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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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상당히 문제적 용어라고 생각하지만, <작은 아씨들>이나 <빨간머리 앤> 아니면<소공녀> 같은 소설들을 예전에는 이른바 '세계 소녀 명작'이라고 불렀다. 누군가와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한번씩은 꼭 이 화제를 꺼내게 된다. 얇게 축약된 '동화'로만 받아들였던 소녀들의 이야기 중에서 무얼 제일 좋아했나요? 


오래도록 질문과 대답들이 쌓여가면서 나는 우연히, 그렇지만 꽤 흥미로운 지점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하루키 소설들에도 감흥이 없었다. '앨리스' 하면 떠오르는 금발 소녀와 푸른 원피스, 하얀 시계토끼의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는 이들은 드물다. 하지만 소설로서의 앨리스 스토리에 대해 묻는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일단 <이상한 나라> 및 <거울 나라> 완역본을 끝까지 읽었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고, '정신사나운 맥락없음을 꾹 참고 독파해봤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더라'는 감상이 많았다. 그리고 그 솔직한 의견은 하루키 팬이 아닌 사람들에게 지금껏 가장 많이 들은 말이기도 하다.


사실은 나도 비슷한 까닭으로 하루키의 소설보다 에세이를 훨씬 더 좋아하는 편이다. 똑같이 잘 가다듬어진 문장들이어도, 똑같이 개인 내면에 깊이 천착하고 있어도, 똑같이 바람 내음이 많이 묻어나더라도, 인적사항이 명확한 에세이 속의 '나'를 이해하기가 7배 정도 쉽다. 국가, 도시, 가족관계, 학교, 직장을 모두 다 밝혀놓는다 해도 하루키 월드에 사는 '나'는 초연하여 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가 반복되는 일상을 아무리 잘 꾸려나가도 대지에 발을 붙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인물은 가끔 모래나 물을 넘어서서 거의 공기에 가까울 만큼 물리적인 무게감이 없고, 심지어 '여기, 바로 이 곳'이 아닌 '저 곳(때로는 그 곳)'으로 자주 건너간다.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은 앨리스보다도 더 '이상한 나라'에 오래오래 머물러, 이러다가는 조만간 '여기'가 희미해질 것만 같다. 독자와 주인공을 이어주는 것은 '여기'에 있다는 공통점밖에 없는데도 말이다. 


불 같은 에너지가 폭발하고 다음 전개를 기다릴 수가 없어서 무아지경으로 책장을 넘기게 하는 글을 읽는 것은 차라리 쉽다. 책에 담긴 사나움이 나를 끌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하루키 소설을 읽는 일은 그와는 많이 다르다. 작가는 모든 트릭을 파헤치는 추리소설과 정반대 위치에 서 있고 독자는 그가 말해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혼자 메워나가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이 그렇기는 하지만, 하루키 소설은 독자가 무엇으로 공백을 채웠는지가 무척 잘 드러나게 되는 창작물이다. 



나는 이번 겨울이 가장 맹혹한 추위를 떨치고 있을 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처음이라고 해도 될 만큼 심하게 앓았고, 고통과 약 기운으로 인해 하루의 절반을 수마에게 바쳐야 했다. 빛과 소음에 민감해진 육체는 가벼운 식사와 잠 이외의 모든 활동을 거부했지만 몽롱한 정신으로도 조금씩 책을 읽는 것만은 허용해주었고, 나는 가끔 무릎에서 떨어지고 마는 무거운 책을 느릿느릿 읽어나갔다. 


똑, 똑 소리를 내며 활자들이 물방울처럼 나에게 흘러들어왔고,

그 결과 내용물이 모조리 바닥나고 만 모래시계처럼 공허한 내 안을 채운 건 '서사'가 아니라 '묘사'였다. 


나는 지금껏 하루키 작품들을 읽으며 '왜'라든가 '어째서' 따위의 이유와 해명을 많이 요구해왔고, 그건 어떤 분석을 참고해도 만족스럽게 충족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의미를 캐내려는 노력 없이 그저 눈에 들어오는 그대로 문장들을 받아들였다. 아무런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어떤 반박도 하지 않은 채 작가가 서술하는 풍경이며 표현하는 심상들을 마음에 쌓아나갔다. 그러는 동안 나는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아름다운 시의 몇 행이 된 듯한 기분.' 며칠 동안 내가 했던 것은 독서였지만, 사실은 그림을 그리거나 옷감을 짜거나 레이스 뜨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에 가까웠다. 낮과 밤이 흔적도 없이 나를 통과하는 동안 검은 글자들만이 너울대는 명주 천으로 화했다가 스케치로 변했다가 색채를 띠기도 하고 다시 빛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여기 100%의 여자아이를 만나 첫사랑에 빠진 소년이 있고 그들은 서로의 100%를 원한다. 기적과도 같은 선명한 감정과 눈부신 광경을 소년은 언제까지나 잊지 못하고, 소녀와 함께 만들어낸 멀고 먼 도시는 그들이 쏟아부은 시간과 감정을 먹고 자라나 완전한 실체를 갖추게 된다. 소녀를 잃어버리고 어른이 된 '나'는 갑작스럽게 그 도시로 끌려들어갔다가(1부) 또 홀연히 돌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더니(2부), 3부 마지막에서는 1부와 다른 선택을 한다. 시간이 흘러가며 계절이 바뀌고, 머무는 공간이 달라지고, 이름을 가진 인물과 성명을 짐작할 수 없는 캐릭터가 교차되어 나타난다. 


