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함락 1945 걸작 논픽션 26
앤터니 비버 지음, 이두영 옮김, 권성욱 감수 / 글항아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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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어떤 것을 깊게 공부하는 일을 '해상도가 높아지는 과정'이라고 표현한다. 유튜브 영상을 볼 때 144P 화질과 4K 화질이 비교 불가할 만큼 다른 것처럼, 지식의 밀도가 높아지는 과정도 그러하다. 어떤 일을 자세히 알게 되면 이전에 그것을 흐릿하게 보던 때로는 돌아갈 수 없다. 인식과 이해가 넓어지고 깊어질 때마다 따라오는 뿌듯한 만족감과 성취. 하지만 아는 것이 힘이라면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많다. <빨간 머리 앤>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는 소설 속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전달했다. '이 전쟁은 적어도 내 지리지식을 넓혀주고 있어요. 석 달 전 나는 세계에 폴란드 로즈라는 곳이 있는 줄도 몰랐으니까요. 들어도 아무 것도 몰랐을 테고 알려고 생각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뭐든지 다 알고 있어요- 그 면적, 위치, 군사상 의미에 이르기까지요.' '한때는 나도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마음쓰지 않았지요. (지금으로 말하자면) 지식은 넓어질지 모르지만 감정적으로는 괴롭답니다.' <베를린 함락 1945>를 읽는 일이 바로 그렇다. 



나는 전쟁을 전혀 모르고 겪어보지도 않았으니 작가의 말대로 '무장해제된' 사람 그 자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사회인이 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 전체가 전쟁들의 결과물로 이루어졌음을, 전란을 빼놓고 우리 사회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함을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무언가가 궁금해서 땅을 파고 있으면 손에 걸려나오는 건 언제나 전쟁이었다. 막연한 공포심 때문에 그걸 내려놓은 다음 다시 묻어버리면 이내 평화로워질 수 있었지만, 그건 영원히 무지한 채로 살아가는 일이었다. 작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올해 6.25 전쟁(한국전쟁)이 정전 70주년을 맞이하자 나는 미루고 또 미루던 1~2차 세계대전에 관해 읽기 시작했다. 매일 검색 포털에 뜨는 전화(戰火) 소식들을 외면하고 넘어가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다. 



<베를린 함락 1945>가 늦게 번역되었다고 아쉬워하는 분들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더 적절한 때를 고를 수 없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올해 5월 말, 러시아가 바흐무트를 점령한 직후 이를 1945년 베를린 함락에 비유하며 대대적으로 선전했던 일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3개월 뒤 서점의 세계사 신간 코너에는 이 책과 함께 <제3제국사>가 함께 진열되어 있었고, 관련된 책들이 줄지어 꽂힌 아래 칸에는 <1945>, <제2차 세계대전>, <아르덴 대공세 1944>, <한국전쟁의 기원>, <독소전쟁>,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들이 있었다. 세상 어딘가는 오늘도 전장의 화마에 휩싸여 있고 우리는 아직 세계대전을 옛 이야기라고 치부하고 잊어버릴 만한 시대에 살고 있지 않다. 



내가 조금이나마 다각도로 공부했다고 할 만한 전쟁사는 한국의 삼국통일전쟁과 임진왜란밖에 없는데, 그로 미루어보면 전쟁을 다룬 글들은 크게 정치​·외교와 전략​전술·군사지리·무기 두 파트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베를린 함락 1945>는 후자 쪽에 약간 더 가깝다고 느껴졌기 때문에(작가가 전직 육군 장교 출신이다!), 전자에 관련된 배경지식들을 먼저 알고 나서 읽는 것을 권한다. 책은 

1. 1945년 4월 16일~5월 2일에 걸쳐 

2. 러시아의 붉은 군대 Vs. 독일군 사이에서 벌어진 

3. 베를린 전투

를 다루고 있으므로 전쟁의 결정부터 전개, 귀결, 영향과 유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건사고들을 통사(通史)적으로 설명해주기를 바라는 일은 무리다. 물론 저자는 다짜고짜 바로 1945년 봄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지 않으며, 300쪽에 가까운 분량을 통해 서서히 나치 독일의 수도를 향해 다가간다. 유럽을 점령했던 제국의 수도에서 '비인간적인 도적의 수도'로 전락한 베를린으로. 



