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 인문학자 8인의 절망을 이기는 인문학 명강의
강신주 외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8월
평점 :
절판


우리가 절망이라고 생각했던 게, 힘들다고 애기하는 게 바로 관념이에요. 진짜 절망할 상황에서는 인간은 절망하지 않고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을 가져요.(...)고통과 절망을 겪는 과정에서 배우는 사람도 있고 완전히 부서지는 사람도 있지요, 그래도 고통의 밑바닥까지 가서 다시 튀어 오르는 경우가 많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실제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의외로 절망스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번 시도해볼 필요가 있는 거죠. 힘겹더라도 어떻게 되든 한번 해보자는 겁니다.  p28-31


누누이 강조하지만, 바닥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해요. 처음에는 저도 바보같이 절망은 별것 아니라고 편하게 생각했어요. 근데 일이 년 동안 상담을 하며 사람을 만나보면서 바닥이 없는 경우도 봤어요. 운이 없는 사람들이있죠, (...) 그럴 때는 이렇게 이야기하죠."행운을 빕니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굉장히 다른 문제예요. 인문학 이론은 완벽하지 않아요. 안 맞는 경우도 많아요.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p33-34


왜 진실을 말하지 않을까요? 불편해지거든요. 권위적인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입을 다물어야 하지만, 민주적인 사회에서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어느 쪽입니까? 침묵하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라고 독재자 논리를 폅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이유, 책을 보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진실을 직면하는 파르헤지아(진실을 말하기)입니다.(...)진실은 들어서 아는 게 아니라 목도해버리는 겁니다. 이전에는 몰랐는데 진실이 눈앞에 나타았어요. 어떡해요? 진실은 안 본다고 안 보는 게 아니에요.(...)이 사회가 억압적이라는 것을 알아 버린 거예요. 진실을 알아버린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죽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행동하는 겁니다. 내가 진실을 직시하는 가장 위대한 시간은 절망과 위기의 순간입니다. (...)위대한 철학은 항상 전쟁과 위기 속에서 탄생합니다. 인문학은 우리를 보호해주지 않아요. 우리를 해체합니다. 그걸 감당하는 사람은 철학적입니다. 힘들지 않겠어요? 그래도 인문학을 공부하시겠어요? p46-48  


<강신주:시대의 이름, 절망>


절망의 끝까지 자기는 가 보았다고, 그러고 나니 박차고 올라올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끝이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

진실을 보라고 한다.

하지만 나를 해체 시키고 상처줄것이라고 한다.

감당할수 있겠느냐고 한다.

그의 반복되는 물음들(다른 책이나 강연에서도 많이 보고 들었다)

나의 반복되는 대답들.


나는 아직 진실이 무섭고, 두렵다.

아마도 난 아직 진실로 절망스러운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절망스럽다고 느.끼.고.있.다.고.





그리스 민주주의에는 비밀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성인 남성 시민만이 참여할 수 있었고 여성과 노예는 배제되었죠. 여성과 노예는 생산을 담담해야 했기 때문에 포합시키지 않았습니다. 남성은 생산 활동에서 면제되었기에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죠. 민주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여유가 필요합니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제한적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사실은 거꾸로 민주주의의 제한성이라고 봐야 합니다. 민주주의가 잘 운영되기 위한 조건이 까다롭다는 뜻이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 인데, 우리가 동등한 자격으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고 활동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필요합니다. 생계가 보장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고 모두가 주권자라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주권자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하기 어렵습니다. 타락하거나 변질되기 쉽고 그래서 이것이 민주주의의 제한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65-66


그럼 18세기 이전의 문학에서는 욕망이 드러나지 않았을까요? 저는 욕망이 학습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욕망이 우리 속에 있는 것이라면 그 이전의 작품들에도 중심적인 주제로 계속 나타나야겠죠. 강의에서 말씀드린 대로 욕망은 근대 이후에 일반화된 게 아닐까, 그리고 계층적으로도 확산된 게 아닌가 합니다. p76-77


<이현우:자유가 낳은 괴물, 욕망>


인간의 욕망이 18세기 이전엔 없었다가 근대 이후에 학습에 의해 갑자기 생겼다는 이야기인가? 18세기 이전에는 신에 대한 찬양이 문학이고 예술이고 뭐 그렇지 않았나? 그시대에 여성, 아이, 노예등은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했는데, 어느 글쓰는 백인 남성이 그들의 욕망을 대변해줄 글을 써주었을까? 그들은 인간이 아닌데 욕망을 느끼리라 생각하지도 않았을텐데....근대이후 그들에게도 욕망을 표출할 창구가 생겼고, 그러다 보니 글쓸 줄 아는 백인 남자들이 그것들에 대해서 글을을 쓰게 되면서

문학에 그 모습들이 그려지게 된건 아닌지. 문학에 문자도 모르지만 그냥 궁금해서 몇자 ....





