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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3년 4월
평점 :
내가 언젠가 썼던 편지글이 노래가 되어 흐른다면 어떨까? 그 편지가 급히 헤어져야만 했던 첫사랑에게 쓴 것이었다면? 그 노래를 듣게 된 장소가 언제나 장을 보러 갔던 마트 안에서라면? 어른이 된 나에게 불현듯 찾아온 첫사랑의 기억. 과연 어떨까?
테트라는 울었다. 물론 음악 때문에 울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테트라는 음악을 듣기 전에 울고 있었다.) ‘내가 왜 우는 거지?’, 자신도 납득하지 못하는 눈물은 그녀가 곧 운명적인 일에 휘말리게 될 거라는 전주곡과 같았다. 어릴 적 어른들의 문제로 헤어져야만 했던 다마히코. 그 후로도 어떻게든 연락을 이어왔지만 현실에 절박해진 테트라가 소식을 끊어버렸었다. 마트에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사는 다마히코와 테트라만이 알고 있는 편지 내용이었다. 우연히 들은 이 노래로 테트라는 다마히코를 찾기 시작한다.
어렸던 두 사람에게 서로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엄마와 야반도주를 하고 알코올 중독으로 죽어가는 아버지를 지켜봐야 했던 테트라와 지나치게 자유스러운 부모님 탓에 툭하면 짐을 싸서 여기저기로 이동해야 했던, 평범한 집을 부러워했던 다마히코. 두 사람은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어른들의 문제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소중한 시간을 만들어갔다. 다마히코만 있으면, 다른 사람은 필요 없어. (53p) 그런 마음을 너무 일찍 알아버릴 정도로. 어른인 척 하지만 결국엔 아이었던 그들의 천진함이 보기 좋았다. 헤어지기 싫어서 조금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는 테트라와 그런 테트라에게 “먼 거 아니야, 이 정도는.”(59) 별 거 아닌 듯 말해주는 다마히코. 이 둘이 영영 헤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었다.
어릴 적에 헤어진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각자 보내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좋을 수만은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 당연한 문제를 당연하게도 잘 그려주고 있어 나는 이 소설이 더 마음에 들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십 년이 넘는 시간동안 현실은 보지 않고 오로지 추억에만 매달려 테트라 하나만을 보는 다마히코는 로맨틱하지만은 않다. 테트라가 보낸 편지와 테트라의 어릴 적 사진을 벽에 붙여두고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접근하는 모습엔 더더욱. 그런 심리를 숨기지 않아서 좋았다. 과거와 달라진 자신 때문에 서로에게 실망시키지는 않을까 우려하는 모습도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잡다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분해해서 뒤로 흘려보내는 작업이 조만간 시작될 것이다(216p) 라며 각오를 세우는 테트라는 뭐라 말해야 할까, 기특하다고 할까.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 속에서도 그들의 사랑은 굳건하다. 그게 느껴졌다. 더없이 자연스럽다. 그건 쉬이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다. 그게 가장 좋았다.
마오와 하치를 다시 만나는 기쁨은 꼭 적고 넘어가고 싶다. 예정된 이별을 받아들이며 사랑을 나눴던 어린 마오와 하치. 나는 그 때 그 둘이 영원한 사랑을 기대하기엔 너무 어리지 않은가, 생각했었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지금껏 한 쌍인 두 사람. 나는 미안한 마음에 좀 멋쩍어져서 마오가 나올 때마다 반색을 하며 더 열심히 읽었다. 어릴 적엔 하치만 참 멋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마오도 정말 멋진 여자였다. 매력적인 아줌마 같으니! 물론 이번 소설엔 슬픈 모습이 많이 나와서 속상하긴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바나나는 운명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야기를 그렸다. 환상의 섬, 세상의 끝과 같은 신비의 성지 하와이를 배경으로 마오와 하치, 테트라와 다마히코, 유키히코와 마리코의 사랑이 펼쳐진다. 어쩔 수 없는 것, 대체될 수 없는 것, 바로 그런 사랑. <사우스포인트의 연인>은 이미 책 자체로 질문이 되고 답이 되었다. 일상 속에서 어느 날 내게 툭 던져졌을 뿐인데 처음 썼던 러브레터를 다시 보게 된 것 같이 당혹스러웠다가 애틋했다가 뭉클해졌다가 끝내는 잔잔한 따스함으로 퍼지고 마는. 운명적인 사랑, 이런 거창하고 흔한 표현은 질색하는 편인데도 바나나를 읽고 나면 그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은연중에 꿈꿔보기도. 그 때문일까, 바나나를 계속 읽게 되는 건.
-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