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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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문 위에 고드름이 매달려있다. 하나 뽑는 걸 상상한다. 아버지에게 던질 것이다. 머리를 겨냥해 미간을 치명적으로 찌른다. 굳이 손을 안 써도 되는 방법도 있다. 고드름이 스스로 떨어지는 걸 상상한다. 지금 막 머리 위에서 떨어진 고드름이 쇄골의 움푹 들어간 곳으로 내리박혀 심장을 정통으로 찌를 것이다. 혹은 머리를 뒤로 젖힌 사이 목으로 떨어질 수도 있겠다. 어떤 지옥은 이런 파괴적인 상상을 반복하게 만든다. 누가 죽거나 내가 죽어야 끝난다. 죽음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세상엔 그런 지옥 같은 가족도 있다. 너무 병적이고 비틀려서 회복될 가망이 없는, 더럽고 역겨운데 고쳐나갈 의지조차 없는. 그래서 그녀는, 아일린은 집이란 걸 드나들 때마다, 그 얼음비수 아래를 지나게 될 때마다 상상한다. 잔인한 사고를. 우발적인 힘을. 해방을. 피 묻은 고드름은 지옥을 절단한 영웅의 모습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거기까지, 영웅은 실현되지 못한다. 아일린이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닫기 때문이다. 그녀는 고드름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현관을 지나다닌다. 그 모든 증오와 자기혐오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죽고 싶지는 않아서. 항상 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자살할 생각도 아니어서.

 

보통의 인물이 아니다. 아일린을 읽다 보면 누구나 다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오테사 모시페그가 그리는 아일린은 여느 소설에서 만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었다. 굉장히 복잡하고 강렬한 인상을 준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를 누구보다 증오하면서도 자발적인 노예노릇을 한다. 쉽게 격분하지만 누구에게도 싫다고 말하지 못하는 성격이고, 외모에 강박적으로 신경을 쓰면서도 참을 수 있는 한계까지 자신의 더러움을 견디는 걸 좋아한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 자체를 창피하게 여길 만큼 스스로를 혐오하다가도 죽은 쥐를 앞에 두고 자신의 막강한 힘을 실감하는 뒤틀린 자존감을 보여준다. 이상하다. 어딘가 확실히 망가진 사람 같다. 씻지도 않고 청소도 안 하고, 제대로 먹지도 않은 채 죽은 어머니의 옷을 제 옷처럼 입고 다니는 행동은 조금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다. 생활이란 걸 포기해버린 사람이라면 모를까. 죽고 죽이는 상상과 직장동료를 대상으로 한 도착적인 환상에 매달리는 모습은 또 어떠한가. 그런 망상이 자주 등장할수록 그 속으로 도망치고 싶다는 절박함의 목소리가 들린다. 실제로 그녀도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끊임없는 환상 속에서 살았다고. 그녀가 기원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요행이나 기적따위일뿐(85p)”, 현실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그나마 희망이라고 주운 게 아버지 대신 몰고 있는 차인데 배기관이 고장 났다. 딱 하나뿐인 그 현실적 도피수단을 이용하려면 아일린은 연기로 꽉 찬 차안에서 질식할 위기에 맞서야한다. 그리고 정말이지 슬프게도 그게 아일린의 꿈이다. 그녀의 가장 현실적인 계획. 질식하거나 얼어 죽을 수 있는 그 차를 타고 이 집을 영영 떠나는 것.

 

요컨대 충격적이라는 평을 들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아일린의 외형과 언동은 언제나 그녀의 집으로 연결된다는 소리다. , 그녀가 간절히 떠나고 싶은 곳, 그만큼 지옥 같은 곳, 스물네 해 동안 그녀를 키워 지금의 그녀를 완성한 바로 거기. 그리고 우리가 이 사실을 알아차릴 때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모두 이런 집들을 본 적이 있다. 지저분하고 음울하고 그 어디에 활기도 색채도 없는, 거친 흑백 TV화면 같은 곳.” 287p

 

살면서 한번도 만난 적 없다고, 혹시 만난다 해도 관계될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철저히 소설 속 인물로만 바라보던 아일린이 코앞까지 가까워지는 순간이다. 오테사 모시페그는 그런 능력이 있었다. 바로 옆에 있어도 몰랐을, 아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을 사람과 직접 마주하게 하는. 이는 소설 속 아일린과 리베카, 리카 포크 셋이 한 공간에 있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기도 한데, 저자는 막연한 판단으로 상대를 정의하거나 피해버리는 무책임하고 무례한 태도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우리는 전체를 보지 못하고 언뜻 보거나 세부 밖에 볼 수밖에 없기에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닫힌 문 뒤에서 괴물이 되는 사람들(336p)”을 알아볼 능력이 없다. 그래서 실망하고 실패한다. 가난하고 불편해 보이는 사람들은 그저 피했으므로 진실을 물어본 적도 없고, 어떤 일엔 어떻게 대비해야 한다는 정보 같은 걸 나누려 들지도 않았다. 그 결과 지옥에 사는 사람들은 더한 지옥에 빠진다. 무수한 아일린이 태어난다. 그렇담 아일린의 지옥은 정말 아일린만의 문제인 걸까. 단지 그녀가 운이 나빴던 거라고 아직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늘 그 핑계로 둘러대서 습관처럼 믿고 있는 건 아닐까, 분별도 없이.

 

그 지옥의 책임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순 없지만 탈출은 당사자의 몫이었다. 아일린은 비로소 집을 떠난다. 내성적이고 게으른 성격 탓에 그동안 실천은 않고 갈망만 일삼던 태도를 드디어 관뒀다. 그 끝이 어디로 갔는지는 말할 수 없다. 다만 이 소설은 그녀가 집을 떠난지 오십 년 후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는 이야기이고, 지금의 그녀는 이제 삶은 내게 중요하다(237)”라고 말한다는 것 정돈 밝힐 수 있겠다.

 

기분이 좋아지는 소설은 아니다. 하지만 어둡고 우울한 곳일수록 눈을 크게 뜨고 응시해야 한다는 걸 수차례 깨닫게 해주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아일린이 있고 어디에서든 아일린이 살고 있다. 여기서 아일린이란 비단 한 사람의 이름을 뜻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론 이 점이 오테사 모시페그를 읽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하고 있다.

 

아일린, 한마디에 너무나 많은 바람이 불어든다. 재미와 교훈 모두를 다 잡은 소설로, 다음 작품 역시 몹시 기대된다.

 

 

 

 

본 리뷰는 출판사 경품 이벤트 응모용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생긴 대로 살고, 하던 대로 행동하죠, 안 그래요? - P291

사랑에 대해 배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고, 온 동네의 문을 다 두드려보고 나서야 맞는 집을 찾았다. 지금은 마침내 혼자 살고 있다. - P267

나는 간이침대에 누워 주먹으로 배를 두드리고 얼마 안 되는 허벅지 살을 꼬집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내 존재가 줄어들면 내가 겪는 문제도 적어지리라 진심으로 믿었다. - P263

그것이 내가 상상했던 인생이다. 시간이 다 되기를 기다리는 기나긴 징역살이.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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