700쪽이 넘는 벽돌책이지만 무게는 의외로 가볍다. 양장본이고 제본이 잘 되어 있어서 어느 쪽이든 안정적으로 잘 펼쳐지고, 책을 고정시키는 문진과 독서대의 도움 없이도 읽기 편했다. 지정학적 이해를 돕기 위한 지도 자료가 충실하며, 2차 세계대전이나 독소전쟁의 양상에 대해 잘 모르고 이름만 들어본 몇몇 인물들의 이야기를 찾고 싶을 때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만큼 마지막에 인물 색인이 잘 정리되어 있다. 동생은 괴벨스와 그의 가족에 대한 부분만 골라 읽더니 대단히 불유쾌한 얼굴로 책을 돌려주었는데, 며칠 뒤 히틀러의 최후만큼은 봐야겠다고 다시 한 번 책을 가져갔다. 



시종일관 돋보이는 부분은 작가의 서술 방식으로, 그는 러시아 연방 국립기록보관소에 있는 미공개문서까지 수집하며 검증된 사실을 생생히 보도하고(시사 저널리즘), 나날의 사건들이 역사와 인간에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지 평가하며(서사 기록) 우리로 하여금 격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문예). 독자는 비버의 글을 읽으며 단지 사실을 정확하게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온갖 정서를 느끼는데, 그 감정의 진폭이 너무 엄청나서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였다. '현실의 사건과 사실을 충실하게 기록한' 역사는 어떻게 문학이 되는가. 이게 문학(文學,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한 예술)이 아니면 대체 뭐란 말인가? 



저자가 연표와 사건과 잘 알려진 인물들을 쫓아갈 때는 빠른 속도감과 적당한 거리감 때문에 흥미진진하기까지 했다. 문장은 간결하고 대사가 많아 더더욱 소설 같다. 그러나 그가 참호와 방공호에 있는 개개인의 일기​·서신​·회고록을 가까이 클로즈업해서 눈앞에 들이댈 때마다 나는 이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사실의 증언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얼어붙었다. 군대를 지휘하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총 한 번 제대로 들지 않은 하인리히 힘러를 비웃고 경멸하는 일은 간단하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듣고 계속 읽겠다는 용기를 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계속 멈추고 주저하고 책을 덮어 달아났다. 

어떤 어머니들은 동사해 둘둘 말아놓은 아기 위에 엎드려 울었다. 다른 어머니들은 눈 속에서 정신을 잃고 길가의 나무에 기대 앉아 있었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은 것인지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던 아이들은 무서워서 그저 울며 가까이에 서 있었다. 어차피 그 추위 속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 죽은 아이를 포기하고 싶지 않은 어머니의 곡소리가 침묵을 깼다. 공포와 공황이 나를 덮쳤다. 그런 참담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리고 이 광경 뒤로 무섭고 강력한 환상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우리가 바로 이들이었다. 우리에게 닥칠 미래였다. 



여성이라면 끝까지 이 책을 잡는 일이 더 괴로울 것이다. 약육강식에 따른 재앙, 방화, 파괴, 약탈, 그리고 강간. 전시가 아니더라도 늘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하지만 전쟁 범죄로서의 강간이 어떤 것인지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지 않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그리신 <빼앗긴 순정>을 보고 뱃속이 싸늘한 한기로 가득차 부르르 떨었던 경험을 나만 갖고 있는 것은 아니리라. 2002년 이 책이 출간되기 전 러시아는 베를린에서의 집단 강간을 이야기하는 일은 '나치 침략에 저항한 소련의 신성한 성취'를 더럽힌다며 반발했다. 붉은 군대의 성전(聖戰)은 그런 비도덕적 사건 따위로 흠집이 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상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러시아는 아직도 그때처럼 '독일인, 특히 독일 여성들(그리고 모든 적대국)에 대한 우리 병사들의 행동은 전적으로 옳다!'고 말하고 싶은 듯하다. 그렇다고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일이며, 우리는 <함락된 도시의 여자: 1945년 봄의 기록>에서 '사냥당한' 피해자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저자 역시 그 책을 일부 인용해 대조국전쟁(The Great Patriotic War)의 추악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2023년, 우크라이나 인권변호사 마트비추크는 고발한다. 처벌받지도 단죄되지도 않은 전쟁 범죄가 21세기에 어떻게 재현되는지. 



