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않은 날이 더 많을 거야 - 삶에 서툰 나를 일으켜준 한마디
김지수 지음 / 흐름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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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신에게 특별한 한 마디쯤은 있을 것이다. 유명인사가 한 명언일수도 있고 좋아하는 책이나 영화의 제목일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는 노래가사가 떠오른다. 정말 좋아하는 가수인 오지은이 부른 인생론의 한 구절이다. ‘아는 만큼만 말하고 모르는 건 배우면 되지.’ 모르는 걸 아는 척 허세부리지 않고 부끄러워하지도 말며 열심히 배워야한다고 나를 독려해주는 말이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그 노래의 맨 첫 구절을 주문처럼 외운다. ‘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자.’ 그럼 꽉꽉 틀어 막힌 숨통이 좀 트이는 기분이 들고 진정이 된다. 포기하지 않고 곧 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처럼 어떤 한 마디의 말이 삶에서 아주 특별한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 <아프지 않은 날이 더 많을 거야>는 그런 특별한 한 마디를 모은 책이다. 서른 개의 특별한 한 마디는 김지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아프지 않은 날이 더 많을 거야>는 그 성장의 느낌표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사막 같은 내 가슴에 단비를 내리고, 분노로 질주하는 내 다리를 묶어 쉬게 만들었던 소박한 문장들, 노래들, 말들. 이 책은 그 말이 언제 어느 순간 내 삶에 흘러 들어와 나를 성장시키고 나갔는지에 대한 소소한 기록이다. 6p

 

 

   김지수에게 특별한 한 마디를 제목으로 그에 얽힌 이야기가 이어지는 패턴이다. 특별한 문장들이 영화, 노래 가사, 책 구절 등등 여러 곳에서 나오는 만큼 이야기들도 다채롭다. 가부좌를 트는 아버지나 매화꽃 같았던 엄마, 이십 대의 추억과 워킹맘의 이야기 등등. 오디션 프로그램인 케이팝스타를 보고 쓴 이야기도 있고 영화 여배우들의 촬영담도 있고 유명 작가들과의 만남과 배우들의 이야기 또한 볼 수 있다.  노희경의 <꽃보다 아름다워>, 신경숙의 <세상 끝의 신발>, 양희은의 노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은 반가웠고 이해인 수녀님, 배우 고 장진영, 영화 <배우들>의 이야기는 새로웠다. 그리고 정말 편하게 읽었다. 20년차 인터뷰어답게 글도 참 단정하다고 생각했다. 수월하게 읽히면서도 시시한 문장이 없었다. 흥미로운 소재들로 쉽고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니 책장이 경쾌하게 넘어갔다.

 

 

   북밴드에 쓰인 삶에 서툰 나를 일으켜준 한마디라는 문구처럼 우리를 응원해주고 위로해주는 이야기를 가득 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아주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은. 잔잔한 미열의 이야기들. 마지막 책장을 덮고도 그 기분 좋은 미열이 오래오래 남았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장 - ‘인생은 사건이 아니라 반응이다’ 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리액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내가 ‘기브 업give-up’으로 반응하기 전에는 어떤 것도 ‘패배’가 될 수 없다는 확신 같은(30p) 걸 내게도 만들어줬다. 특별한 한 마디를 더 갖게 되어 뿌듯하다. 이것으로 살아가면서 한 번은 덜 넘어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며 안심이 된다. 착각일지라도 일단은. 매우 안심.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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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생각날 때마다 길을 잃는다 - 전영관.탁기형 공감포토에세이
전영관 지음, 탁기형 사진 / 푸른영토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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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천히 음미해야 해. 안 그러면 놓치고 말아.

 

   도무지 더듬기 어려운 문장이 있다. 단어가 커다란 돌부리라서 문장 속 빈틈마다 눈동자가 쉬어 가야만 하는 글이 있다. 옆으로 가다가 물음표를 달고 되돌아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부분 시가 그랬다. 시인들이 만들어낸 단어는 내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졌다. 감각기관 전부를 열어놓고 산다. 천 개의 눈을 다 꺼내 걸어두고 고막은 산 하나를 덮을 크기로 확대시킨다. 바늘쌈지에 손을 넣는 마음으로 촉감을 키운다(263p)는 시인 전영관의 글도 다름없었다. 나에겐 천 개의 눈도, 산만한 고막도, 그만한 촉감도 없었으니까 쉽게 읽히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대가 생각날 때마다 길을 잃는다>를 아주 오래 읽었다.

