들이 오로지 실리콘밸리 안에서만 일어나는 일일까? 여전히 사회의 어떤 부분에서는 다양성이 결여된 채 한 특정 집단의 고정관념에 의한 문화 형성이 이루어지고, 그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다면 배제당할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 일어난다. 개인의 능력이 중시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능력이 아닌 그 외에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성별을 떠나서 누구에게나 있을 법 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가 우호적이고 상호 존중하며 공감적인 문화에서 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회사의 가치를 준수하고 그런 가치를 근거로 인재를 채용합니다. 슬랙이 지지하는 가치들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로 배울 수 있는 다양성에 입각한 포용적인 작업 환경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는 다양한 배경과 경험과 능력과 관점을 가진 지원자들을 환영합니다. (p. 481)

  에밀리 창이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전해준 실리콘밸리의 이면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간에도, 세계 어딘가에서는(혹은 가까운 우리 주변에서는) 제2의 실리콘밸리 스캔들이 벌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그 사실을 자각하고 고쳐나가야 한다. 모두가 그 어떠한 고정관념으로도 피해 받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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