글쓴이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의 관점에서 강간이 어떤 것인지도 말한다. 윤간은 병사들 사이에서 유대감과 동지애를 형성하는 방법이기도 하며, 성폭행이 그들에게는 휴식 겸 성적 욕구도 충족하는 거라고 설명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눈앞이 아득해졌다. 전쟁 강간은 최초에 복수라는 명분 아래에서 잔인하고 즉각적인 폭력으로 나타난다. 적국과 적군에 대한 분노를 터뜨리기 위한 대체물로 힘없는 여성이 선택되고, 가해자의 비인간성이 가장 두드러지는 단계도 이때다. 일찍이 적이 저질렀던 짓을 정당하게 돌려주는 것 뿐이고, 이제는 적이 마땅히 그 고통을 겪을 차례이므로 여성들은 증오를 받아내야 할 보복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다 강간은 전쟁의 전리품을 취하는 행동과 흡사해지고, 더 나아가면 피해자들도 생존에 대한 위협과 거듭된 굶주림으로 인해 저항을 포기하게 된다. 음식을 얻기 위해서, 조금이라도 안전하게 보호받기 위해서, 단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여성들이 소련군 장교의 '점령군 아내(현지처)'가 되었다. 히틀러는 '남자가 위대할수록 여자는 더 하찮은 존재가 되어야 한다'며 강한 남성을 찬양했지만, 독일 남성들은 이 거대한 패배에서 도피하기를 원했다. 여성들이 집단 강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하고 말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던 모습과 달리 남자들은 이 문제를 언급하는 것조차 회피했다. 



저자는 세뇌를 통해 학습한 체제 이념이 인간을 어떻게 붕괴시키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증거를 제시한다. 적들을 절멸시키고 자신도 죽기를 원할 만큼 삶이 산산조각난 히틀러 유겐트 소년들. 페이지가 넘어가고 윤간당한 피해자들이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자 가해자들이 말한다. '러시아 병사들은 여자를 쏘지 않아. 독일군이나 그러지.' 적보다 내가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믿는 이념은 증오를 심어주는 선전활동으로 더 강화되고, 결국 이쪽도 저쪽도 우리의 분노는 비이성적이지 않고 우리가 하는 복수는 맹목적이지 않다는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야 만다. 그러니 내가 더 우월한 사상의 소유자이며 따라서 너희를 해방시키러 왔다고 생각한 소련군들이 독일 농가의 부유한 생활상을 보고 혐오감을 느끼다 못해 격노한 것도 당연하다. 그들은 질투로 내가 가질 수 없는 라디오, 피아노, 거울, 도자기를 깨부수었다. 배신감에 휩싸여 (장교라면 몰라도 자신은 절대로 쓸 수 없을) 가죽 소파를 찢어버렸다. 그러다가도 온갖 자재들을 본국으로 부치기에 여념이 없었다. 