 

   <그대가 생각날 때마다 길을 잃는다>는 탁기형 사진작가와 전영관 시인이 함께 한 공감포토에세이다. 탁기형의 사진 한 장에 전영관의 글이 짝처럼 구성되어 있다.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장면들의 사진이 책 속의 글을 더 가까운 이야기로 느끼게 했다. 사진보다는 글에 더 집중되어 있다. 단순한 감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담는 글이어서 그리 가볍다고는 볼 수 없다. 400페이지 가까운 분량인데 빈틈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그만큼 작품으로 빼곡하다.

 

   도저히 내 머리로 그려낼 수 없는 문장을 읽고 있을 때는 이보다 더 난해한 외국어도 없겠다며 투덜대기도 했었다. 그럴 땐 탁기형의 사진을 뚫어져라 봤다. 사진에서 영감을 받아 쓴 글이기 때문에 글만으로 어려울 때는 사진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오래 걸린 독서에 지치긴 했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내가 맞닥뜨린 걱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아, 이 많은 문장들을 언제 다 필사하지? 옮겨 써두고 자주 보면서 오래오래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이 그리도 많은 것. 좀 아이러니한 결과지만 늘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익숙해진 나였기에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면을 잘 볼 수 있는, 그러니까 나보다 눈이 두 개 쯤은 더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의 깊이를 더 잘 알 수 있었을 거라고, 그래서 내 것과는 비할 수 없이 큰 기쁨을 느낄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더한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시를 읽는 기쁨은 하나다. 글 속에 들어가 작자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완벽에 가깝게(절대 완벽히 알 수는 없겠지)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의 체험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낄 때. 그 때의 전율! 아무도 모를 비밀의 낙원을 글을 쓴 사람과 나만이 보게 된 것 같은 특별함이랄까. 전영관의 글도 그렇다. 그가 본 신세계를 많이 들여 봤다. 전부를 볼 수 있도록, 노력은 나의 몫이다.

 

   -花

 

 

 

사진과 함께 글귀가 적혀 있다.

글귀는 본문에서 가장 돋보였던 문장으로. 

 

 

왠지 어디선가 봤을 것 같은 장면.

사진은 주변 가까이의 장면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야기도 더 가깝게 다가온다. 

  

 

제일 좋았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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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너무 익숙해서 - 느리게 여행하기
서제유 지음 / 미디어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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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뭐지, 이 익숙한 기분은. 책장을 아주 느리게 넘기면서 계속 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석연치 않은 익숙함. 이국적인 사진과 작가의 단상에 적응될 무렵에서야 알아챘다. 나는 이런 글들을 아주 많이 봐왔다. 한창 미니홈피가 붐이었던 시절에, 하루에도 수십 개씩. 타인에게는 없는 독보적인 이미지를 확보하고 그 밑에 짧은 글을 기록하는 패턴은 낯이 익다 못해 나에게도 배어버린 글쓰기 방법 중 하나였다. 서제유의 미니홈피를 꼼꼼히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책을 읽었다. 아, 이 사진은 정말 좋네. 이 글은 정말 공감된다. 그런 부분에는 포스트잇으로 표시를 해두었다. 마치 예전 내 미니홈피로 스크랩을 했던 것처럼. 누구나 다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겠다, 싶었다. 언제 읽어도 부담되지 않을 책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게 있다면 여행에세이에 내가 기대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여행자들의 기록을 통하여 보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듣고자 했다. 자세할수록 좋았고 그 속에 어떤 정보나 쓰는 이의 깨달음이나, 사건에서 오는 감동 같은 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떠나지 못하는 이쪽에서는 떠나 있는 그쪽의 체험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고 세세한 여행에 관한 기록을 나열하는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그쪽이 밟고 있는 세상이 배경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서제유의 <오늘이 너무 익숙해서> 는 내게 그 부분을 충족시켜주지 못해서 아쉬웠다. 이 책에는 떠남, 자아, 사랑, 대화, 여정의 다섯 파트가 있는데 내가 기대한 부분은 대화 파트에 조금 나왔다. 물론 나는 이 책이 작자의 단상을 주로 기록하고 있다는 사전 정보를 몰랐으니까 엉뚱한 기대를 혼자 했다가 실망한 걸 수도 있다. 그래도 역시 아쉬운 건 아쉬운 거다.

 

   작가의 여유가 느껴지는 것은 좋았다. 누구나 꿈꾸는 여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녀가 부러운 것은 당연하다. “언젠가 너의 온몸에 내 발이 닿을 수 있게 해줘.”라고 오늘도 지구에게 기도하고 있을 그녀. 서제유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보다 더 자세한 여행 이야기를 듣고 싶다.

