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무늬
오정희 지음 / 황금부엉이 / 2006년 1월
품절


아이들의 성장속도란 바로 내게서부터 떠나느 속도와 비례한다는 것, 이젠 애착과 집착을 갖는 것으로부터(어찌 자식뿐이겠는가) 꽉 쥔 손을 풀어야 할 때라는 것, 한껏 비운 손이 충만이고 놓음이 진정한 소유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허전함과 쓸쓸함을 얼마나 더 견디고 겪어야 해방되는 거냐고, 종내 그런 평온이 오기는 오는 것이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그런게 인생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41쪽

나이라는 것은 가슴 서늘한 자각이기도 하고 희망이고 욕망이고 절망이기도 하다.-43쪽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생활, 인생에서 그렇게 단번에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벽은 없다. 밥도 한 숟갈씩 먹으며 그릇을 비우고 먼 길도 한 걸음씩 떼어놓으며 천리를 가고 생활의 벽도 한 칸 한 칸 손톱을 박아가며 기어오르는 것이고 완성과 초월에 이르는 길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64쪽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다비드 르 브르통은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는 말로<걷기예찬>이라는 긴 글의 서두를 연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의 초대라고도 한다.-66쪽

밥짓기와 글쓰기가 결코 생각처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 문학이라든가 창조적 생활이란 저 멀리서 나부끼는 깃발이 아니라 지금, 여기, 발 딛고 있는 자리를 굳건한 터전 삼아 발아하는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87쪽

이젠 정말 밥을 지어야 할 시간이고 나는 진척없는 글에서 놓여난 것을 불안하게(?) 안도한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자신에게 큰 소리로 말한다. 똑같이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매일의 삶이 창조적이지 못하다고 불평하지만 또한 그러한 일상이 구원이 됨을 알지 않는가.-154쪽

그 책은 제게 작각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한 불투명한 환상을 벗겨주고 인간에 대한 끈질긴 흥미와 탐구의 중요성, 사물의 이면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편견과 감상을 배격할 것, 착실하게 인생을 보고 또 전체로서 볼 것, 많이 쓰지 않으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는 것, 개인적인 입장에서 세계를 볼 줄 아는 개성,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줄 수 있는 보편성을 가져야 하면 무엇보다도 인간존재라는 이 기외한 사건에 깊이 참여할 것 등을 가르쳤습니다.-162쪽

고도의 집중력, 확보해야 하는 자기만의 시간과 내외면적인 공간, 어느 곳에도 길들여지거나 편안해지는 것에의 두려움, 통년과 상투성을 깨뜨려야 하는 예민한 감각과 시선, 종교나 이데롤로기나 관습 따위 어디에도 예속되어서는 안 되는 자유로운 정신을 요구하는 문학작업의 본래적 성질을 생각해 볼 때 지금이라고 별반 다르거나 쉬울것 같지는 않습니다.-165쪽

저는 그 말씀을 자신이 발 딛고 선 자릴를 부인하지 말라, 삶의 고단함과 고달픔을 받아들이며 충실하여야 한다, 도와 진리도 그 위에서 찾아내고 이루어야 한다는 말
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내게 주어진 삶의 조건에 정직하고 충실하지 않다면 어떤 높은 가치도, 진정한 아름다움도 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168쪽

그리고 "내 시 좀 들어봐라"하시며, 눈을 지그시 감고 두 손으로 예의 그 분홍 타월을 비비 틀어 짜는 포즈로 서서 <세월>을 들려주셨다.

세월 가는 것이 아까워/ 아무 일도 못한다. 그것은/ 여행을 떠나기에도/
사랑을 하기에도 아깝다./ 책을 읽거나/ 말을 건네기에도 아깝다./ 전화를 받고/
손님을 맞고 하기에는/ 더욱 아깝다/ 아까워 세월을/ 아무것에도 쓸수가/
흘러가는 모든 순간을/ 앉아서 똑바로 술이라도 마실밖에/ 술은 마실수록
취하는 것/ 아무리 마셔도/ 취해 있어도 나는 그/ 달아나는 세월의 어느 한 순간
도/ 놓치지 않는다/ 눈 지그시 감았어도/ 눈 딱 벌려 떴을 때처럼/ 달아나는 모든
순간을 지켜보는 것이/ 그냥 그렇게 지켜볼 뿐이라/ 가는구나 가는구나/
그렇다 그냥 지켜볼 뿐이다.-220쪽

세월은 덧없이 흐르는 것이라지만 마음을 실으면 아름다운 빗살과 무늬를 만들기도 하나보다.-23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