가난을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능력보다 더 큰 노후 대책이 있을까요? 오랜 시간 정규직에 있다가 백수가 된 친구들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직업이 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편안하다는게 놀랍다고 합니다. p120


<고미숙:욕망의 지도,운명>


아 진짜...이런말 너무 싫다. 오랜시간 정규직에 있다가 이제야 백수가 된 분들이야 지금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없으니

한창 잘나가던 때보다 '가난'해도, 지금 좀 못나가도 마음 편한게 놀랍겠지만,

앞서 이현우 님의 말처럼 생계가 보장되어야 민주주의도 되는데, 그런 생계도 보장 되지 않아서 일당 몇만원에

말도 안되는 피켓들고 시위하고, 가스통 메고 알바뛰는 할매 할배들에게 가난을 기꺼이 즐기셔야지 여기서 가스통 메고 다니면 안됩니다라고 어떻게 말해? 파지와 공병 줍느라고 쓰레기 봉투 뒤지는 할매에게 그렇게 어떻게 말해?

하아..네..저 요새 삐뚜름 모드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학자이자 신학자인 라인홀트 니버의 이야기 입니다. 그가 쓴 <평온의 기도>라는 유명한 기도문 입니다. 보수 진보 따지지 말고 보십시오, 말 자체가 울림이 있습니다.


신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을 주시고

제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를 주소서.

그리고 그 둘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제게 주시옵소서.

p132


우리는 내가 이미 갖고 있는 것을 확인해주고 입증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합니다. 다른 이야기는 걸러버려요. 나의 생각을 확인해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득고 싶어 하죠. 제가 예전에 강연할 때는 어느 한쪽을 강하게 부르짖었기 때문에 보람이나 흥분 같은 것을 느겼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양비, 양시론 등을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중간. 타협. 소통 등을 말했습니다. 1990년대에 양비론을 호되게 비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더군요. 어쨌든 지식인은 스스로 편 가르기 구도를 끌고 간다고 생각하지만 저는 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p138


<강준만:감정독재의 본질, 증오>


동등한 입장에서 싸워야 양비, 양시지.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사태 같은 것도 양비 양시론이 적용이 될까?

최첨단 무기 앞에서 돌팔메질로 저항하다.... 하다하다.... 안되니까

가진게 몸 뿐이라 자살폭탄테러를 하는 팔레스타인 인들에게

이스라엘이 그런다고 너희들도 그러면 안되지 라고 말할수 있나?

광주에서도 그랬는데...

광주 시민에게 계엄군이 발포했다고 너희들도 그러면 안되는거였어 라고...할수 있나?





세월호 사건 이후 인문학 강연에서 자주 받는 질문이 바뀌었습니다.(...)그중에 가장 난처했던 질문은 바로 이런 내용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세상은 자꾸만 사악해져가는데, 우리도 그 악과 싸워 이기려면 강해지고 악해져야 하는 것아닌가요?"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하게 만드는 세상이 야속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껏 당하기만 하고, 속아주기만 하고,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하는 데 이골이 난 성난 사람들의 마음혹에서 뭔가 아주 중대한 변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환상, 시스템이 최소한의 안전판이 되어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우리는 힘겹게 빠져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삶을 ,아니 우선 나 자신의 삶부터 바꿀 수 있는 '진짜 주체'가 되어야 할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사악한 세상에 발맞추어 사악한 주체가 되어야 할까요? 강해진다는 것은 곧 악해진다는 것과 동의어일까요? 강해져야만 강한 자들을 이길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대참사들을 바라보면서 '예외적 상태에서 오히려 이 사회의 진면목이 투명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고통 속에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바로 집단의 사악함과 개인의 위대함입니다. (...)전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적 사악함'은 바로 '인명구조보다 상부의 지시나 의전이 더 중요한 체면 중심의 조직문화'가 만들어낸 파국입니다. (...)300명 가까운 죄 없는 목숨이 속수무책으로 수장당하는 동안. 구조를 책임져야 할 세월호 관계자들과 해양경찰이 한 일이라고는 '윗사람의 명령에 따르고, 윗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윗사람들은 사고를 책임지려는 생각은커녕(..)'컨트롤 타워가 우리가 아님'을 증명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죠.

천금 같은 승객들의 목숨을 구한 진짜 영웅들은 대단한 조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순수한 개인이었습니다. "너의 다 구하고 나서 나도 나갈께!"라고 외치며 자신의 구명조끼까지 포기하고 끝까지 아이들을 구해냈던 스물두 살 승무원 고 박지영 씨, 커튼과 소망호스를 묶어 스무 명이 넘는 학생과 아이들을 구한 배관공 김홍경 씨, 선장과 조타수들은 다 자기들끼리 탈출해버리고 해경들은 그저 방관만 하고 있는 동안에도 수십 명의 승객들을 끝까지 구한 화물차 운전수 김동수 씨.

