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역사
에밀리 프리들런드 지음, 송은주 옮김 / 아케이드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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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주인공 메러디스는 신생아와 자신을 차례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떻게 저기서 여기로 올 수 있는 걸까요?” 본 지 오래라서 정확한 대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미는 상통한다. 내가 영재일지도 모른다는 부모표 콩깍지효과로 온갖 기대를 받았을 돌 사진을 보며 얘는 진짜 내가 될 줄 몰랐을 텐데하는 마음과 같다. “너는 자라 겨우 내가될 거라는 김애란식 단언(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297)은 아니어도 못잖은 좌절감이 끼쳐오는 일 말이다.

 

성장에 관심을 두게 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다르다, 이 일을 하고 난 후의 나는 높은 확률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다, 같은 생각을 행위의 동기로 삼으며 가상이든 현실이든 마주치는 모든 인물들의 변화를 주시해왔다.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고 인간은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걸 보면 나도 내가 아주 틀려먹었다는 좌절감에서 조금이나마 비껴 설 수 있었다. 사소해도 좋고 잠시뿐이어도 나쁘지 않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어차피 같았다. 가능성. 나는 여러모로 망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가능성. 밑창까지 떨어진 건 처음인 양 다시 올라가보기 위함이라는 가능성.

 

가능성은 실패자란 낙인을 미룰 수 있는 틈이었고, 그 틈으로 전력질주할 때 상황이 바뀌고 삶이 달라졌다. 메마르고 척박한 검은 마음들 속에서도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와중에도 계속해 꿈을 꿔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인간의 성장은 예정된 바가 없고 완결되지도 않는다는 걸 배워서.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거라는 걸 알아버려서.

 

서론이 길었지만 요는 내가 성장이야기를 몹시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성장이야기라고 쓰여 있는 것도 좋아하고 안 쓰여 있는데 내가 알아채는 건 훨씬 더 좋아했다. 이번에 읽은 에밀리 프리들런드의 늑대의 역사사춘기 소녀무시무시한 이야기라는 키워드에 꽂혀 보게 된 소설이었다. “속할 곳을 찾기 위해 어디까지 가겠니?”라는 표지 문구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부푼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기대했던 스릴러나 공포분위기 같은 건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체 사춘기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길 바랐던 건지, 그제야 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요즘 스릴러를 너무 읽었더니 머리가 장르를 잘 못 찾고 있었다. 이야기에 빠져드는데도 한참의 시간을 들여야 했다.

 

열다섯 소녀 린다는 미네소타주 깊은 숲속에서 살고 있었다. 한때 이상을 가지고 공동체를 일구었다가 실패한 부모님과 함께 외롭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어느 여름날, 호수 건너편으로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 네 살짜리 폴과 그의 엄마 패트라. 린다는 그 집의 베이비시터로 고용되고 두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사춘기의 또 한 길목을 통과했다.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죽음과 좋아하고 따르던 선생님의 성스캔들, 이곳의 여자아이들은 자라서 다들 카렌이 되어버린다는 뻔한 미래와 수상한 종교, 가난, 외로움 등으로 구성된 사춘기 속에서 린다는 한 마리의 늑대처럼 자신의 정착지를 찾아 헤맸다. 의미 불명의 애정을 시도하고 기대하면서, 폭로와 충돌을 기대하는 뒤틀린 마음을 품기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거나 구축해갔다.

 

그녀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었고 이해 안 가는 대목도 많았다. 두서없는 소설의 진행이 그런 혼란을 더 부추기는 경향도 있었는데, 두꺼운 안개 속에서 이따금 아름다운 걸 목격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장면만큼 사춘기를 잘 표현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보이는 건 읽고 안 보이는 건 지나치며 읽으면 그만이었다. 한번 살아봤던 사춘기의 불안정한 감정들이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하나 둘 떠오르는 진실들은 하나 같이 놀라웠다. 책은 그 자체로 사춘기의 응집체가 되어 책장을 덮었을 땐 한 시절을 간신히 통과한 기억 속 후련함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인상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은 어려웠다. 지금도 소설의 안개를 미처 다 뚫고 나오지 못한 것처럼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사춘기 시절을 몸 여기저기에 묻힌 채 말끔한 어른이 되지 못한 린다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 나와 린다를 두고 긴 고민에 빠졌지만 한가지 답은 분명했다. 성장 소설은 역시 옳다는 것. 벌써 이만큼이나 글을 썼다.

