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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성적인 사람입니다 - 오늘도 사회성 버튼을 누르는 당신에게
남인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4월
평점 :
고등학교 뮤지컬부 때 내가 맡은 배역의 이름은 ‘메소드’였다. 겉옷을 담요처럼 두르고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다른 사람들을 흘긋흘긋 올려다보는 게 몸에 밴 인물이었다. 한 마디 꺼낼 때마다 눈치를 보고, 그마저도 기어들어갈 만큼 작은 소리거나 더듬기 일쑤였으니. 무대에 올라 첫 대사를 치는 순간 관객들은 이미 메소드의 성격을 다 파악했을 것이다. 그리곤 의아해했겠지. 주인공(그의 이름은 ‘비트’였다)은 저런 작자에게 대체 뭘 배운다는 거야?
하지만 메소드는 반전인물로 극중 가장 화려하고 빠른 무대(무려 ‘fame’을 불렀다)를 선보이며 주인공을 깨우쳐주는 인물이었다. 지금도 기억난다. 어서 한 수 보여주라는 친구들의 떠밀림에 족족 떠밀리기만 하다, ‘아이 부끄러운데’라는 말로 마지못해 수락하던 메소드의 눈빛을.
희번득했다. 보호막 같던 외투를 집어던지고 안경마저 어딘가 내팽개치며 무대 중앙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그 녀석은 이미 좀 전의 메소드가 아니었다. 무대를 종횡하며 이 무대는 내꺼고 나는 지금 기분이 끝내주게 좋아,를 포효할 준비가 되어있는 폭주기관차일 뿐.
누군가와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졌다. 너무 길고 뜬구름 잡는 애기 같아서 시도해본 적은 없지만, 메소드야말로 내 성격을 제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해가 갈수록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뭐랄까. 나는 되게 무섭고 부담돼서 뭐든 나서는 게 끔찍하게 싫은데 막상 등 떠밀려 나오면 어설픈 게 또 싫어서 아예 다른 사람으로 돌변해버리는 성격, 이랄까.
내가 보기에 내 성격은 내성적이야 외향적이냐로 딱 가르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기엔 뭔가 복잡했고, 실제로도 어느 쪽으로든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해서 오랜 시간 정체성의 혼란을 겪기도 했다. 나는 ‘~하는 척’쟁이인가, 줏대가 없는 건가, 변덕이 죽 끓나, 모순의 결정판인가. 모두 다 그 시절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던 질문들이었다. 그때 이 책을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클지도 모르겠다.
남인숙 작가의 《사실, 내성적인 사람입니다》는 내성적인 사람들을 위한 공감 에세이다. 지극히 내성적이라는 저자의 경험을 토대로 내향인이기에 누릴 수 있는 행복과 그만의 고충을 담고 있다. 일상적인 문체라 읽기 쉬운데 다루고 있는 정보도 많아서 좋았다. 배우기 좋은 책이었다. 나에 대해서, 내 성격에 대해서 몇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나를 한층 더 정리할 수 있었다. 자신에 대해 배우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다. 생각지 못한 공감과 위로가 많아서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던 책이다.
저자에 의하면 나의 복잡미묘한 성격은 ‘사회성 버튼’이라는 말로 간단히 정리될 수 있었다. 사회성 버튼이란 내성적인 사람들이 몇몇 상황에서 의식 속에 누르는 버튼을 말했다. 버튼을 누르는 순간 내향적 성향을 감추고 외향인인 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일 같지만 이미 수십 년을 그렇게 살아온 나로서는 머릿속이 번쩍하는 깨달음이었다. 그래, 나는 사회성 버튼이 겁나게 작동을 잘하는 인간이었던 거로군!
내외향적 성격은 표현이 아니라 기질의 문제라는 말도 흥미로웠다. 발표를 잘하거나 남들과 잘 뛰어논다고 해서 외향적 성격이 아니고, 말수가 없거나 표현을 잘 안한다고 해서 내성적인 게 아니다. 우리는 사회화를 거치며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 노력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내향인은 외향인의 성격을 외향인은 내향인의 성격을 따라가게 된다는 점 역시 재미있는 사실이었다. 이는 결국 성격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일로, 어떤 성격이 더 낫고말고 할 게 아니라는 사실로 이어졌다. 쉽게 말해 내성적인 성격이 열등함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다. 왠지 좀 속이 뻥 뚫리는 대목이었다. “외향인의 모습을 표준으로 삼고 “저렇게 바뀌어야 한다””라는 강박에서 그제야 좀 자유로워지는 것 같았다.
이처럼 책 속에는 속이 시원해지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했다. 내가 하고 싶었는데 꾹 참고 넘겼던 이야기거나, 미처 정리를 못해서 말 못했던 사연들이 반갑게 튀어 나왔다. 내성적이라서 집으로 숨어드는 건 당연하지만 그에 그치면 안 된다는 말도 뜨끔하면서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나 역시 저자만큼 스스로를 지독하게 내성적인 편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연신 끄덕거리게 되는 게. 저자의 모든 경험담에 공감한 건 아니었지만 대체로 내 이야기인 것처럼 읽을 수 있었다.
내향인이 쓴 내향인의 이야기이다 보니 아무래도 치우친 감이 없진 않지만, “한국인의 80퍼센트가 내향인으로 분류된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하니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책이 될 거라 생각한다. 개인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은 사람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자신을 알고 남을 알아서 보다 더 나은 관계를 꾸려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책이었다. 쉽게 읽고 많이 배울 수 있는데, 개운함과 위안이 덤으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