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개들의 왕 - 제2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12
마윤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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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소설을 많이 읽어보지 않아서 일까? 나는 소설을 읽고 나면 그래서 도대체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게 뭐지?’라는 물음에 빠진다. 그 물음에서 회의를 느끼고 결국 책장을 덮어버린 책도 많이 있다. 책을 읽다보면 나는 전혀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는 등장인물이나 사건들은 뭔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을 것만 같고 내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에 소설을 즐기지 못하고 있나? 라는 의심이 자꾸만 책장을 넘기는 손을 더디게 한다.

 

검은개들의 왕의 경우에는 책 자체는 어렵지 않아서 책장은 손쉽게 넘어갔으나 읽는 내내 이 책을 읽고 있는 이유에 대해 묻게 만들었다. 정말 그냥 어느 마을에 개성강한 친구 셋이 살고있었고 마침 그 마을 외곽에는 수상한 농장이 있었으며 그 수상한 농장에는 검은개라는 매우 수상한 개와 금속경찰이라는 아주 수상한 쌍둥이와 노인이라는 몹시 수상한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무척 수상한 할머니가 매우 수상한 검은개에게 물려 죽었고 마지막에 그 검은개도 결국 죽는다.

 

라는 소설인가? 아니면 중간중간 주인공이 두 개의 달을 보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검은개는 우리 사회의 검은 어떤 세력을 상징하는가? 금속경찰과 그의 쌍둥이 형제 진짜 경찰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주인공 무리가 모두 가족이 정상이 아닌 것은?

 

라는 물음이 당연한 것인가? 기차에서 이야기하던 아저씨 몸 속에서 다른 얼굴이 튀어나오는 것은 뭔가? 우물에서 검은물고기들이 튀어나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런 것을 두고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하는 것인가? 할머니의 존재 의미는 뭐지? 사탕은 뭘까?

라는 물음들은 의미있는 것인가? 내가 내공이 모자라서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쓸데없이 의미부여를 하며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를 못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

작가가 나 같은 독자를 배려하기 위함이였을까? 책의 말미에는 다소 쌩뚱맞은 흐름이 등장한다.

 

p. 267

불쌍한 개야....”

사실 검은개는 인간의 욕심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동물이었다. 마치 프랑켄슈타인처럼 괴물로 태어난 검은개는 철창에 갇혀 인간들에게 잡아먹힐 날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그러다 투견으로 변신했고 끝내 주인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불현 듯 언젠가 또 다른 검은개와 맞닥뜨릴지 모른다는 생기기 들었다. 어쩌면 지금 내 앞에 죽어 있는 검은개는 앞으로 만나게 될 수많은 개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 할머니를 물어죽인 검은개에게 증오를 쏟아붓고 있던 이들이 검은개가 주인손에 죽자 다소 애도의 태도로 변하는 것과 주인공의 그동안 스토리와 다소 다른 사고과정에서 나는 약간의 불협화음을 느꼈다(아주 아주 아주 약간의..).

 

검은개가 어떠한 모종의 세력을 상징하는 존재라는 것은 제목에서부터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위의 본문에 나와있듯이 언젠가 또 만나게 될지 모르는 그런 존재들. 사회에 있는 검은 존재들. 하지만 정작 자신들도 주인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존재들. 어떤 의미에서 그런 존재들은 쉽게 볼 수 있다. 시위를 저지하는 경찰들. 시위하는 사람도 막고 있는 전경도 모두 비슷한 위치의 평범한 시민들이다. 하지만 전경들은 국방의 의무라는 미명하에 힘있는 자들로부터 그들의 하수인으로 내세워져 같은 사람들을 향해 방패와 물대포를 휘둘러야 한다. 상처입는 것은 항상 현자에 있는 그들이고 위에서 입으로만 떠드는 자들은 책임도지지 않는다. 더 극단적인 사례는 5.18이 있겠다. 5.18에서 상부의 지시에 무고한 시민들에게 따라 방아쇠를 당겼던 평범한 군인들은 아직까지 고통을 받고 있고(살해된 유족은 말할 것도 없이..) 정작 책임져야할 사람들은 29만원 가지고 세금으로 경호까지 해주며 왕족처럼 잘 지내거나 책까지 출판해가며(12.12는 군사반란인가) 잘 살고 있다. 검은개들은 이용당하고 버려질 뿐이고 그 검은개들에 물린 사람들도 그저 상처를 안고 살아갈 뿐이다.

