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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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프레드릭 배크만, 오베라는 남자 - 아이 러브 오베!

 

 

 

  “젠장. 팔이 없는 놈이 백내장에 걸렸어도 너보다는 후진을 잘 할 거다.” (31p)

 

   아니, 할아버지 후진 한 번 못했다고 그렇게 심한 말씀을 하시다니요. 오베를 처음 보면 아마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이 할아버지 좀 지나치게 까칠하다. 이야기 시작부터 등장한 ‘아이패드를 사러 간 오베’를 보라. 매장에서 이 정도면 진상취급받기 십상 아닌가. 꼬박꼬박 6시 15분 전에 일어나 누가 시키지도 않은 동네 시찰을 하는 것, 문고리는 항상 세 번씩 당겨 확인하는 것 등을 보면 약간의 강박증세도 보이고, 동네 길고양이에게조차 자비가 없는 걸 보니 아주 인색한 노인이 분명하다. 더 괴이한 것은 천장에 고리를 설치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 남자는 자살을 계획하고 있다.

 

   처음엔 나 역시 이런 괴짜 주인공에 꽂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어디서도 쉽게 주워듣기는 힘들 오만가지의 불평불만을 목격하며 시원시원하게 책장을 넘겼다. 정말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하다가도 그 폭풍 잔소리가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인 양 속 시원하기도 했고 이따금은 꼭 나한테 하는 소리인 양 내심 찔리기도 하고. 흥미로운 진행이었다. 조금 더 지나서는 마음을 다해 파르바네를 응원하고 있었다. 아니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여러분, 모두 좋습니다, 지금 아주 좋아요. 지금 그대로 오베의 자살계획을 망쳐주세요! 그의 말대로 “동네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고 있”(53p)었다. 그리고 아내를 잃고 무채색의 삶을 살고 있는 오베의 인생의 질서가 마구마구 무너진다. 굿잡!

   “저 동물한테는 온갖 역겨운 질병에 광견병이나 뭐 그런 게 잔뜩 있다고요!”

   오베는 고양이를 보았다. 그리고 금발 잡초를 보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당신도 그럴 거고. 하지만 우린 그거 때문에 당신한테 돌을 던지진 않잖아.” 78p

 

   “내가 사람들과 싸우면 당신 진짜로 속상해하는 거 알아. 하지만 사실은 일이 이렇게 된 거야. 내가 당신한테 올라갈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줘야겠어. 당장은 죽을 시간이 없거든.” 399p

 

   “남자애라도, 뭐. 요즘은 남자애들도 분홍색 쓰잖아. 아냐?”

   파르바네가 연푸른색 아기침대를 보았다. 그녀가 손을 입으로 가져갔다.

   “울면 안 줘.” 오베가 경고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울기 시작했고, 오베는 한숨을 쉬고는 ―“젠장, 여자들이란.”― 몸을 돌려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402p

 

 

   오베가 예의 그 경찰용 권총 같은 손가락을 공중에 푹 찌르더니 점원에게 똑바로 겨눴다.

   “야! 나는 걔한테 제일 좋은 걸 주고 싶다고! 알아들어?” 430p

 

 
 

   프레드릭 배크만. 처음 보는 작가지만 감히 단언하는데 그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 타고난 기질이 있다. 한 소설에서 많은 캐릭터에 반하기에는 쉽지 않는데,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에게 반해버렸다. 진솔하지 않은 캐릭터가 없었다. 마음이 기울지 않는 캐릭터도 없었다. 하물며 고양이까지 나를 휘어잡았다. (아, 하얀셔츠. 당신은 좀 고민을 해봐야겠다.) 캐릭터들이 저마다들의 개성과 매력으로 나를 울리고 웃겼다.

특히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프레드릭 배크만은 사랑에 대해 일가견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정말이지 사랑을 사랑하는 인물일 것이다. (아니라면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로맨틱한 남자들을 써낼 수 없을 테니까!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 189p

 

   아마 그는 그녀에게 시도 써주지 않을 테고 사랑의 세레나데도 부르지 않을 것이며 비싼 선물을 들고 집에 찾아오지도 않을 테다. 하지만 다른 어떤 소년도 그녀가 말하는 동안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게 좋다는 이유로 매일 몇 시간 동안 다른 방향으로 가지는 않았다. 207p

 

   소냐의 어미는 소냐를 낳자마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재혼하지 않았다.

   “난 여자가 있어. 지금 집에 없다 뿐이지.” 가끔 누군가 감히 그 질문을 던지면 그는 그렇게 툭 내뱉었다. 209p

 

 

   “지금보다 두 배 더 날 사랑해줘야 해요.”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오베는 두 번째로―또한 마지막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가 지금껏 그녀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그녀를 사랑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음에도. 232p

 

   “그래서, 공구는 있고?” 그가 물었다.