 

   -花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과 짧은 글귀는

오래 전 심취했었던 미니홈피를 연상시켰다.

바로 스크랩할만한 페이지.

 

 

단상의 기록.

마지막 문장이 오래 남았던.

 

 

마음에 드는 페이지엔 퍼가요~♡+스크랩 대신 포스트잇을 붙였다.

비가 토닥토닥 거린다니. 진심으로 놀랐던 부분.

앞으로 비가 오는 날이면 이 페이지가 생각나겠지.

그리고 무조건 싫었던 비가 위로로 다가오는 날이 생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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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 제4회 중앙장편문학상 수상작
이수진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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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주 그런 질문을 받았다. ‘너는 왜 슬픈 노래만 들어?’, ‘너는 음침한 이 글이 좋니?’, ‘이상이니, 인간실격이니, 넌 이런 책들이 정말 재미있다고 읽는 거니?’, ‘고전은 무슨 놈의 고전이야. 그거 다 아는 척하려고 그러는 거 아냐?’, ‘배경음악 봐. 연주곡 뭐니? 분위기 있는 척 하고 있네.’

 

   사실 뭐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내가 글을 쓸 때 가사가 없는 연주곡을 듣고 제목만으로도 철학자를 연상시키는 책을 집적이는 건 순전히 내 마음인거니까. 슬플 때 겁나게 슬픈 음악을 주구장창 듣는 일을 왜 타인에게 이해시켜야 하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어떻게도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꼭 상대를 납득시켜야만 하는 미션을 받은 사람처럼 해명을 해야 했다. 마치 내가 되게 이상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에 휩싸여서, 변명을 하듯 말이다. 그 때 내가 이수진의 책을 알았다면 구구절절 떠들 필요가 없었겠지. 이 책을 들어 보여주면 그만이었을 테니까. <취향입니다 존중해주시죠>

 

   내게 곱지 않은 질문을 던졌던 이들이 이 책에선 고양이 애호가들로 나온다. 딱히 고양이 애호가들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그들이 가장 두드러지는 무리였을 뿐이다. 그들 전부를 말하는 것도 아니다. 붐처럼 일어난 고양이 키우기에 합류한 사람들, 마치 고양이를 키우는 일이 고급 취향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이들을 무시하는 ‘버틀러’들이 그 대상이다. 이 책에서 버틀러는 취향을 차별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그리고 대항하는 것이 ‘안티 버틀러 클럽’이다. ‘안티 버틀러 클럽’에는 각자 나름의 사연을 안고 합류한 6인이 있다. 이들은 고양이 애호가들을 지지층에 포함시켜 대통령이 되려하는 장국태의 당선을 막기 위해 힘을 모은다.

 

   문자 하나로 차인 남자의 등장으로부터 반사회적 운동으로까지 확장되는 소설의 진행이 흥미롭다. 안티 버틀러 클럽의 회원 6명의 사연들도 소설의 굵은 가지를 쳐주고 있는데 그들 나름의 스토리도 빈약하지 않았기에 소설이 더 탄탄하게 느껴졌다. 문제가 있다면 고양이에 관한 거였는데. 물론 미스터 버틀러가 고양이가 아니라 이구아나 버틀러였다면 우린 같은 방법으로 이구아나를 노렸을 거야.(278p)라고 했으니까 그 부분은 차치하고. 뭐, 일단 나는 고양이를 새끼처럼 키우는 친구들이 있는 만큼 그들의 새끼니까 내 새끼는 아니더라도 조카쯤은 하는 생각에 특별히 여기는 축이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물고 빨고 비벼대고 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는 그런 애매한 입장이었는데도 특정 몇 가지는 불편하게 다가왔다. 이를 테면 오의 실험이라거나 박의 행위, 윤형자의 식성 그런 것. 그래도 고양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의 책임의식을 언급해서 좋았고 고양이를 키운다는 공통점을 악용하려는 자를 응징한다는 설정은 좋았다. 물론 가장 좋았던 것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강하게 주장하고 있어서. 취향을 존중합시다. (143p)

 