작가는 이 서사의 배경을 아주 끈질기게 써내려간다. 정교한 세밀화를 그리는 사람처럼 공들여. 영원히 끝나지 않는 베 짜기를 시도한 페넬로페처럼 지치지도 않고. 긴 시간을 들여 토대를 잘 쌓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공간을 찬찬히 자아낸다. '나'의 뇌리에 박힌 장면들은 몇 번이고 리플레이되며, 토씨만 조금 달라진 문장들이 계속해서 겹쳐진다. 반복노동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은 되풀이 속에서 나는 주인공이 그리워하는 소녀와 그가 마음을 준 사람들과 그가 머문 자리들을 눈으로 본 것처럼 환히 떠올릴 수 있었다. 


열일곱 소년의 눈에 비친 열여섯 소녀의 뒷모습. 연녹색 원피스 자락과 노란색 비닐 숄더백에 굽 낮은 빨간색 샌들. 강물에 둘러싸인 곱고 하얀 모래톱과 초록빛 여름풀 사이에 있던 소년소녀. 나이든 소년이 찾아간 그 도시. 광장에 서 있는 바늘 없는 시계탑.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한 줄기 강. 책 대신 오래된 꿈이 선반에 쌓여있는 해질녘 도서관, 붉게 타오르는 난로와 김을 피우는 검은색 주전자. 그 주전자가 내는 달가닥 소리. 벽과 도시를 지키는 문지기의 뿔피리 소리. 밤꾀꼬리가 우짖는 소리. 단각수들의 발굽 소리. '나'에게 약초차를 끓여주는 소녀의 모습. 그 소녀가 입고 있던 노란색 레인코트. '오래된 도시'가 아니라 '현실'의 도서관을 둘러싼 새하얀 겨울. 정사각형 반지하 방에서 타닥타닥 타는 사과나무 고목의 향을 맡으며 떠올리는 '그 도시'의 사과 과자 맛. '현실'에서 마시는 완전무결한 홍차. 선택을 앞둔 '내'가 소녀에게 '내일 보자'라는 말 대신 '안녕'이라는 작별인사를 전했을 때 서서히 바뀌어가던 소녀의 표정. 


쓰고 있는 동안 나의 안쪽 깊은 곳에도, '내'가 느꼈던 투명하고 고요한 슬픔이 찰랑거리며 차오른다. 주인공은 자신이 흘린 단편적 정보만을 듣고 도시의 지도를 그려낸 '옐로 서브마린 소년'을 놀라워하지만, 이 책을 손에 쥔 사람이라면 누구나 소설 속 정경을 그리듯이 회상할 수 있으리라. 작가가 상상한 장면이 독자의 마음에도 아로새겨지는 마법. 이것이야말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가진 회화적인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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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돌 안에 이미 상(像)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걸 발견하는 게 조각가의 임무라고 단언했다. 그는 대리석에 갇힌 신을, 천사를, 인간을 발견하고 그가 자유를 찾도록 도왔다. 그간 하루키 작품들을 읽어온 독자라면 눈치챘겠지만, 이 소설에는 작가가 확립한 본인만의 스타일(패턴, 캐릭터 조형, 자주 쓰는 소재, 스토리 구조)이 집대성되어 있다. 그동안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물줄기가 모두 모여 흐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오래된'이라는 형용사가 수도 없이 등장해 우리에게마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작가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도시에 골똘히 빠져들었는지 알 수 있다. 후기에서 본인이 직접 언급하듯이 이 소설은 그의 원형(原型)이자 이를테면 그의 '씨앗'이다. 동어반복이나 자기복제에 관한 비판을 받아온 하루키지만 사과 씨앗에서 복숭아가 자랄 수는 없는 법이고 그는 최선을 다해 사과나무들을 키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주어진 하나의 세계를. 그렇기에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운 다음 열매 맺는 걸 지켜봐온 이들에게 바치는 '사과 과자'일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도 가상세계라는 메타버스 개념이 낯설다. SNS 프로필을 바꾸면서도 아바타라는 말이 생경하다. 현실 세계가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하는 나, 아니 어쩌면 나의 분신(그림자). '나'라는 한 인간이 두 곳에 존재할 수 있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체셔 고양이처럼 그리고 하루키 월드의 주인공들처럼? 여기에 있긴 하지만 정말로는 여기에 없고 여기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아닐 수도 있다는 평행세계 소재를 통해 루이스 캐럴과 하루키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싶은 걸까? 앨리스와 하루키 월드의 인물들은 정말로는 어디로 가고 싶었던 걸까? 


하루키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개업했던 재즈카페 간판에 체셔 고양이가 그려져 있었다는 일화를 알게 된 뒤로 나는 하루키 신작을 펼칠 때마다 앨리스와 체셔 고양이의 대화를 상기했다. 앨리스가 길을 잃고 헤매거나 곤란을 겪을 때면 나타났다가, 곧 허공에 웃음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 고양이를. 


Would you tell me, please, which way I ought to go from here?

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가르쳐줄래?

That depends a good deal on where you want to get to.

그건 네가 어디로 가고 싶은가에 달렸지.

I don't much care where.

난 어디라도 상관없는데...

Then it doesn't much matter which way you go.

그러면 어느 길로 가도 상관없지. 

...So long as I get somewhere.

어딘가 도착하기만 한다면야... 

Oh, you're sure to do that, if only you walk long enough.

그럼. 넌 분명히 도착하게 돼 있어. 오래 걷다 보면 말이야. 


하루키는 무엇이 옳으며 그러므로 어느 길로 가야 한다고 가르쳐주는 창작자가 아니다. 그는 늘 어디로 가도 상관없다고 그건 당신의 마음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목적지가 어딘지 모르더라도 걷다 보면 길이 당신을 어딘가로 데려가줄 거라고.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마지막 장까지 읽었을 때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도착했구나. 그러니 '나' 역시 길을 잃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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