   젊은이는 고개를 저었다.

   “공구도 없이 자전거를 어떻게 수리할 건데?” 오베가 놀랐다. 마음이 동요했다기보다는 순수하게 놀란 쪽에 더 가까웠다.

   젊은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몰라요.”

   “그럼 수리는 왜 해주겠다고 약속했는데?”

   젊은이가 눈을 걷어찼다. 민망한 듯 손 전체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사랑하니까요.” 310p

 

   “다른 집 아내들은 자기가 머리를 새로 한 걸 남편들이 못 알아본다는 이유로 짜증을 내잖아요. 제가 머리를 하니까 우리 남편은 내가 달라졌다고 며칠 동안 짜증을 내더라고요.” 353p

 

   오베가 대신 화를 냈다. 어쩌면 그는 사악한 만물이 자기가 만났던 단 한 사람, 그에게는 과분했던 그 사람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였을 때, 누군가 그녀 편에서 화를 내야 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세상 전체와 싸웠다. 354p

 

 

    그리고 프레드릭 배크만은 그야말로 이야기꾼이다. 오베라는 남자의 인생을 통해서 그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너무도 다양하고 풍부하고 감동적이다. 그리고 매 회 재미있다. 이 굉장한 소설은 그의 블로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만일 연재식이었다면 나는 주저 없이 구독해두고 스마트폰 어플을 누를 시간이 있을 때마다 그의 블로그를 눌러댔을 것이다.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는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건 아주 특별한 유희라고 생각한다. 그 이야기들이 재미를 넘어 감동까지 선사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을 강력히 추천한다.

   그녀는 그가 자기 말을 듣는 태도가 좋았다고, 그녀를 웃기는 것도 좋았다고, 자기는 그거면 충분했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그녀는 그에게 삶에서 정말로 원하는 게 뭐냐고, 만약 원하는 걸 고를 수 있다면 뭘 택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생각도 하지 않고 곧바로 집을 짓고 싶다고 대답했다. 집을 건설하고 싶다고, 도면을 그리고 싶다고, 부지에 집을 세울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계산하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 그녀는 그가 생각했던 것처럼 웃지 않았다. 그녀는 화를 냈다. “그럼 왜 안하는 거죠?” 그녀는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했다.

   오베는 그 질문에 딱히 그럴싸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188p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영웅이신걸요!”

 

   “정신병자가 틀림없어, 저 여자.” 오베가 고양이에게 말했다. 고양이는 반대하지 않았다. 263p

 

   오베가 자기 주변에 모인 인간들을 보았다. 마치 자기가 유괴라도 당해서 평행 우주로 납치된 듯. 잠시 그는 방향을 홱 틀어 도로를 벗어날까도 생각해봤지만, 이내 최악의 경우 이 인간들 모두가 그와 함께 사후 세계까지 동행하게 되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런 깨달음을 얻자 그는 속도를 줄이고 자기 차와 앞차 사이의 간격을 충분히 벌렸다. 285p

 

   “들어봐요.” 오베가 조심스레 문을 닫으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은 애도 둘이나 낳았고 곧 셋째도 뽑아내겠지. 엄청나게 먼 나라에서 왔고, 아마 전쟁이나 박해나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피해 왔을 거요. 낯선 말을 배웠고, 교육도 받았고, 누가 봐도 무능한 인간들과 가족도 이뤘어. 지금까지 당신이 뭐 빌어먹을 거 하나라도 두려워하는 꼴을 본 적이 있다면 난 급살이라도 맞을 거요.”

   오베가 그녀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파르바네는 여전히 기가 막혀 입을 딱 벌리고 있었다. 오베가 그녀의 발아래 페달을 도도하게 가리켰다.

   “내가 뇌수술을 하라는 것도 아니잖소. 차를 운전하라고 하는 거라고. 차에는 액셀러레이터, 브레이크, 클러치가 달려 있어요. 인류 역사상 최악의 멍청이들도 이걸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알았다고. 그러니 당신도 할 거요.”

   그리고 그는 다섯 단어로 된 말을 내뱉었다. 파르바네가 오베에게 들었던 가장 사랑스러운 칭찬이라고 언제까지나 기억하게 될 말을.