   취향이라는 점과 함께 다름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한 소설이었다. 특별함에 대한 강박관념(88p) 으로 나와 다르다는 것을 나보다 못한 것으로 여기려는 건 아닌지, 반성해 봐야 했다. 취향이 모두 다른 우리가 어떻게 공존해야 할지를 고민해야하고 타인을 존중하려는 노력을 보다 더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마무리 한다. 빼놓고 지나간 부분이 있는데 1장에서 보여준 이수진의 문체는 완벽한 내 취향이었다. -데 라면서 길게길게 이어가는 스타일. 그 속에 비아냥과 말장난을 위트 있게 섞어 픽픽 웃게 하는 문장. 사실 소설의 등장인물이나 굵직굵직한 이야기들도 좋았지만 나는 소설의 1장이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이수진이라는 작가와 함께 그 문장들을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기도.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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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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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언젠가 썼던 편지글이 노래가 되어 흐른다면 어떨까? 그 편지가 급히 헤어져야만 했던 첫사랑에게 쓴 것이었다면? 그 노래를 듣게 된 장소가 언제나 장을 보러 갔던 마트 안에서라면? 어른이 된 나에게 불현듯 찾아온 첫사랑의 기억. 과연 어떨까?

 

   테트라는 울었다. 물론 음악 때문에 울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테트라는 음악을 듣기 전에 울고 있었다.) ‘내가 왜 우는 거지?’,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눈물은 그녀가 곧 운명적인 일에 휘말리게 될 거라는 전주곡과 같았다. 어릴 적 어른들의 문제로 헤어져야만 했던 다마히코. 그 후로도 어떻게든 연락을 이어왔지만 현실에 절박해진 테트라가 소식을 끊어버렸었다. 마트에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는 다마히코와 테트라만이 알고 있는 편지 내용이었다. 우연히 들은 이 노래로 테트라는 다마히코를 찾기 시작한다.

 

   어렸던 두 사람에게 서로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엄마와 야반도주를 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봐야 했던 테트라와 지나치게 자유스러운 부모님 탓에 툭하면 짐을 싸서 여기저기로 이동해야 했던, 평범한 집을 부러워했던 다마히코.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문제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갔다. 다마히코만 있으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53p) 그런 마음을 너무 일찍 알아버릴 정도로. 어른인 척 하지만 결국엔 아이었던 그들의 천진함이 보기 좋았다. 헤어지기 싫어서 조금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테트라와 그런 테트라에게 “먼 거 아니야, 이 정도는.”(59) 별 거 아닌 듯 말해주는 다마히코. 이 둘이 영영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었다.

 

   어릴 적에 헤어진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각자 보내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좋을 수만은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연한 문제를 당연하게도 잘 그려주고 있어 나는 이 소설이 더 마음에 들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십 년이 넘는 시간동안 현실은 보지 않고 오로지 추억에만 매달려 테트라 하나만을 보는 다마히코는 로맨틱하지만은 않다. 테트라가 보낸 편지와 테트라의 어릴 적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접근하는 모습엔 더더욱. 그런 심리를 숨기지 않아서 좋았다. 과거와 달라진 자신 때문에 서로에게 실망시키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모습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잡다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분해해서 뒤로 흘려보내는 작업이 조만간 시작될 것이다(216p) 라며 각오를 세우는 테트라는 뭐라 말해야 할까, 기특하다고 할까.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은 굳건하다. 그게 느껴졌다. 더없이 자연스럽다. 그건 쉬이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그게 가장 좋았다.

 

   마오와 하치를 다시 만나는 기쁨은 꼭 적고 넘어가고 싶다. 예정된 이별을 받아들이며 사랑을 나눴던 어린 마오와 하치. 나는 그 때 그 둘이 영원한 사랑을 기대하기엔 너무 어리지 않은가, 생각했었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금껏 한 쌍인 두 사람. 나는 미안한 마음에 좀 멋쩍어져서 마오가 나올 때마다 반색을 하며 더 열심히 읽었다. 어릴 적엔 하치만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마오도 정말 멋진 여자였다. 매력적인 아줌마 같으니! 물론 이번 소설엔 슬픈 모습이 많이 나와서 속상하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바나나는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그렸다. 환상의 섬, 세상의 끝과 같은 신비의 성지 하와이를 배경으로 마오와 하치, 테트라와 다마히코, 유키히코와 마리코의 사랑이 펼쳐진다. 어쩔 수 없는 것, 대체될 수 없는 것, 바로 그런 사랑. <사우스포인트의 연인>은 이미 책 자체로 질문이 되고 답이 되었다. 일상 속에서 어느 날 내게 툭 던져졌을 뿐인데 처음 썼던 러브레터를 다시 보게 된 것 같이 당혹스러웠다가 애틋했다가 뭉클해졌다가 끝내는 잔잔한 따스함으로 퍼지고 마는. 운명적인 사랑, 이런 거창하고 흔한 표현은 질색하는 편인데도 바나나를 읽고 나면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은연중에 꿈꿔보기도. 그 때문일까, 바나나를 계속 읽게 되는 건.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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