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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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강의도 빼먹고 여학우 휴게실에서 뒹굴며 읽었던 책 속엔 그런 구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을 배워왔기 때문에 여자는 속임수를 배웠고……”*

 

어떤 대목에서 그런 말이 나왔는지, 그래서 결국 어쨌다는 건지, 다 잊어버렸지만 마침표까지 이어지지도 못한 그 문장만큼은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찍어낸 듯 기억하고 있다. 아마 당시의 충격이 오늘까지도 이어져오는 듯하다. 그 책은 여러모로 나를 때리고 전율시켰는데, 꼭 그렇게 흉터처럼 남은 문장들이 있었다. 뿌리처럼 나를 받치거나, 사이다 속에 정수리부터 처박혔다 나온 것처럼 얼얼하고 찝찝하게 스스로를 환기시키는 주문들이.

 

당시 나는 대학생활에 깊은 회의를 느끼고 있었고, 눈곱만치도 융통성이 없는 애라서 그럭저럭한 하루도 필요이상으로 고되게 보내던 중이었다. 지금보다 더 거짓말에 치를 떨 때고, 학창시절과는 차원이 다른 마음의 폭우에 시달렸다. 공교롭게도 폭우의 근원은 거짓말로 이어져서 그야말로 악순환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경멸과 분노. 그런 것들이 하루라는 여백을 새까맣게 채우고 나면 나는 공벌레처럼 몸을 말고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꼬리는 말아지지 않고, 앓는 소리를 내긴 싫었다.

 

지금의 나로는 견딜 엄두도 나지 않는 시간들이다. 뭐가 그렇게 힘들었냐고 물으면 식상한 대답을 들려줄 수밖에 없다. 내가 싫었다. 정확하게는 웃고 떠드는 나를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잘 보이려고 안달하도록 설계된 인형 같았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말을 섞고 세상 제일 친한 사이처럼 술잔을 주고받다 귀가하는 길이면, 언제나 같은 걸 물었다. 자신의 웃음이 역겹게 느껴지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서 살면 좋은 거냐고. 일부러 돌고 돈 골목길이 구만리다. 뻑하면 운동화 뒤축에 구멍이 뚫려서 비오는 날마다 젖은 발로 세상을 디뎌야했다. 축축함. 찝찝함. 울적함. 짜증. 설움. 왜 양말은 젖고 지랄이냐고 뜬금없이 주저앉아 울던 것도 다 그때 얘기다.

 

그런 역사를 갖고 있어 그런가.

 

나는 이 책이 꽤 불편했다. 푹 빠져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도 문득문득 익숙한 염증의 냄새를 맡았다. 남의 눈에 들고 싶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지 않을까. 멈출 수 있기를 바라면서도 계속 그런 식으로, 별뜻도 없이 대놓고 교태를 부린다고 여겨질 만한 태도로 말을(367p)” 해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로즈의 일생은 그래서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그것이 혹 그녀의 수많은 행동 중 한가지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거기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잘 보이기 위해 스스로를 포장하는 사람들의 굴욕과 수치를 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과, 시샘의 눈을 즐기는 못난 자아, 누군가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과 어떤 곳에서 열리는 파티라도 초대받고 싶은 마음. 냉정하고 초연한 작가의 문체를 따라 거리감을 유지하다가도 불현듯 로즈에게 들러붙은 건 그런 이유였다. 하필 그런 경험을 갖고 있었다. 가장하고 과장하는 삶을 살아봤었다, 내가.

 

열편의 이야기들은 결국 넌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니?에 가닿는다. 가난한 마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길을 찾으려 했던 여자는 무수한 시도를 했고, 실패를 했고, 어느새 중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앉아있다. 그 순간조차도 그녀는 다분히 연극적으로 보인다. 떠나온 삶과의 간극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극적 효과(334p)”를 내려는 희극처럼. 늘 떨쳐내지 못했던 이상한 수치심(367)”을 여전히 느끼며.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뭐라고 생각할까. 어릴 적 그녀를 까내리기 위해 던져진 질문 앞에, 징소리처럼 자주 귓전을 울리던 그 말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이쯤 등장하는 어릴 적 친구는 식상하면서도 안심이 된다. 그게 내가 나의 부끄럽고 아팠던 시절을 여기에 쓸 수 있게 된 이유다. 마주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주었다. 이젠 로즈의 행동력을 실천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조금 덜 연극적으로, 누가 봐도 희극이게.

 

 

*(전혜린,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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