   “왜냐하면 당신은 완전히 멍청이는 아니니까.” 323p

 

   개인적으로 요즘 이런저런 사정으로 뷰티블로거들의 블로그를 많이 보는데. 그들식대로 표현해보자면, “이건 무조건 사요, 그냥 사요!” 다. 이런 소설은 읽어줘야 한다. 그래야 사회가 따뜻해지지. 아, 거기까진 너무 오바인가. 그게 아니라도 적어도 읽는 사람의 마음은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따뜻해진다. 이런 온기가 너무도 고맙고 기쁘다. 솔직히 말해서 모든 페이지가 완전 다 웃기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하지만 꼭 읽어야 할 만큼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라는 것만큼은 꼭 말하고 싶다.

 

   많이 웃고 엄청 울었다. 이런 소설을 만나서 참 기쁘고 고맙다. 다소 이상한 결론인 것도 같지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삶의 아름다운 부분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희망을 전달받은 기분이다. 오베처럼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고 당당할 수 있도록 살아야겠다. 물론 그처럼 까칠해지는 건 좀 곤란하겠지만.

 

   마지막으로, 아이 러브 오베. 진짜 최고. 할아버지 내 스타일!

 

   사람들이야 당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되는 대로 말하겠지요, 오베. 하지만 당신은 제가 들어본 것 중 가장 별난 슈퍼히어로예요. 259p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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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꽃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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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일까, 저주일까? 누군가는 일생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못하도록 결정지어 태어난다. 의지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다. 훌륭한 성품과 높은 도덕심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운명일 뿐이다. 녹주와 서로는 한마음 한 몸으로 꽁꽁 묶였다. 그 잔인하고도 견고한 운명의 사슬에 기꺼이 포박되었다. 141p

   모처럼 봤다. 사랑이 바로 삶이라는 이들을. 사랑으로 충만한 그 순간에만 살아있음을 느꼈기에 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랑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불가항력의 것으로 맺어질 것처럼 만났으나 같은 힘으로 엇갈려야만 했던 안타까운 연인을 만났다. 비로소 하나가 된 시간은 혼자서 그리워했던 시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아서 보는 내 마음이 이리도 미어지는데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그러나 그녀는 기꺼이 몸을 던졌다. 죽음의 양면인 위험한 사랑에. 그것만이 그녀의 삶이었으므로.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다. 불구덩이에 가족을 다 잃고 홀로 살아남은 일곱 살 여자아이의 절망과 공포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까.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서로는 녹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순간 녹주는 새로 태어났다. 서로가 지어준 운명으로. 어머니 ‘이씨 부인’의 극성스런 학구열로 정승동으로 공부를 하러 다니는 서로의 속도 엉망인 건 마찬가지였다. 촌놈이라 욕을 먹고 명문가 자제들의 발에 밟히고, 오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아무 내색도 하지 못했던 열한 살의 그 속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똥 부스러기가 말라붙은 서로의 옷을 빨며 그가 홀로 삼킨 눈물을 대신 흘려주던 건 다름 아닌 녹주였다. 깊은 곳에 감춰 둔 절망과 외로움을 알아봐주고 헤아려주고 다독여준 건 단 둘 뿐이었다.

 

 

 

   조심스런 손길로 빨래를 하던 녹주가 땀을 훔치는 듯 눈물을 닦았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 오도카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로는 자기 대신 우는 녹주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얼룩은 아무 일도 아니다. 옷은 금방 마른다. 하지만,”

 

   빨래한 도포를 바위에 펼쳐 말리고 녹주는 서로에게 다가왔다. 치어다보노라니 오뚝 선 노주의 어깨 너머로 햇발이 따가웠다. 눈살을 구기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서로의 손목을 녹주가 옴켜쥐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마음을 말리러 가자!” 83p

 

 

   “꿈속에 나도 나왔느냐?”

   “너? 네가 왜?”

   “왜라니? 참말 섭섭하다! 내 꿈엔 언제나 네가 나오는데, 넌 내 꿈을 안 꾼단 말이냐?”

   “……” 93p

 