 

이 책을 읽고나서 뒷맛이 개운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내가 청소년이 아니여서 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청소년 입장에서는 그들 또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어느 정도 모험이 가미되어 있는 좋은 소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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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침묵 세계 거장들의 그림책 4
주제 사라마구 글, 마누엘 에스트라다 그림, 남진희 옮김 / 살림어린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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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은 물의 침묵

이야기가 시작되는 첫 페이지의 그림에서 강물과 주인공으로 보이는 소년의 바지에는 글자들이 적혀있다.

무언가를 볼 때 꼭 무슨 의미가 있을거라고 그 의미를 파악해내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는 영화 평론가들에게 가장 곤혼스러운 영화중에 하나라고 한다. 반면에 아이들은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냥 보이는 이미지 그대로를 즐기면 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를 평론가들은 대가의 작품이기 때문에 무언가 의미심장한 것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 정작 영화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즐기기 때문에 영화를 즐겁게 보는 것이라고 한다.

 

나 또한 의미부여에 집착하는 사람 중에 한명 이였기에 이러한 알파벳에는 분명히 무언가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 이유 없이 멀쩡한 강물에 알파벳이 새겨져 있을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인 물의 침묵과의 연관성을 생각해 보았다. 침묵이란 보통 말을 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문자(이 책에서는 알파벳으로 추정되는)을 담는 도구이다. 따라서 이 책은 뭔가 과 관련된 의미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마지막 장에는 소년이 놓쳐버린 물고기가 몸을 동그랗게 말아서 마치 문자의 하나인 것인양 묘사되어 있다. 이쯤되면 의혹은 엉뚱한 확신에 도달하게 된다.

 

.. 물고기.. 놓쳐버린 물고기는 다시 잡을 수 없고 돌아오지 않아, 강은 침묵할 뿐이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란 뜻일까? 했던 말은 주워담을 수 없고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뭐 이런건가?

 

라는 생각을 하고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나오는 옮긴이의 말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해석들이 전개되어 있었다. 아니 주제 사라마구의 주제가 고작 이걸 이야기 하고 싶었던 거야? 라는 의구심이 떠올랐지만 책 표지에 적힌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 거장들의 그림책라는 문구를 보고 ,, 내가 너무 의미부여에 집착했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이 책의 맨 뒷면을 보고 나는 다소 씁쓸함을 느꼈다. 책 가격이 무려 만원이다. 몇 일전 2살된 조카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그 얇은 책이 무려 8000원이나 한다는 것을 알고 경악한 적이 있었다. 그 책 시리즈 전부를 사는데 백만원이 넘게 들었다는 누나의 말은 거의 엽기적이였다. 출판 업계의 사정을 잘 모르기에 단정할 수는 없으나 예상되는 제조 단가에 비해 책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이렇게 양장에 고품질의 종이로 하지 않아도 충분해 보이는 책인데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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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홍 - 彩虹 : 무지개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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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어떠한 경우에도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간을 물건이나 상품처럼 수단으로 사용하지 말고 그 자체로 존중받는 하나의 목적으로 대하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류는 수 많은 인간을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수많은 흑인은 강대국들의 노예라는 수단으로 전락하였고 뿐만 아니라 계급주의 사회에는 항상 노예가 존재하였다. 불과 백여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 또한 남성들의 수단에 불과하였으며 이 외에도 인간이 수단으로써 존재한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과연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처럼 하층민만이 수단으로 전락하였는가? 아니다. 잔악한 인간이 인간을 도구로 생각하는 데에는 지위고하가 없다. 필요하면 누구든지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조선시대 세자의 아내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쳐다도 볼 수 없는 높은 신분이다. 얼핏 생각하면 모든 것을 가진 행복한 여인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나 채홍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남성위주사회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존재할 뿐이였다. 세자와 혼인하여 궁안으로 들어갈지에 대한 그녀의 의견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안에서는 권력을 위해 그녀를 하나의 수단으로써 궁궐에 들여보낸 것 뿐이다.