 

 

재판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확인이 든 것은 언제입니까? 대답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처음 만나자마자요. - P58

세월이 지나서도 그네 타는 아이를 보면 그렇게 이슬비가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나갈 때의 흥분, 중간쯤 갔다가 되돌아오는 그네, 그 가망 없음. 다음번에는, 다음번 앞으로 나아갈 때는 뒤로 다시 끌려오지 않을 거라는 헛된 믿음. 다시, 또 다시 거듭해서 시작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 P91

진실은 그 낡은 장작 난로는 마약 같았고 아이였던 나에게는 지극히 평범해서, 보지도 않고도 난로에 이끌렸고, 이유조차 궁금해하지 않고 난로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나는 아홉 살이었다. - P246

한 발짝만 더 디디면 절벽에서 떨어져. 불쌍한 어린 소녀야. 신발도 없고 배는 고프고. 누가 너를 돌봐 주었니? - P384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로 우리의 망원경을 우주로 향했고, 너무나 많은 화학물질 덩어리들이 되비치는 것을 보았다. -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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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 -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사이에서
한재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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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금니 물고 24시간을 견딘다. 그렇게 오늘 한 일을 내일도 할 수 있는 24시간을 만든다.

 

퇴사 후 나의 삶은 그런 식으로 굴러왔다. 원하는 바가 있어 직장을 버렸으니, 원하는 바를 잃지 않는 게 중요했다. 자리를 잡고 방석까지 깔아둘 참이던 회사를 나올 땐 그만한 각오가 있었던 거다. 이번만큼은 끝까지 밀어붙이겠다는. 혹 할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려와 에이 이 못난 것아! 하며 코를 비틀어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외려 더 얼굴을 들이밀어야 한다고.

 

자존심 버리고 염치는 까먹고 필요하면 간뎅이도 배 밖으로 내놓고 가끔 배도 째라 설치면서 아무튼 버티자고 생각했다. 더는 못 해먹겠다고, 스스로 뒤도 안 돌아보고 다른 길로 나설 때까진 앞으로 가는 거다. 누가 뭐라 하든 일단 내 갈 길로 발부터 뻗는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서른이 넘어 하는 퇴사에 대한 압박감이 이상한 쪽으로 발휘된 게 아닌가 싶지만 당시엔 정말 그만한 비장함이 있었다. 머릿속엔 온통 전진뿐이었고 나는 곧 성능 좋은 불도저가 되었다. 엄마 말 아빠 말 하나도 들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영혼을 갈아 넣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만 필사적이었다.

 

그러고 있는 내 뒷배경으론 꿈이란 낭만적인 말이 민망할 정도로 거대하게 깔려있었다. 죽을 만큼 안 해봐서 못 이룬 거라고 죽을 때까지 미련 떨까봐 시작한 일이었다. 그런 삶은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내게 남아있는 유일한 낭만이자 마지막 도전이라 해도 좋았다. 퍽퍽한 성격에 게으르고 모험과 도전이 싫고 매사가 무심하거나 비관적인 나에게 이런 무모함은 다신 없을 테니까. 구독자 수 70명으로 시작된 로맨스 소설 쓰기 같은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게 힘들 때가 있다. 잘하고 있고, 더 잘될 것 같은 예감이 마구마구 들다가도 문득 여기가 어딘가 싶어졌다. 모른 척 지나쳐 온 찌푸린 얼굴들이 한꺼번에 다 몰려오는 때였다. 나는 내가 뭐라도 되지 않으면 그건 정말 말이 안 되는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열심히 해왔는데, 그게 틀렸다고 하면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막막했다. 고질병 같은 시간이었고, 해가 갈수록 심화됐다. 일정 주기도 없이 지 멋대로 들이닥치는 시간이어서 멀쩡하게 잘 걷던 내 무릎을 별안간 꺾어놓기도 했다. 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이 내 손에 들린 것도 마침 그때였다. 무릎 꿇려 앉고 보니 이게 다 뭔 짓인가 싶을 때. 여기가 앞인지 저기가 앞인지 몰라서 뒤를 돌아보면 내가 찍은 발자국이 전부 다 똥으로 보이는 한여름에.