   엇갈림도 운명이었기에 애처로운 것이다. 녹주의 피리소리만으로도 서로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알아들었다. 녹주는 괴롭힘에 익숙한 겁쟁이였던 서로의 마음을 말려주고 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녹주가 뱀에 물렸을 때는 독뱀인 줄 알고, 그리 알았기에 상처를 빨았던 서로였다. 그렇게 영혼마저 사를 듯한 불의 꽃이 피었(141p)음에도 이뤄지지 못한 둘을 어찌해야 할지. 긴긴 세월 도달하지 못한 그 마음, 사그라지지도 않는 그 마음을 어쩌면 좋을지. ‘이씨 부인’도 그들의 운명이라면 운명이겠다. 둘 사이에 굳건하게 자리한 큰 바위. 결국 녹주는 불문에 귀의했다. 수경심이라는 새 법명을 얻고 절망과 망상과 번뇌의 하루(153p)를 보냈다. 녹주를 잃은 서로는 농탕질에 빠졌다. 생이별 후의 황망함을 욕정 때문이라고 생각했(159p)던 것이다. 그가 계속 기방을 출입하자 이씨 부인과 조반(서로의 아버지)은 혼사를 서둘렀다. 망석중 놀이하듯 혼례를 치렀다. 그들의 재회는 7년 만에 이뤄졌다. 조반의 장례에 조문을 간 녹주는 그곳에서 그의 아내와 아이를 봤다. 그 날로 헤어진 둘은 십오 년이 흘러서야 다시 만났다. 녹주는 제 아비 뻘의 늙은이인 이귀산의 후처가 되어 있었다.

 

   “관상감에서 일하는 이들이 그러더라. 별보다 그 별을 찾아 검은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다고…….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보다 그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더 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사랑한다!” 256p

   운명은 끝까지 그들을. 녹주는 지쳤다. 이귀산과 공허한 관계로 살아가는 것도 그의 옆에서 허깨비처럼 살아가는 것에도. 더 이상 무엇에도 희망을 걸 수 없는 폐허(271p)가 되어버린 그녀는 죽으려 했다. 그러나 운명은 짓궂은 놀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필 그 때 서로의 서신이 도착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 그녀는 생으로 돌아섰다. 사랑을 택했다. 서로에게 갔다. 그것이 죽음의 다른 얼굴인 것을 알면서도. 그런 녹주를 보며 작가는 말했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단 한순간도 스스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무서운 파국을 떠올릴지라도, 목숨을 걸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어리석은 사랑이 그녀가 생애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285p

 

   “사랑이 없어도 사람은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가 잘못된 걸까?”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가만히 떼어주며, 서로가 대답했다.

   “우린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이라면 악(惡)일 테고, 악이라면 이처럼 한없이 행복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 없이도 잘들 살아가지 않느냐? 안전한 금 안에서 정절과 지조를 지키며 근엄함 태도로…….”

   “아니, 모두가 그런 척하는 거다. 다들 어떻게든 사랑하고 있을 거다. 그걸 필사적으로 숨기며 들키지 않을 뿐이지. 사랑하지 않고는 아무도 살 수 없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건 다만 사는 시늉을 하는 것뿐이다.”

   서로의 말에 녹주가 웃었다. 녹주의 미소를 따라 서로도 웃었다. 삶은 그토록 짧은 순간에 있었다. 그들은 다만 일말의 시늉도 없는 선명한 한때를 살 뿐이었다. 289p

   그들이 잘못된 걸까? 결국 밀회는 들통 나고 그들은 파국을 맞는다. 젊은 임금은 후에 후회하게 될 줄 모르고 율문 밖의 형벌로 처결했다. 서로는 파직해 유배하고 녹주는 사흘 동안 저자에 세웠다가 참수하라는 처분이었다.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에 살아있을 수 있었던 그 짧은 시간이 정말이지 너무도 짧아서 나는 더 안타까워죽겠는데도 녹주는 기꺼이 죽음을 맞았다. 기꺼이. 찰나에 지나지 않을지나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을 살고 싶기에,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는 죽음을 기꺼이 껴안습니다.(327p) 라며.

 

   처음부터 짝이었는데 그게 엇갈리니 슬프고 비로소 이뤄졌는데 부정한 관계여서 안타깝다. 불륜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단, 그들은 이미 끔찍한 대가를 치렀으니까 그 죄에 관해서는 내가 더할 말이 없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도 죽지 못하고 20년을 살아내야 했던 서로의 삶을 쓰게 그려보며 둘의 옛 시절을 기억해주는 수밖에는. 너희는 사랑이었다, 알아주는 수밖에는.

 