 

인간이 하나의 목적으로써 존재하지 못하고 도구로 전락하게 되면 그 인간은 그저 자신의 의지없이 존재하게 될 뿐이다. 남들이 휘두르는 대로 움직이는 칼처럼, 망치처럼. 하지만 채홍은 인간이였다.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 목적으로써 존재하는 인간. 그래서 채홍은 자신의 의지가 있는 존재였다. 외로웠고, 사랑받고 싶었고, 스스로 사랑을 찾아 나섰고, 어쩌다 보니 그 대상이 사회에서 금기로 여기는 동성이였지만 자신의 존엄성을 위해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사회는 개인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는다. 통제되지 않는 개인은 위험요소요 불협화음이다. 사회의 지배계층은 통제하기 쉬운 균일한 인간상을 원한다. 그리하여 개인을 도구로 전락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결국 채홍이라는 개인은 사회에 의해 처단 받는다.

 

작가가 아주 먼 옛날 어느 레즈비언(비하의 의도 절대 없음, 다른 용어를 모름)의 이야기를 굳이 다시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레즈비언은 아주 먼 옛날부터 존재하였다. 따라서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일까? 그럴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몇 백년 전의 이야기가 아직도 우리에게 가슴아프게 다가오는 것은 아직도 이 사회가 조선시대처럼 개인을 도구로 전락시키려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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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쁘리띠 뻐허리 - 나쁜나라 네팔에서 배운 착한 사랑
반영난 지음 / 반얀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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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방학기간이 되면 캠퍼스 곳곳에는 제3세계 사람들의 사진이 인쇄된 벽보들이 부착되었다. 이름하야 방학맞이 대학생 해외봉사 활동

짧게는 2주일에서 길게는 2달 정도까지 참가국도 다양하고 체류기간도 다양하며 참가비용도 다양하다. 방학때 무얼해야 방학이 끝나고 나서 내 스펙을 높여주는 증서를 마련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몇몇 학생들은 지원서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잊고 살았다 어렸을 적부터..’라는 과거 이야기부터 불투명하기 그지 없었던 미래도 그 순간만큼은 장차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이라는 선명한 그림으로 바뀐다.

 

그래서 일까. 나는 해외봉사활동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특히 단기간 특집?으로 행해지는 종교단체나 대학생의 봉사여행은 그저 취미활동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봉사에는 자신의 삶이 녹아들어가야 한다. 마더 테레사나 이태석 신부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처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봉사가 아니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삶은 분명 일반인들에게는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해외로 나가지 않더라도 주변에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많다. 왜 그사람들을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굳이 해외까지 나가는 걸까? 주변의 사람들을 돕는 것은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한번 도와주면 계속 찾아오면 어떡하지?’ ‘한 번 가기 시작하면 왠지 계속 가야할 것 같은데..’ 등과 같이 나의 삶의 영역을 침범할꺼라는 두려움. 누군가는 아니라고 제3세계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못살아서 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국내에 거류주인 제3세계 노동자들에게는 한번이라도 관심을 가져본 적은 있는가? 아니라면 왜? 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기 때문에? 거리를 더럽히기 때문에? 위화감을 조성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러한 이유로 나는 대부분의 봉사활동은 그저 남을 돕는 것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의 다른 취미생활에 비해 조금은 이타적일지도 모르는 취미생활로 생각한다. 진정 그들을 돕고 싶다면 어설프게 며칠 다녀오는 것보다 그 비행기 값을 아껴서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그들에게 훨씬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는 해외봉사활동 한번 다녀온 적도 없는 주제이기에 사실 이런 판단을 내릴 자격은 없다. 해보지도 않은 주제에 구구절절이 욕할 자격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서 나는 혼란스럽다. 이 책의 저자도 어느 정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p. 21

이런 마음 어떨까. 난 그들에게 고마웠다. 나보다 불행해줘서.

그래서 내가 적어도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게 해 주어서 고마웠다.

 

취미활동으로써의 봉사라는 의도가 조금은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현지에서 좌충우돌 하면서 아이들과 사랑을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읽다 보면 저자의 진심을 의심하기는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만남은 처음부터 이별을 예정하고 시작된다는 점에서 나는 여전히 회의적이다.

 

p. 127

비까스, 내 꼴을 봐. 너 찾으러 오느라 이렇게 됐어. 보여? 내가 얼마나 널 사랑하는지? 그래도 안 돌아갈래?”