 

노력이라 쓰고 버티기라 읽는은 한재우 작가의 에세이다. 일단 제목이 뼈를 때렸는데 작가의 이력이 또 같은 자리를 쳤다. 서른 살 넘어서부터 꾸준하게 글을 썼다는 건 그렇다 쳐도 주3회 팟캐스트를 몇 년도 펑크도 없이 올렸다는 건 정말 굉장한 일이었다. 2회 연재를 해봐서 알았다. 꼴딱꼴딱 매일같이 숨이 넘어가서 간신히 살아남았었다. 매일 연재도 해봤는데 그 시간은 기억에 남은 게 없었다. 아마 난 한번 죽었던 것 같다.

 

남에게 내보일만한 창작물을 제작하는 건 대단한 일이고 그걸 주에 몇 번씩, 약속된 시간을 꼬박꼬박 지켜서 선보인다는 건 더욱더 대단한 일이다. 이 부분은 몇 번을 반복해서 언급해도 과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굉장한 일이니까. 나는 거기서 저자의 버티기 내공을 알아보았다. 저자를 향한 신뢰감이 단박에 머리끝까지 오른 건 말할 것도 없었다.

 

책속엔 34편의 에세이가 실려 있었다. 무언가를 가르치려기보단 자신의 이야기를 그저 덤덤히 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주장하는 바가 설득력이 있어서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34편 모두가 설득력이 있었다는 뜻이 되므로 그건 그거대로 대단해보였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에게, 달리는 이에게, 넘어진 이에게, 그래도 계속하려는 이에게 차례로 말을 건넸는데, 이중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 같으므로 결국은 모두를 위한 응원이라고 해석했다. 이거 참 좋은 책이잖아?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글도 재미있는데 배울 것도 많아서 읽는 보람이 있었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뜨끔할 때가 더 많았다. 억 또 내 얘기야? 소제목이 나올 때마다 나는 흠칫거리며 경계의 눈초리를 쏘았다. 저격을 하도 당해서 나 저격하려고 쓴 책인가 하는 자의식 넘치는 생각마저 들었다. ……좋은 일이었다. 집 나간 내 자의식이 그렇게라도 돌아왔으니까.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느껴보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그제야 나도 좀 내가 제대로 보이는 듯했다. 아 나 씨 또 땅바닥에 퍼져 있어.

 

이 책은 버티기 힘들 때, 하지만 버티고 싶을 때 버릇처럼 꺼내보기 좋을 책이다. 어느 쪽을 펼친들 그날의 마음을 다지는 문장 하나쯤은 주워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멀지 않은 자리에 꽂아두었다. 버티는 삶을 살아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렇고 그런 응원은 쌔고 쌨어도 귀에 들리고 마음으로 들어오는 응원은 만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곱씹게 되는 문장을 발견하면 그렇게 고맙고 기뻤다. 이 책은 그런 기쁨이 될 확률이 높았다.