   끝으로. 옛 느낌 물씬 나는 작가만의 단어들이 빼곡하다. 거기에 막혀서 재미를 못 보고 덮어버린 역사소설도 꽤 되는데 김별아의 <불의 꽃>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모르는 말이라도 문맥상 이해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었고 몇몇 단어들은 신기하게도 곱씹어볼수록 제 맛이 느껴져 소설의 분위기를 더했다.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죄목으로 국가의 처벌을 받은 조선 여성 3부작의 두 번째 소설이란다. 그렇다면 3번째 이야기가 또 있다는 뜻. ‘기꺼이’ 패배한 어리석고 용감하고 뜨거운 여성들의 이야기(338p)가 기대된다. 그녀가 덧붙인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를 믿지 않는다면, 그들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뻔하디 뻔하고 그렇고 그런 것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336p) 녹주와 서로의 이야기를 슬픈 사랑이야기로 볼지 흔해빠진 불륜이야기로 볼지는 읽는 자의 선택이다. 단, 나처럼 사랑이야기에 가깝게 본 경우라면 마지막 길 위에서 참수형을 맞는 녹주의 독백에 가슴이 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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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요 하숙집의 선물
오누마 노리코 지음, 김윤수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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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마요 하우스는 내가 오랫동안 살고 있는 여성 전용 하숙집이다. 지은 지 75년, 방 다섯 개에 거실, 부엌 겸 식당, 헛방으로 구성된 목조 단독주택이다. 하숙생은 세 명. 현관, 욕실, 화장실은 공용이다. 역에서 도보로 5분. 버스 정류장도 가깝다. 특기할 점은 아침과 저녁에 식사가 제공된다는 것이다. 집세는 7만 엔. 12p

   자신의 식사를 준비하는 김에 하는 거라며 하숙생들의 식사도 같이 차려(12p) 주던 주인장 다마요가 미국에 있는 친구를 간병해야 한다며 외국으로 가 버렸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 할 관리인을 보냈다. 다마요의 ‘영혼의 쌍둥이’ 라고 하던 그 사람은 과연 누굴까? 새로운 관리인 ‘도모미’를 맞기로 한 쇼코는 한 시간이나 늦게 하숙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도모미’로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한 남자만이 하숙집 울타리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뿐.

 

   새로온 관리인 니시오 도모미는 남자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진회색의 중절모를 썼다. 아름다운 회색 머리카락을 지녔고 180에 달하는 큰 키에 어깨도 넓고 듬직하다. 험상궂고 무서운 얼굴이다. 게다가 하늘색 유모차에 강아지를 태워 끌고 있다. 뭐지, 이 괴상한 매치는? 이 남자 정말 괜찮은 걸까? 이미 나는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내 멋대로 도모미를 상상했었다. 살집이 좀 있는데다 여성스러운 면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우락부락한데 높은 목소리를 가졌고 잔소리꾼이라도 재미있을 것 같아, 등등. 그런데 예상외의 남자가 나타났다. 중역 비즈니스맨의 느낌을 폴폴 풍기다던 그는 왠지 점잖아 보이고 은근 엄격한 구석도 있다. 게다가 수상한 자를 바닥에 메치는 박력 있는 남자다. 기대했던 것처럼 밝고 수다스럽고 살갑고 그런 모습은 아니었지만 묵묵하고 남자다운 게 매력 있었다. 살림도 잘하고 뜨개질도 잘 하는 이 남자, 니시오 도모미. 그러나 그가 정말 잘하는 것은 참견하기, 라는 것.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다.

 

   이건 다마요 하우스의 관리인으로서 간과할 수 없는 사태라는 생각이 드는데. (36p) 하숙집에 사는 ‘코’ 자매 - 슈코, 료코, 데코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일이 그에겐 당연한 직무다. 료코의 엽서를 멋대로 읽고 참견하는 것도 그의 일이고 답장하지 않는 료코를 대신해 엽서의 주소로 편지를 보내고 료코의 집까지 찾아가는 것도 그에겐 자신이 해야 할 일이다. 데코와 결혼 허락을 받으러온 가미도조노 준을 무력으로 엄하게 다스리는 것도, 데코를 향해 심한 말을 퍼붓는 가미도조노 준의 어머니를 쫓아내는 것도 도모미의 몫이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료코를 미행하기도 하고 술에 취한 채 지구대에서 보호받고 있는 슈코를 데리러도 가야한다. 그가 마땅히 관리인이 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확실히 지나친 부분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었다면 사생활 침해가 어쩌고 하면서 펄펄 뛰고도 남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도모미는 밉지가 않았다. 오히려 그가 고맙기까지 했다. 자신의 아이를 가졌으니 결혼을 허락해달라는 가미도조노를 바닥에 내던지며 시집도 안 간 처녀에게 무슨 짓을 했냐며 위협하는 모습이나 료코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에게 얻어온 매실로 그녀가 좋아하는 매실청을 정성을 담아 담그는 모습이나, 술에 취해 투정하고 주정하는 서른여섯의 슈코를 결국 업어주기까지 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미워할 수가 없다. 슈코, 료코, 데코의 마음이 이해가 갔다. 나도 그녀들처럼 도모미에게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가족의 이야기.