그랬더니 비까스가 대뜸 내 마음에 못질을 한다.

미스는 한국으로 가버릴 거잖아요. 어서 가요. 왜 날 데리러 왔어요. 난 여기서 할머니랑 살 거에요. 미스는 왜 날 데리러 왔어요.”

 

그렇다 저자는 결국 그곳을 떠난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라하더라고 결과적으로 남겨지는(버려지는?) 사람들은 여전히 네팔의 어린이들이다. 1년정도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저자는 다시 자기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다시 삶으로 돌아와 힘들 때 꺼내볼수 있는 추억이 생겼을 것이고 네팔의 어린애들은 어떻게 될까? 또 새로운 사람이 와서 정을 붙이면 또 떠나가는 것일까? 내가 너무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맞다. 최대한 부정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하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그래 사람이 만나면 헤어짐도 있는것이지.. 어쩌겠냐 저기서 평생 살수도 없는 노릇이고 1년 고생했으면 나보다는 훌륭한 위인이다.. 그들만의 삶이 있겠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결국 결론은 없다.

 

그래도 나만의 생각을 덧붙여 보자면, 자신의 삶을 쏟아붓지 않을 것이라면 해외봉사는 가지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일상에서부터 주변이 외국 노동자들, 소외받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랑이 점점 넓어져서 네팔까지 가는 날이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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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일까? 1
김인호 그림, 남지은 글 / 홍익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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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이라는 측면에서 별다른 가치도 없고 아무도 읽지 않을 서평에 이런 사족을 다는 것이 열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당신이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이미 누군가가 이 것을 읽는다는 뜻이 되겠고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이 글을 읽어 볼 사람이 없기 때문에 괘념치 않고 써봐도 괜찮을 듯 싶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이 사족을 단다.

 

이 서평은 별 다른 까닭없이 매우 부정적이고 편향적인 서평이 될 예정이다. 따라서 읽는 이로하여금 눈살을 찌푸르게 할 우려가 있으니 이 책(우연일까)에 대해 좋은 감정을 품고 있거나 별다른 생각이 없던 분들, 또는 기분을 상하고 싶지 않으신 분들은 읽지 말아주시기를 바란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철저히 개인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라는 개인이 겪은 것들을 토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세계는 주변으로 한정되어있고 나는 근본적으로 그 안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갖게 된다. 그래서 나름 자신있게 말한다.

 

이건(이 책에서 묘사하는) 사랑이 아니다.

 

우연일까?’는 사실 새로울 것은 전혀 없는 만화이다. 그래서 결국 끝까지 보지 못하고 중간에 접었다(1권은 다 봤다). 하지만 결말은 쉽게 예상된다. 뻔하니까. 남녀 몇이 서로 얽히고 설켜있다가 몇몇은 잘 되고 잘 되지 못한 몇몇은 어디론가 떠나겠지. 중간에 뭐 부모나 자신들과는 상관없는 사람들 때문에 고비도 몇 번 찾아 올테고...(근데 이게 뭐 꼭 나쁘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해 아래 새로운 건 없다고도 하니까)

 

사실 이 만화에서 그리는 것들이 현실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실적인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사랑이 이렇기에 그것이 만화로 표현될 것인가 아니면 만화에서 이게 사랑이야! 라며 반복적으로 이야기하기에 현실의 사랑이 그런 것으로 생각되어버린 것일까?

 

이러한 류의 만화에서는 대부분 사랑이란 서로 보고싶어서 안달이 나고 잠시도 연락이 안되면 안절부절하고 사소한걸로 삐졌다가 이벤트 같은 것에 풀어지는 신파로 묘사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상대에 대한 숨막히는 열망. 이러한 관계에서 개인은 연인에 잠식되어 간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열정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만화는 현실이 닥쳐올때쯤 하여 행복하게 막을 내린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서로 그리워하고 중간중간 한번씩 애달파하고 정렬적으로 몸을 섞고 항시 그렇게 24시간 서로를 생각하며 뜨겁게 달아오르는게 사랑인가? 한순간도 떨어져 있지 않는 것?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열이 다 타고 재만 남았을 때, 그래도 상대와 함께 하고 싶다면, 그때부터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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