  세상을 지키는 사람들은 악에 맞서 더 악해지는 사람들'이 아니라, 악이 밀려오는 힘보다 수백 배 , 수천 배 더 큰 사랑과 용기로 가장 단순한 선의를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악에 맞서 더 악해지는 것은 결코 답이 될 수 없습니다.(...)악 따위는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도록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최선의 선의를 실천하는 용기입니다. p165-169


노예로 태어나 온갖 고난을 겪었지만 끝내 위대한 철학자가 된 에픽테토스는 <엥게이리디온>에서 '나에가 달린 것'과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지혜를 강조합니다. 국가, 부모, 인종, 외모, 평판, 재산 같은 것들은 '나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인데, 사람들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은 것'에 골몰하느라 진정'나에게 달려 있는것'에 마음 쏟을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실로 나에게 달려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요. 그럿은 지혜, 신념, 우정, 용기, 희망처럼 아무도 방해할 수 없는 내면의 가치들입니다.  p197-198



<정여울:끝없는 불안과 싸우는 당신을 위한 노래>


요 위에 강준만씨가 인용한 라인홀트 니버의 <평온의 기도>와 결국은 같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내가 할수 있는일. 내가 할수 없는일, 그것을 분간하는 일, 아닌것은 포기할줄 아는일.

말은 쉽지....


박지영 씨, 김홍경 씨, 김동수 씨.

이름을 한번더 불러봅니다..

박지영씨, 김홍경 씨, 김동수 씨.....


'망망대해에 있는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데, 어디로 가야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인간이 느끼는 무기력감은 위력적입니다.(...)'무언가 잘못되없다는 느낌'은 드는데, 그 잘못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주변을 통제할 수 없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때 발생하는 공포와 무기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자신의 관심을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에 한정하려 합니다. 즉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에 있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것들은 관심 밖으로 돌리는 것이지요. 이는 모두 공백 기간(기존의 가치관이 무너진후 새로운 가치관이 확립되기 전의 상태)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려는 애처로운 발버둥입니다. p288

 

공백기간을 살아내기 위해 가장 많이 듣는 충고는 강한 자아를 키우라는 것입니다.(...)우리가 공백 기간에서 느끼는 공포감은 사실 개인이 극복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발생합니다. 경제적 안정성에 대한 불확실성에서 만약 한 개인이 공포를 느낀다면, 그 공포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개인이 갖고 있을 리 없습니다. 하지만 사실상 사회문제를 개인적 문제로 만드는 경향은 공포에 대한 처방조차 마치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만듭니다. 강한 자아론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한 명의 자아에 대해서는 매우 깊게 이야기하지만, 그 자아의 사회적 성격에는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로써 알게 모르게 강한 자아론은 사회문제를 개인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지요. p299-300


'사회문제의 개인화'는 막다른 골목에서 결국 사람들을 냉소주의로 이끄는 것이지요. p301


"세상은 본래 그래","그래봐야 소용없어"와 같은 냉소주의 혹은 무기력에 사로잡힌 주장들은 세상을 매우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볼테르가 풍자했던 세속화된 변신론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사회과학의 힘은 바로 노골적인 세속적 변신론 혹은 결과적으로 세속화된 변신론과 다르지 않은 냉소주의와 무기력에 사로잡힌 투정과 거리를 둘 수있는 능력 계발에 있습니다. 손에 사회과학적 칼을 들고 있는 사람은 자아라는 추상의 세계가 아니라 '나'라는 자아가 놓인 사회적 관계망을 관찰합니다. 그리고 그 사회적 관계망에서 공백기를 살아낼 삶의 전략을 고민합니다. p305


아이히만의 사례에서 보듯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선은 강한 자아와 약한 자아가 아닙니다.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책임 능력'입니다. 책임 responsibility이라는 단어와 응답 response의 상관관계는 책임의 본래 뜻을 가장 잘 설명해줍니다. 책임이란 우리가 서로 응답해야 하는 존재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공감 능력'역시 이런 의미의 책임감을 지닌 존재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요. (...)공백기간에서 탈출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결심을 기억해내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인간임을 증명하는 방법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고민하는 것이겠지요. p310-311


<노명우:그래도 인간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응답하라 박근혜!

고마 손한번 잡아주러, 그 멀리 자갈치 시장까지 갈필요 없잖아.

고마 손한번 잡아달라고, 밤이 새도록 기다리는 사람들이 바로 거기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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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6 11: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4-08-26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문에서 '대통령이 나설 일이 아니다' 라는 청와대의 반응 기사를 보고 너무 화가 났어요. 그러면 누가 나설 일이죠? 그러면 대통령이 나설 일은 뭐죠? 저는 대통령이 대체 왜 저렇게 경찰로 방어막을 치고 귀를 막고 있는지 진짜 모르겠어요. 왜그러는거죠? 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