 

   그동안 다마요 하우스에서 살면서 나와 료코는 특별히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서로 자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다. 당연한 소리다. 우리는 친구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다. 단지 같은 하숙집에 모인 서로 다른 두 사람일 뿐이다. 42p

 

   가족은 만능이 아니다. 가족이기에 구원하지 못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오만한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나는 지금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79p

 

 

   “그들이 집에 있으면 수시로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고함 소리일 때도 있고 우당탕 복도를 뛰어가는 소리일 때도 있지만 말이죠. 그 모든 게 몹시 기분 좋기도 하고 안심되기도 하는 따뜻한 소리였습니다. 그리운 마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런 게 가족이 있는 생활이구나, 하고 말이죠. 어두운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두운, 마음이…….” 290p

   공교롭게도 다마요 하우스 사람들은 모두 불완전한 가족에 속해있다. 슈코의 부모님은 돌아가셨다. 살아생전 아버지는 폭력을 썼고 그로 인해 언니는 왼쪽 귀를 못 쓰게 됐다. 료코는 용태가 악화된 아버지를 계속 외면하려 했다. 데코의 아버지는 바람을 피웠고 어머니와 별거 중이었는데 그녀의 결혼식을 앞두고 드디어 이혼을 했다.

불완전한 가족을 지닌 세 사람은 도모미가 등장하면서부터 점차 바뀐다. 그저 같은 하숙집에 모인 서로 다른 사람들뿐이었던 것이 어느덧 가족의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비로소 완성되는 것처럼 보였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내가 집을 나가버린 이후 도모미가 20년 만에 준비하는 파티였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 도모미의 변화이자 회복인 지점. 그들의 파티가 어느 파티보다도 즐겁고 따뜻하게 다가온 건 당연했다.

 

   끝으로 슈코가 더 이상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슈코는 계속 길을 잃고 헤맸다. 방향치라곤 하지만 너무 잦았다. 목적지를 아예 모르기 때문이기도 할 테고 목적지를 찾을 만한 온전한 정신이지 않기 때문이기도 할 테다. 그녀는 언제쯤 헤매지 않게 될까. 데코처럼 가족이 생기면 나아질까? 료코처럼 죽기 살기로 덤비는 목표가 있다면? 슈코에게도 동행자가 생겼으면 좋겠다. 아무리 길을 잃어도 외롭지 않게. 혹은 헤매는 그녀를 구해줄 수 있도록.

   다정한 봄이 왔다 간 느낌이다. 따뜻했던 시간이 지나고 간 자리에 서 있는 것 같다. 소설의 결말도 비슷하다. 아쉬움이 더해져서야 비로소 제대로 끝이 났다. 굉장히 몰입해서 읽었다. 재미도 재미였지만 무엇보다 장면들이 생생했다. 마치 읽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것처럼. 드라마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난 오누마 노리코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볼 계획이다. 마음에 들었다.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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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김종옥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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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4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한 작품은 김종옥의 「거리의 마술사」였다. 바로 그의 신춘문예 등단작품. 첫 작품이 대상을 받았다는 이력은 놀라웠고 그의 소설을 더 궁금하게 만들었다. 「거리의 마술사」는 왕따를 소재로 한 이야기다. 죽은 ‘남우’에 대한 이야기를 변호사와의 면담이나 ‘희수’의 회상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마술을 보여줄게. 마술. 속임수. 실제로 일어난 게 아니지만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29p) 라던 남우는 정말 마술처럼 사라져버렸다. 죽었는데도 죽지 않고 사라진 것뿐이라는 느낌을 소설 끝까지 지울 수 없던 게 신기했다. 뭔가 환상적인 느낌이 가미되었다고 할까.

 

 

   그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어떤 마법 같은 일은 분명히 그 순간에 일어났다고 그녀는 믿었다. 그것은 세상이 일순간 아주 평화로워진 것 같은 마법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남우를 내려다보는 학생들 모두가 일순간 그 세계 속에 포함되게 하는, 마치 그들 모두가 하나의 눈을 가진 하나의 영혼이 되게 하는 마법이었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이 본 모든 것이, 이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였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것은 분명히 남우가 그들 모두를 대신해서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들 모두가 남우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세상 전부다 떨어졌다. 그러니까 그들이 그 순간 붙잡은 것이 무엇이든 간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11p 「거리의 마술사」

 

   중간중간에 나타나는 관념적인 부분이 좀 지루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소설을 읽는 데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존재감 없는 아이 남우가 반에서 가장 주목받는 아이 안나(연예인이었다) 때문에 반 아이들의 눈에 띄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받아들일지 혼란을 겪던 아이들이 찾아낸 감정이 ‘증오’였다는 게 씁쓸하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파국의 씨앗이 생겨나다니.

