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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평점 :
버스럭거리는 눈이 날린다.
그 넓은 들판을 긴 행렬이 줄을 지어서 간다.
끝도 보이지 않는다.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 명이 아닌 청을 받들라며 조선의 땅을 황폐하게 만든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은 궁을 옮긴다.
너무나 추웠던 그 겨울,
송파강도 얼어서 많은 인원이 건너가면서도 얼음이 깨지지 않을 정도의 엄청난 추위에 힘든 겨울이었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각 인물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인조에게는 두 신하가 있었다.
강직하면서도 대의를 중시하는 김상헌과
현실적으로 칸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것인 백성을 위한 길임을 주장하는 최명길.
사실 어느 누구의 주장에도 반박을 할 수가 없다.
모두 현실을 반영한 충언이기 때문이다.
어느 것이 옳은 결정인지 결정하지 못하는 인조의 마음,
역적으로 몰리더라도 백성의 죽임을 최소화하려는 최명길,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서날쇠 등의 심리를 알아 볼 수 있다.
심지어 칸이 조선을 바라보는 시점까지도 알 수 있어서 소설은 점점 흥미진진해진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왕도 사대부도 백성도 모두 지쳤다.
마음도 몸도 환경도 모두 피폐해져서 삶의 의욕도 없다.
산성 내에서는 돈보다 곡식이 더 환영을 받는 시대였다.
그 당시는.
오히려 돈을 내 놓으면 화를 내면서 돈 대신 먹을 수 있는 곡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면서 이 긴 전쟁이 끝나고 왕이 다시 돌아가면 보답하겠다는 말에 믿지 않지만 받아들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아직 그 정도까지 피폐해지지 않았구나,
그리고 서문을 왕이 통과하고 나서 서날쇠 등등의 백성이 다시 봄이 온 것을 기뻐하면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활기를 띄는 점 등을 보면서 어려움도 길지 않고
봄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버스락거리는 눈이 1년 내내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반드시 민들레가 펴서 꺽지를 먹을 수 있는 봄이 오고,
냉이로 맛난 국을 끓여 먹을 수 있는 봄은…
반드시 온다.
하지만 그 봄을 맞이 하기 위해서 체철사의 오판이나 칸의 무력 공격 속에서
우리의 백성은 하염없이 죽어나갔다.
무명옷은 음력 12월 칼바람을 막아주지 못했고,
말을 먹일 수는 있어도 백성은 먹일 수 없는 상황 등등으로 사람들은
동상과 추위로 길어지는 대치 상황에 힘들어하는 모습에 답답하다.
왕은 그것을 마음 아파하면서도 자신의 무능력함에 하염없이 그도 무너져갔다.
그러면서 충직한 두 신하의 간언이 자꾸 생각난다.
p.269~270 냉이 중에서
김상헌이 말했다.
“전하,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나이까?”
최명길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전하, 살기 위해서는 가지 못할 길이 없고, 적의 아가리 속에도 삶의 길은 있을 것이옵니다.
적이 성을 깨뜨리기 전에 성단을 내려주소서.”
말이 길이 되고, 길이 말이 되는 그날.
비록 역사적으로는 굴욕적인 사건으로 남았지만 백성의 괴로움은 종지부를 찍었다.
아직도… 그 결정이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 못하겠다.
김상헌의 말이 맞는지 최명길의 말이 맞았는지…
이 부분은 저자의 말에서도 느낄 수 있다.
p.398 못다 한 말 중에서
저 가엾은 임금은 이 하산의 길을 걸어 내려가면서 비로소 고해의 아비가 되어가고 있었다.
내리막길에는 눈이 얼어 있었고 말이 미끄러졌다.
나는 이 아비를 사랑한다.
미워하지 않는다.
칸에게 이마를 찧어서 총 9번의 절을 하는 인조,
어쩔 수 없이 청의 볼모로 자신의 아들을 보내는 인조,
그리고 나중에는 독살로 아들을 떠나 보내야 하는 인조…
그의 굴곡진 인생에서 임금의 무거운 어깨도 새삼 느껴지진다.
이 아비를 과연 욕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역적이 되는 것을 감수하고도 칸에게 글을 써 보낸 최명길을 욕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긴 행렬로 남한산성을 지나갔던 그들은 다시 그대로 남한산성을 통과했다.
그것도 서문으로.
이 안타까운 역사가 이 소설을 더 비장하게 만들어 준다.
책장을 펴면서 추웠던 그 느낌은…
봄이 온 뒤 냉이와 민들레가 피어나는 봄이 되어 마무리가 되어도 따뜻해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