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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 ㅣ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3
스즈키 루리카 지음, 이소담 옮김 / 놀(다산북스) / 201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의 화려한 전적은 알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문득 ‘이게 정말 열네 살이 쓴 거라고?’하는 생각이 들 때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나도 모르게 열몇 살을 돌아보게 만드는 소설이었다. 삶의 결을 들여다 보는 시선과 눈에 쏙쏙 들어오는 단정한 문장들을 읽다 보면 ‘천재 소설가’라던 작가의 수식어가 절로 떠오르곤 했다.
이 책은 작가가 열네 살에 출간한 첫 소설집이다. 출간 직후 10만 부 이상 판매되어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책으로, 엄마와 단둘이 사는 초등학교 6학년 다나카 하나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난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젊은 엄마와 그런 엄마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어린 딸의 일상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때론 웃기고 자주 웃프며. 팬티는 전부 헐렁헐렁해서 어디로든 다리와 몸을 넣을 수 있고, 친구들과 놀러가기로 약속했지만 차마 돈 달라는 얘기를 할 수 없어 방과 후 자판기 밑을 훑고 다녀야 하는 형편이 이렇게 담백하게 표현될 수 있다는 데 놀랐다. 섬세하고 정직하다. 유머가 있고 과장은 없다. 천진하고, 그래서 뭉클한.
하나미의 엄마는 “어쨌든 살아있으라”는 염원을 담아 딸아이의 이름을 붙였다. 나는 그게 그녀가(그리고 이 책이) 주는 가르침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개미처럼 일하고 개처럼 먹는(265p)”거라는 둥 매사 깔깔 웃어넘기는 둥 영 알쏭달쏭하고 대책 없어 보이는 사람이지만 빨간색 플래그를 덥석 붙일 만큼 기똥찬 명언을 전수해준 장본이기도 했다.
혹시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슬픈 일이 생기면 일단 밥을 먹으렴. 한 끼를 먹었으면 그 한 끼만큼 살아. 또 배가 고파지면 또 한 끼를 먹고 그 한 끼만큼 사는 거야. 그렇게 어떻게든 견디면서 삶을 이어가는 거야. 266p
좋은 건 배워야지.
가난은 벗기 어려운 옷이다. 하나미와 하나미의 엄마도 언제까지 반값 스티커가 묻은 음식들만 사 먹을지, 일용할 양식으로 은행 줍는 일을 그만두게 될지, 그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게 꼭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모녀는 그걸 명쾌하게 가르쳐주었다. 입시 문제로 고통 받는 신야에게, 그리고 독자에게. 가난은 제일의 문제가 아니라고, 사실 우리는 더 큰 문제를 잊곤 한다고.
용서하거나 용서하지 않거나, 그런 게 어디 있어. 엄마는 앞으로도 내 엄마인 걸. 280p
다시 태어나도 엄마 딸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하는 딸과 그 엄마를 생각해봤다. 의외로 특별하게 떠오르는 건 없었다. 조금 웃고, 조금 다투는. 그러다 아무 이유 없이 불쑥 서로를 꼭 끌어 안아보기도 하는.
엄마와 나, 가족과 나에 대해서 많이 생각해볼 수 있던 책이었다. 자극적이거나 억지스런 감동 없이도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책이기도 했다.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엄마 이야기를 울지 않고 듣고, 할 수 있다는 게 제일 좋았다.
예전에 엄마랑 만약에 다시 태어난다면 뭐가 좋을지 얘기한 적이 있다. 부자가 좋다고 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벌레가 좋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먹고 배설하고 그냥 사는 거야. 삶의 보람이니 의무니 과거니 장래니 일이니 돈이니 하는 것과 관계없이 단순하게 살다가 죽는 게 좋겠어.”
나는 하나도 안 좋을 것 같지만 벌레든 동물이든 괜찮으니까 다시 태어나도 엄마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2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