 

 

  2.

 

   … 그렇다고 맛깔스러운 에세이나 지적이고 감성적인 여행기도 딱히 아니었다. 나로서는 그런 것이 왜 그리 인기가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그냥 무색무취하다고 할까. 그러면서도 나 자신부터 그의 게시물들을 멍하니 읽고 있으니 신기하다면 신기한 노릇이었다. 글에다가 중세의 마법 같은 걸 걸어놓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57p 「절반이상의 하루오」

 

   이상문학상과 젊은작가상, 웹진문지문학상, 현대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절반이상의 하루오」. 그런 만큼 많이 소개되었고 나만 해도 두 번째 읽는 거였다. 이 소설에 관해서 이야기 할 때 다들 본문 속에 있는 ‘무색무취’ 를 인용하기에 나는 말아야지 했는데, 결국 나도 같은 부분을 쓰고 말았다. 이유는 모든 인용자와 같다. 그 부분이 이장욱의 소설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었으니까. 독자가 어떻게 느낄지를 귀신 같이 알고 소설에 써 두다니, 이런 센스 있는 작가님 같으니라구, 너스레 떨며 붙여 봤다.

   「절반이상의 하루오」는 내가 여행 중에 우연히 만났던 하루오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잘 어우러져 어느 곳에서든 삶을 살아내는 하루오의 여행은 남다르다.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 그래서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나’가 하루오로 착각된다 해도 (그 둘이 어느덧 하나처럼 닮아버려서) 이상할 것 같지 않다. 어쩌면 나도 하루오가 될 수 있을지도? 말하고 싶은 것은, 그토록 분명하게 정의해왔던 자아를 포함한 모든 문제들이 이 소설을 읽으면서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좀 악착같이 구는 나에게 그런 효과는 쉬엄쉬엄 생각해도 되겠구나, 하는 묘한 안도감을 주었는데, 사실 이런 건 너무 개인적인 거니까 이쯤 말하고.

 

 

   3. 김미월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황당하게 시작한다. 다른 때와는 좀 다른 주말 아침에서 시작하네, 불길한 일이 일어나려나, 생각했지만 그것이 설마 지구멸망일 줄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 날이라는 흔한 전제를 (우리는 이 문제를 화두로 이상하리만치 많이, 잦은 대화를 나눈 것 같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지구가 멸망하기 전 날 무엇을 할 것이냐, 라는 질문에 답해본 적이 있을 듯) 이리도 아무렇지 않게 들이밀며 진지하게 글을 쓰다니. 더 놀라운 것은 소설 속 분위기다. 인류가 멸망하는 비극 앞에서 아무것도 극적인 것이 없다. 정작 주인공조차도 공을 만나 해장국을 사 먹으려 만나서 지금 제일 억울한 사람은 “내일 치아 교정 끝내는 사람”(119p)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이 소설의 공포를 느낀 지점은 바로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내일 죽는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죽기 전까지 매 순간 모든 생각 모든 행동이 부질없어진다는 것이 문제였다. 아직 살아 있는데도 세상에 의미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110p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

   무얼 해도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극도의 체념과 무기력. 지구가 사라지기 전에 먼저 죽어버린 인류.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을 일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4. 두려움을 조성하는 건 박솔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나는 매일 산책을 한다. 산책을 하는 많은 사람들은 잘 지낼 것(266p)이니까 매일 산책을 하는 그들도 잘 지내야 맞다. 그러나 그들의 산책엔 무언가 괴이한 구석이 있다. 병원이 사라졌다 슈퍼가 나타나는 이상한 골목을 헤매고 엉뚱한 건물에 들어가 숨기도 한다. 이들의 이상한 산책은 언제라도 계속 될 것 같은데 그럴수록 필사적인 저항처럼 보이는 것은 왜일까. 같은 질문을 몇 차례고 하는 것이, 맨 몸으로 서로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이 혼자임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 같고, 도무지 알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이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골목은 계속하여 바뀐다. 나는 계속 헤맨다. 숨고 싶다. 김미월의 소설 속의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 박솔뫼의 「우리는 매일 오후에」도 벌어질 것만 같다. 남자가 어느 날 갑자기 강아지의 절반 크기로 작아졌다는 게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그보다 더 괴상한 일이 찾아올 것만 같은 두려움 때문에.