영화 <오펜하이머>를 보고 온 사람이라면 여기서도 현대 화학​·물리학이 자본주의며 군국주의와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또 그게 얼마나 비극인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시체를 가공해 비누를 만드는 극악무도한 행위를 만나는 건 시작에 불과하다. 소련은 독일의 실험실과 공장들을 빼앗아 본국의 핵 프로그램에 활용하려 했지만 사회주의의 패배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독일에서 많은 장비를 강탈했으나 원자재가 없고 연구 환경이 받쳐주지 않아 그 모든 게 그저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군사주의와 궤를 같이 하여 발달시키려던 과학은 자본의 힘 없이는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서문부터 마지막 인용자료에 이르기까지 줄곧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명멸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독소전쟁의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이 책을 골랐던 거지만, 그보다는 부조리한 세상사에도 완전히 파묻히지 않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계대전 하면 떠오르는 히틀러의 마지막 행적에 대해 상세히 쓰여있으나 그건 전혀 놀랍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한 망상도(이런 망상병자를 춘원 이광수는 '가정도 없고 향략도 없고 오직 애국으로 생활을 삼고 있는 사람'이라며 숭배했다. 세계대전이 한국인의 근현대 정신세계와 절대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상자가 아무리 많아도 미래를 위한 영광의 씨니까 괜찮다며 소리친 광기도, 비루한 권력을 탐한 비열한 추종자들도 마찬가지다. 히틀러는 불멸을 원했고 확실히 역사에서 절대로 잊히지 않는 치욕을 얻겠지만 나는 그를 필요 이상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다. 그것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불완전한 인생사를 더 잊지 못할 것 같다. 모든 이름을 떠올릴 수는 없더라도, 그들의 이야기는 내 안에 오래도록 고여있을 것이다. 



너무 어려 '어린이 병사'라 불리며 지옥으로 내던져진 아이들, '우리는 곧 집으로 돌아갈 테고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겠지'라는 노래를 부르는 붉은 군대, 화장실 휴지를 양팔에 가득 들고 죽은 여자, 후송된 중상자들 사이에서 자신의 연인을 발견하고 그가 숨을 거둘 때까지 끌어안고 있던 노르웨이 간호사, 소련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부르던 예배 광경, 인간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든 봄이면 여전히 아름답게 피어나는 튤립과 라일락, 베를린의 정복자로서 자신이 엘리트라고 생각했던 소련군 병사들, 절망적인 상태에서 영웅적인 죽음을 맞이하려고 수류탄을 던지려던 어린 소년과 미친 짓 하지 말라고 그를 저지한 병장, 조국의 변절자라며 총살당한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죽지 못해 살아남았고 살기 위해 포로수용소에서 일했을 뿐이건만), 수도 바르샤바가 파괴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독일에 대한 어떤 자비심도 가지지 않았던 폴란드인 부대들 그러나 폴란드가 자신의 것이라고 확신했던 스탈린, 어머니를 강간하는 소련군에게 주먹을 휘두르다 총에 맞은 13세 남자아이...... 이런 삶을 그리고 이런 죽음을 어떻게 망각 속으로 던져버릴 수 있겠나. 그것도 정전(停戰) 상태의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가. 해상도가 너무 높아져 보고 싶지 않은 것까지 알아버렸다 해서 다시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우리는 흔히 역사적 사건에 속한 인간들을 '독소전을 겪은 독일인 전체'이라는 식으로밖에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은 균질한 하나의 집단이 아니라 각각의 개별성을 지닌 존재이며, 이걸 잊는다면 과거사를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 



저자는 훌륭한 스토리텔러로 통제되지 않는 권력의 잔인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다가도 인간이 얼마나 모순된 존재인지 깊이 사유하며 극한에 놓인 이들의 최악과 최선을 번갈아가며 조명한다. 탁월한 연구가인 동시에 빼어난 문장가이기는 쉽지 않은데 앤터니 비버는 제대로 된 전사(戰史)를 찾는 탐구자와 다큐멘터리 혹은 르포 문학을 보고 싶어하는 독자 양쪽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킨다. 세계사에서 중요한 자리에 놓여있는 전투를 전문적으로 분석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 잔혹한 역사의 전환점을 어떻게 버텼는지 알고 싶은 이에게도 권한다. '몰살 투쟁만을 중심에 둔다. 우리는 적을 살려두는 식의 전쟁 따위 하지 않는다'는 연설이 흐르던 시대, 원한이 충돌하던 시기를 사람들은 무슨 수로 살아냈는가? 저자는 역사의 물줄기에서 인간을 놓치지 않는다. 



읽는 이의 정신에 많은 씨앗을 뿌리는 책이며, 그 씨앗이 어떤 방향으로 싹터 자랄지는 오로지 읽는 사람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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