 

버티는 한 우리는 기대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을 꼭꼭 씹다보면 개미 눈곱만한 오늘의 성취도 내일을 위한 커다란 퍼즐 조각처럼 느껴졌다. 세상에 헛된 노력, 헛된 버티기는 없다던 식상한 말이 오늘 처음 들어본 진리처럼 새로워지고, 어느새 나는 무릎을 탁탁 털고 일어나 노트북 앞으로 달려 나간다. 그 결과 이 글이 나왔다. 정신차려보니 어느덧 이만큼이나 써버렸는데, 버티기로 안 읽혀도 좋으니 이불킥으로 남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진짜 왜 이렇게 내 이야기 하는 게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아무튼.

모처럼 깊이 닿는 책을 만났다. 덕분에 일어설 힘을 얻었노라고 여기 써둔다. 미래에 또 퍼져 있을 나는 이 글을 보고 경험을 살려 발딱 일어나기를 바란다.

 

나의 능력은 내가 그은 한계 안에 머물지 않았으며 한계라고 여긴 곳의 근처에 있지도 않았다. 나는 그보다 훨씬 컸다. 알았건 몰랐건 막상 부딪혀보니 나는 내 생각보다 훨씬 유능했다. - P135

할 수 없다고 여기는 많은 일들 중에서, 단지 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 P135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언덕길에서 수레를 미는 일과 같다. 내버려두면 내려가기 때문에 제자리에서 편히 쉰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쉰다고 생각하는 일이 사실은 퇴보인 이유다. - P158

열정이 안 생기면 책임감으로 열심히 하면 된다. 내 삶에 대한 책임감이다. 어느 쪽이든 묵묵하게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은 똑같다. - P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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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가 돌아왔다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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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장소는 사람을 부른다. 사람이 장소를 발견하는 게 아니라 장소가 스스로 다가와 있다. 피 맺힌 땅들이 주로 그런다. 거기엔 항상 남은 이야기가 있다. 파헤치기만 하면 되는 이야기가. 파헤칠수록 발목이 꽉 잡힌 채 질질 끌려들어가는 암울한 구덩이 같은 이야기가.

 

오싹한 일이다. 지금 읽기 딱 좋다. C. J. 튜더라는 타이밍의 귀재는 본인이 돌아올 때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적확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근 1년의 기다림이 전혀 아깝지 않아졌다. 기다리길 잘했다. ‘스티븐 킹의 강력추천!’여자 스티븐 킹이라는 사실이 확장되었다!’로 바뀐 카피 위로 손을 얹고 묻고 싶어지는 맘이다. 자 그래서 다음 작품은 언제 나온다고요, C. J. 튜더 킹?

 

소설은 주인공인 조지프 손이 의문의 메일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면서 본격적인 포문을 연다. 솔직히 식상하다. 그런 일을 겪은 스릴러 주인공이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올해만 벌써 셋인지라 이건 2019년 트렌드인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저자도 몇 가지 장치를 설치한 건지 모르겠다. 아이의 머리를 박살내고 자신의 머리를 쏴 죽은 여자의 살인현장을 프롤로그로 먼저 깔아둔 거나, 고향으로 돌아온 우리의 주인공은 하필 딱 그 집을 계약해서 살기로 한다거나, 그 사건이 또 하필 그의 동생에게 일어난 일과 연관되어 있다는 직감을 빡!

 

무엇보다 주인공이 심상치 않다. 도박꾼이고 빚쟁이에 쫓기는 처지인데 교사 면접을 보러 왔다. 사기꾼 냄새가 폴폴 풍기고, 그래서인지 절뚝거리는 한쪽 다리의 역사가 한층 더 복잡해 보인다. 등장만으로도 독자의 경계심은 바짝 솟아오른다. , 이 인간 뭔가 있는데. 그리곤 바로 아차 싶지. 아 설마 나 벌써 당한 거?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 학교 선생님이라는 주인공의 직업, 네 명의 어릴 적 친구와 그들의 동요. 밝혀지는 과거와 더럽혀지는 유년기의 순수와 우정 등 전반적인 구도가 전작인 초크맨과 매우 흡사하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미스터리에 훨씬 더 치중되어 있어서 꼭 공포영화를 보는 듯하다. 공포영화에 나올법한 소재들도 다수 등장한다. 인형이나 벌레, 무덤, 뼈 같은 거. 호러라면 질색하는 나로서는 뭐 하나 상상하고 싶지 않지만, 상상하고 싶지 않아도 눈앞으로 영상이 펼쳐지는 게 소설의 마법이므로, 이따금 알 수 없는 탄성을 뇌까리며 몇 가지 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야잇 너가 왜 거기서 나와? , , ! 뭔데? 이번엔 또 뭐가 오고 있는 건데?

