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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의 역사
에밀리 프리들런드 지음, 송은주 옮김 / 아케이드 / 2019년 6월
평점 :
절판
미국드라마 《그레이 아나토미》에서 주인공 메러디스는 신생아와 자신을 차례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떻게 저기서 여기로 올 수 있는 걸까요?” 본 지 오래라서 정확한 대사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미는 상통한다. 내가 영재일지도 모른다는 부모표 콩깍지효과로 온갖 기대를 받았을 돌 사진을 보며 “얘는 진짜 내가 될 줄 몰랐을 텐데”하는 마음과 같다.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될 거라는 김애란식 단언(『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년, 297쪽)은 아니어도 못잖은 좌절감이 끼쳐오는 일 말이다.
성장에 관심을 두게 된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다르다, 이 일을 하고 난 후의 나는 높은 확률로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다, 같은 생각을 행위의 동기로 삼으며 가상이든 현실이든 마주치는 모든 인물들의 변화를 주시해왔다. 세 살 버릇은 여든까지 가고 인간은 도저히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이 틀렸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런 걸 보면 나도 내가 아주 틀려먹었다는 좌절감에서 조금이나마 비껴 설 수 있었다. 사소해도 좋고 잠시뿐이어도 나쁘지 않다. 그것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어차피 같았다. 가능성. 나는 여러모로 망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가능성. 밑창까지 떨어진 건 처음인 양 다시 올라가보기 위함이라는 가능성.
가능성은 실패자란 낙인을 미룰 수 있는 틈이었고, 그 틈으로 전력질주할 때 상황이 바뀌고 삶이 달라졌다. 메마르고 척박한 검은 마음들 속에서도 죽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와중에도 계속해 꿈을 꿔볼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인간의 성장은 예정된 바가 없고 완결되지도 않는다는 걸 배워서.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거라는 걸 알아버려서.
서론이 길었지만 요는 내가 성장이야기를 몹시 좋아한다는 말이었다. 성장이야기라고 쓰여 있는 것도 좋아하고 안 쓰여 있는데 내가 알아채는 건 훨씬 더 좋아했다. 이번에 읽은 에밀리 프리들런드의 『늑대의 역사』는 ‘사춘기 소녀’와 ‘무시무시한 이야기’라는 키워드에 꽂혀 보게 된 소설이었다. “속할 곳을 찾기 위해 어디까지 가겠니?”라는 표지 문구가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부푼 마음으로 책을 펼쳤는데 기대했던 스릴러나 공포분위기 같은 건 튀어나오지 않았다. 대체 사춘기 소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길 바랐던 건지, 그제야 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요즘 스릴러를 너무 읽었더니 머리가 장르를 잘 못 찾고 있었다. 이야기에 빠져드는데도 한참의 시간을 들여야 했다.
열다섯 소녀 린다는 미네소타주 깊은 숲속에서 살고 있었다. 한때 이상을 가지고 공동체를 일구었다가 실패한 부모님과 함께 외롭게 살아가는 중이었다. 어느 여름날, 호수 건너편으로 한 가족이 이사를 왔다. 네 살짜리 폴과 그의 엄마 패트라. 린다는 그 집의 베이비시터로 고용되고 두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서 사춘기의 또 한 길목을 통과했다.
자신을 가르치던 선생님의 죽음과 좋아하고 따르던 선생님의 성스캔들, 이곳의 여자아이들은 자라서 다들 ‘카렌’이 되어버린다는 뻔한 미래와 수상한 종교, 가난, 외로움 등으로 구성된 사춘기 속에서 린다는 한 마리의 늑대처럼 자신의 정착지를 찾아 헤맸다. 의미 불명의 애정을 시도하고 기대하면서, 폭로와 충돌을 기대하는 뒤틀린 마음을 품기도 하면서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거나 구축해갔다.
그녀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었고 이해 안 가는 대목도 많았다. 두서없는 소설의 진행이 그런 혼란을 더 부추기는 경향도 있었는데, 두꺼운 안개 속에서 이따금 아름다운 걸 목격하며 정처 없이 떠도는 장면만큼 사춘기를 잘 표현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하므로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보이는 건 읽고 안 보이는 건 지나치며 읽으면 그만이었다. 한번 살아봤던 사춘기의 불안정한 감정들이 유독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고 하나 둘 떠오르는 진실들은 하나 같이 놀라웠다. 책은 그 자체로 사춘기의 응집체가 되어 책장을 덮었을 땐 한 시절을 간신히 통과한 기억 속 후련함이 다시금 찾아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인상적인 경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이 책은 어려웠다. 지금도 소설의 안개를 미처 다 뚫고 나오지 못한 것처럼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사춘기 시절을 몸 여기저기에 묻힌 채 말끔한 어른이 되지 못한 린다가 된 기분이었다. 이런 것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는지, 나와 린다를 두고 긴 고민에 빠졌지만 한가지 답은 분명했다. 성장 소설은 역시 옳다는 것. 벌써 이만큼이나 글을 썼다.
재판에서 그들은 계속해서 질문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확인이 든 것은 언제입니까? 대답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처음 만나자마자요. - P58
세월이 지나서도 그네 타는 아이를 보면 그렇게 이슬비가 내리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나갈 때의 흥분, 중간쯤 갔다가 되돌아오는 그네, 그 가망 없음. 다음번에는, 다음번 앞으로 나아갈 때는 뒤로 다시 끌려오지 않을 거라는 헛된 믿음. 다시, 또 다시 거듭해서 시작하지 않아도 될 거라는. - P91
진실은 그 낡은 장작 난로는 마약 같았고 아이였던 나에게는 지극히 평범해서, 보지도 않고도 난로에 이끌렸고, 이유조차 궁금해하지 않고 난로를 미워했다는 것이다. 그해 겨울 나는 아홉 살이었다. - P246
한 발짝만 더 디디면 절벽에서 떨어져. 불쌍한 어린 소녀야. 신발도 없고 배는 고프고. 누가 너를 돌봐 주었니? - P384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게 되리라는 기대로 우리의 망원경을 우주로 향했고, 너무나 많은 화학물질 덩어리들이 되비치는 것을 보았다. - P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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