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물만두 > 감상적 부르주아의 눈물!
감상적 킬러의 고백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에는 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인 <감성적 킬러의 고백>과 <악어>. 내 눈을 끄는 작품은 킬러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악어>였다.


<감성적 킬러의 고백>은 로렌스 블록의 <켈러>시리즈가 생각나게 하는 작품이다. 킬러인 <켈러>도 자신의 직업에 어울리지 않게 점을 보며 운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킬러도 어울리지 않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갖게 된다. 마치 레옹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사건을 처리하고 은퇴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 마지막에서 그는 본래의 킬러로 돌아온다.

 

아무리 킬러가 어떤 속세의 감정을 갖게 된다 하더라고 그의 직업에 베인 습관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건 킬러는 어쩔 수 없는 킬러라는 점이다. 킬러에게 어떤 것을 바란다는 것은 그것 자체가 킬러에게도 독자에게도 환상이라고 작가는 얘기하는 듯하다. 그래서 <데이지>는 별로 흥행하지 못한 모양이다. 킬러가 킬러답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말이다.


두 번째 작품 <악어>는 내가 이 작품을 왜 이제 읽었을까 후회하게 만든 작품이다. 악어의 눈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거짓말, 속임수를 뜻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악어의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다. 쓰는 작가도 읽는 독자도 모두. 얼핏 보면 환경에 대해 말하고 있는 듯  하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단순하다. 부르주아식 논리로 환경에 접근하는 것은 악어가 흘리는 눈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악어가죽을 얻기 위해 한 종족을 말살시키고 잘 사는 회사 사장과 그런 모의를 한 일행들이 갑자기 죽어가게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처음에는 단순한 죽음이었지만 더 파헤쳐보니 독살이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무시무시하고 잔인한 일들이 숨겨져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은 악어가죽 백 하나는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저 북유럽에서는 많은 바다사자인지 바다표범인지 그들이 무수히 몽둥이에 때려 잡히고 있고 멸종 위기의 고래를 잡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알래스카 에스키모인 들에게는 고래잡이가 허용되고 있다. 파리에서는 모피 패션쇼가 인기고 중국에서는 고양이 가죽까지 벗겨지고 있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베어지고 사라졌는지를 생각하면 책을 읽는다는 것도, 책을 쓴다는 것도 이상하게 여겨진다.


그런데 그럼 이런 모든 일들을 하지 않는다면 더 나은 세계가 만들어질까? 하루 종일 노동을 해도 1달러도 못 버는 사람들이 많고, 어린 아이들이 노동력을 착취당하고 있는 실정이라지만 임금 올려 달랬더니 저임금, 혹은 더 나은 조건의 나라로 일자리 자체를 옮겨버리고 있는 실정에서 이런 말 자체가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야말로 부르주아들의 머리에서 나오는 부르주아식 감상일 뿐이라는 작가의 말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생각해보자. 쌀 시장이 개방되었다. 그래서 돈 없는 사람들은 더 싼 쌀을 사먹을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더 싼 쌀을 사먹는 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 것인가? 라면 값만 조금 올라도 가슴이 철렁하다는 그들에게 말이다. 그렇다고 무너지는 농민들을 보면서 선뜻 수입쌀을 사먹을 수도 없다.


어떤 것이 옳은지 나는 모른다. 어떤 것을 극단적으로 나쁘게 몰아갈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왜냐하면 나무는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종이로 만든 책은 계속 읽고 싶기 때문이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생각을 가지고 환경이라든가 노동 운동에 대해 말하는 것 자체가 내겐 버겁다. 나는 부르주아식 사고가 몸에 베여있는 모양이다. 이 땅의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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