 

공포 영화가 그렇듯 이론적으론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더러 일어난다. 그런 일들은 딱 부러지게 설명할 수 없기에 더 무서운 건데, 그보다 더 무서운 사람들이 등장해서 나는 또 야 이씨 저 이씨하며 온 사방의 이씨들을 찾았다. 진짜 사람이 무섭다. 특히 나는 글로리아가 너무 무서워서, 그 사람이 등장할 때마다 다음 장 읽기가 무지 떨렸다. , 그렇다고 소설이 무섭다는 소린 아니다. 공포영화에 비유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비현실적인 요소가 두드러진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현실주의자거나 사건의 명료한 인과 관계를 중요시하는 독자들에겐 아쉬운 부분일 것 같기도 한데, 나 역시도 소설의 성격을 파악하지 못했을 땐 증발해버린 개연성을 찾느라고 툴툴 거렸었다. 이게 말이 되냐? 싶었는데 그래 일단 말이 된다고 치자, 하고 읽어 나가니 오싹하고 쫄깃한 게 이 작가 또 작정하고 썼구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구성도 좋고 문장도 좋다. 막판엔 기대도 안 하고 있던 반전이 후루룩 쏟아져서 정신이 멍해질 수도 있다. 장르 특성상 내용을 더 언급하고 싶진 않고 하나만 딱 더 덧붙이고 끝내야겠다. 이 작가 다음 책 나오면 또 사서 볼 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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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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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위에 고드름이 매달려있다. 하나 뽑는 걸 상상한다. 아버지에게 던질 것이다. 머리를 겨냥해 미간을 치명적으로 찌른다. 굳이 손을 안 써도 되는 방법도 있다. 고드름이 스스로 떨어지는 걸 상상한다. 지금 막 머리 위에서 떨어진 고드름이 쇄골의 움푹 들어간 곳으로 내리박혀 심장을 정통으로 찌를 것이다. 혹은 머리를 뒤로 젖힌 사이 목으로 떨어질 수도 있겠다. 어떤 지옥은 이런 파괴적인 상상을 반복하게 만든다. 누가 죽거나 내가 죽어야 끝난다.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세상엔 그런 지옥 같은 가족도 있다. 너무 병적이고 비틀려서 회복될 가망이 없는, 더럽고 역겨운데 고쳐나갈 의지조차 없는. 그래서 그녀는, 아일린은 집이란 걸 드나들 때마다, 그 얼음비수 아래를 지나게 될 때마다 상상한다. 잔인한 사고를. 우발적인 힘을. 해방을. 피 묻은 고드름은 지옥을 절단한 영웅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거기까지, 영웅은 실현되지 못한다. 아일린이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드름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현관을 지나다닌다. 그 모든 증오와 자기혐오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죽고 싶지는 않아서. 항상 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자살할 생각도 아니어서.

 

보통의 인물이 아니다. 아일린을 읽다 보면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오테사 모시페그가 그리는 아일린은 여느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굉장히 복잡하고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누구보다 증오하면서도 자발적인 노예노릇을 한다. 쉽게 격분하지만 누구에게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고, 외모에 강박적으로 신경을 쓰면서도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 자신의 더러움을 견디는 걸 좋아한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창피하게 여길 만큼 스스로를 혐오하다가도 죽은 쥐를 앞에 두고 자신의 막강한 힘을 실감하는 뒤틀린 자존감을 보여준다. 이상하다. 어딘가 확실히 망가진 사람 같다. 씻지도 않고 청소도 안 하고, 제대로 먹지도 않은 채 죽은 어머니의 옷을 제 옷처럼 입고 다니는 행동은 조금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생활이란 걸 포기해버린 사람이라면 모를까. 죽고 죽이는 상상과 직장동료를 대상으로 한 도착적인 환상에 매달리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그런 망상이 자주 등장할수록 그 속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절박함의 목소리가 들린다. 실제로 그녀도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끊임없는 환상 속에서 살았다고. 그녀가 기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요행이나 기적따위일뿐(85p)”, 현실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그나마 희망이라고 주운 게 아버지 대신 몰고 있는 차인데 배기관이 고장 났다. 딱 하나뿐인 그 현실적 도피수단을 이용하려면 아일린은 연기로 꽉 찬 차안에서 질식할 위기에 맞서야한다. 그리고 정말이지 슬프게도 그게 아일린의 꿈이다. 그녀의 가장 현실적인 계획. 질식하거나 얼어 죽을 수 있는 그 차를 타고 이 집을 영영 떠나는 것.

 

요컨대 충격적이라는 평을 들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아일린의 외형과 언동은 언제나 그녀의 집으로 연결된다는 소리다. , 그녀가 간절히 떠나고 싶은 곳, 그만큼 지옥 같은 곳, 스물네 해 동안 그녀를 키워 지금의 그녀를 완성한 바로 거기. 그리고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차릴 때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집들을 본 적이 있다. 지저분하고 음울하고 그 어디에 활기도 색채도 없는, 거친 흑백 TV화면 같은 곳.” 287p

 

살면서 한번도 만난 적 없다고, 혹시 만난다 해도 관계될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철저히 소설 속 인물로만 바라보던 아일린이 코앞까지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오테사 모시페그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바로 옆에 있어도 몰랐을, 아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을 사람과 직접 마주하게 하는. 이는 소설 속 아일린과 리베카, 리카 포크 셋이 한 공간에 있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저자는 막연한 판단으로 상대를 정의하거나 피해버리는 무책임하고 무례한 태도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언뜻 보거나 세부 밖에 볼 수밖에 없기에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닫힌 문 뒤에서 괴물이 되는 사람들(336p)”을 알아볼 능력이 없다. 그래서 실망하고 실패한다. 가난하고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은 그저 피했으므로 진실을 물어본 적도 없고, 어떤 일엔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는 정보 같은 걸 나누려 들지도 않았다. 그 결과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더한 지옥에 빠진다. 무수한 아일린이 태어난다. 그렇담 아일린의 지옥은 정말 아일린만의 문제인 걸까. 단지 그녀가 운이 나빴던 거라고 아직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늘 그 핑계로 둘러대서 습관처럼 믿고 있는 건 아닐까, 분별도 없이.

 

그 지옥의 책임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순 없지만 탈출은 당사자의 몫이었다. 아일린은 비로소 집을 떠난다. 내성적이고 게으른 성격 탓에 그동안 실천은 않고 갈망만 일삼던 태도를 드디어 관뒀다. 그 끝이 어디로 갔는지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소설은 그녀가 집을 떠난지 오십 년 후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는 이야기이고, 지금의 그녀는 이제 삶은 내게 중요하다(237)”라고 말한다는 것 정돈 밝힐 수 있겠다.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어둡고 우울한 곳일수록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해야 한다는 걸 수차례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아일린이 있고 어디에서든 아일린이 살고 있다. 여기서 아일린이란 비단 한 사람의 이름을 뜻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론 이 점이 오테사 모시페그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일린, 한마디에 너무나 많은 바람이 불어든다. 재미와 교훈 모두를 다 잡은 소설로, 다음 작품 역시 몹시 기대된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생긴 대로 살고, 하던 대로 행동하죠, 안 그래요? - P291

사랑에 대해 배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온 동네의 문을 다 두드려보고 나서야 맞는 집을 찾았다. 지금은 마침내 혼자 살고 있다. - P267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주먹으로 배를 두드리고 얼마 안 되는 허벅지 살을 꼬집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내 존재가 줄어들면 내가 겪는 문제도 적어지리라 진심으로 믿었다. - P263

그것이 내가 상상했던 인생이다. 시간이 다 되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징역살이.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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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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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안 오는 밤이면 미쓰코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지옥의 살라미 짱이라는 만화를 읽는다. 만화책을 가만히 볼에 갖다 대면 엄마 냄새가 나고 엄마의 손을 만진 듯한 기분이 느껴진다. 더 이상 만질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게 된 엄마를 추억하는 방법이다.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미쓰코는 발이 붕 떠 있는 불안정한 날들을 보낸다. 살라미짱을 좋아하고 살라미짱과 꼭 닮은 엄마가 사라져서 미쓰코의 세상은 회색이 되었다. 하지만 계속 그런 건 아니었다. 잃어버린 색이 최근 들어 하나 둘 돌아오기 시작한다. 그런 것이 인생이다, 주주고기가 지글거리며 익어가는 소리 속에 그런 말이 들린다.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조금 더 힘을 내볼까 하는 생각이 드는 목소리가.

 

요시모토 바나나의 주주는 스테이크와 햄버그 가게 주주를 중심으로 주인공 미쓰코를 비롯한 가족과 이웃들의 다사다난한 인생살이를 그린 소설이다. 가게의 활력이나 마찬가지였던 미쓰코의 엄마가 심장마비로 쓰러진 후 생기를 잃은 상실의 세계가 미쓰코와 미쓰코 가족, 이웃 사람들이 서로를 스치며 다시금 채색되어 가는 과정을 따스하게 그리고 있다. 굉장히 일상적인 게 특징인데, 그럴수록 주주라는 가게의 의미가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언제나 거기 있는 것, 그래서 더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것.

 

얼마나 많은 풍경들에 위로를 받아왔던가를 새삼 돌아보게 된다. 늘 보던 나무가 거기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 여기가 우리 동네구나 싶고, 평생 보고 자라 온 베란다 밖 풍경을 두고 가야 한다는 이유로 이사가 정말 싫었다. 거기 있어 안심되고, 없어지면 싫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그런 생각 없이 보낸다. 부모라는 존재 역시 그렇지 않을까. “어느 틈에 부모가 죽고, 이런 나이가 되다니. 믿기지 않는다(13p)”던 미쓰코의 독백은 그래서 더 크게 다가온다.

 

거기 있었는데 사라진 것들 때문에 휘청거리는 게 인생이다. 그리 생각하면 사람은 도통 혼자서는 서지 못하는 생물 같고 붙들어 쥘 무언가가 간절해 보인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단골 가게나 좋아하던 소리 같은. 주주누군가는 그 소리에 마음을 기대듯이.

 

영원한 것은 영원한 것이 없다는 사실뿐이다, 같은 진부한 말을 떠올릴 때면 어쩐지 바나나 소설의 힘도 강해지는 것 같다.

 

미쓰코의 엄마는 죽었다. 슬프지만 당연하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다. 엄마가 죽어도 엄마의 손길은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 그 자리를 채우고 그 역할을 도맡으며 이어간다. 그렇게 엄마가 있을 때와는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 간다. 그런 게 인생. 이 말은 그녀의 소설을 읽는 동안 몇 번을 반복해도 질리지가 않는다. 그건 곧 위로와 같다. 바닥을 딛고 일어선 주문이 된다. 그런 게 인생, 이 상실이 끝이 아니야.

 

한때 내가 왜 요시모토 바나나에 푹 빠져 읽었는지를 새삼 알게 해준 소설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식 인간관계(?)는 좀 어려운 것 같다. 본인들이 괜찮다니 딱히 할 말은 없는데 뭔가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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