 

 

   이곳은 새로운 골목 내일이 지나면 사라질 수도 있고 그러면 영영 못 올 수도 있는 길. 269p 「우리는 매일 오후에」

   

   미래를 묻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 미래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땅속이든 막다른 골목이든 골목 안 하얀 집이든 숨어 들어가 몸을 작게 웅크리자. 그러면 홍수와 테러와 방사능을 피할 수 있을 거야. 방사능은 눈에 보이지 않고 맛도 색도 냄새도 없지만 우리가 이렇게 헤맨다면 피할 수 있을 거야. 강아지 같은 남자의 작은 등에 고개를 묻었다. 272p 「우리는 매일 오후에」

 

   5. 황정은의 글은 아무리 찾아봐도 특별할 게 없다. 그래서 더 특별하다. 무슨 얘기냐면 있는 걸 있다고 쓰고 간 걸 갔다고 쓴다. 한 걸 했다고 쓰고. 그게 전부인데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뭔가 가슴이 묵직해졌다. 그녀의 「양산펴기」도 그랬고 이번에 읽은 「上行」도 마찬가지였다. 「上行」은 친구네 고추밭에 고추를 함께 따고 돌아오는 하루의 이야기다. 시골의 전경, 먹을 사람이 없어서 차고 넘치는 고추와 고구마 호박 같은 것들, 오제의 어머니와 고모, 노부인의 사연들을 포함한다. 희한한 게 이 작품은 곱씹을수록 문제가 나타난다. 그 때문인가 하루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상행이 유독 마음에 걸리는 것은. 문제들을 모두 뒤에 두고 앞으로 달려가는 기분 탓일까.

 

 

   다음에 오냐.

   네.

   정말로 오냐.

   네.

   나 죽기 전에 정말로 올 테냐.

   ……

   오긴 뭘 오냐 니가, 라고 토라진 듯 중얼거리는 할머니 앞에서, 안 하느니만 못한 말이자 약속도 아닌 약속을 해버린 나는 얼굴을 붉혔다. 158p 「上行」

 

   우린 여전히 돌아보지도 돌아오지도 않고 앞으로만 가겠지. 그래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막무가내로 믿는 사람처럼.

 

 

   6. 손보미의 「과학자의 사랑」은 이전까지 내게 있던 그녀의 이미지를 더 확고히 다져주었다. 잘 쓰인 외국작품을 잘 번역한 작품이라고 생각해왔는데 등장인물을 비롯한 모든 이름을 외국인의 것으로 바꾸고 다니까 더 외국소설 같았다. 브라이언 그린 박사가 기고한 「고든 굴드 - 과학자의 사랑」을 ‘설치미술가이자 린디합퍼인 손보미’가 번역과 정리를 했다는 설정으로 ‘작가 손보미’가 가장 자신 있는 형식이라던 전기형식으로 쓰였다. 고든 굴드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데 가정부였던 에밀리 로즈에게 집요하게 구는 그가 흥미로웠다. 「여자들의 세상」의 “사랑은 시온산이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라는 문장에 붙박여 있던 남편이 연상됐다. 여튼 이 소설은 고든 굴드의 씁쓸한 인생 이야기다. 일생을 백억분의 일이라는 오차를 해결하기 위해 매달렸지만 사실 그것은 오차가 아니었고 비비안(전 부인)을 가장 사랑한다고 했지만 그는 줄곧 에밀리에게 집착하고 있었다. 어떤 문제에 사로 잡혀(오차를 해결해야한다/에밀리로부터 나를 사랑했다는 말을 듣겠다 같은) 한 평생 괴롭게 살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마지막 편지의 글귀는 더한 여운을 남겼다. 혹 그가 뒤늦게라도 에밀리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본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당신은 언젠가 중력에 맞서서 날아오를 거요.”

   그리고 당신은 음탕한 여자가 아니오.” 204p 「과학자의 사랑」

 

   7. 만약 24년 전 헤어진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전화를 건다면 어떨까? 아버지는 살인범이다. 어머니를 죽였다. 그 때 내 나이는 다섯 살이었다. 그 날로 인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긴 하지만 (이모에게) 입양되어 지금껏 별 탈 없이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친부가 나타난다. 그것도 병에 걸려서. 것도 모자라 내가 간호조무사로 일하고 있는 신장투석실에 나타난다. 좋든 싫든 나는 앞으로 일주일에 세 번씩 다섯 시간 동안 그를 만나야 한다. (229p)

 

 

   기습적으로 찾아온 이 상황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편두통이 생겼고 하루에도 몇 번씩 어둡고 위험한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의 얼굴을 대하면 대할수록 점점 비참해지는 자신을 발견했고 마음이 상했으며 이상하게 억울했으며 기이한 수치심을 느꼈다. 234p 「당신의 피」

 

   정용준의 「당신의 피」는 이런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심리를 공감이 가도록 썼다. 또 부정할 수 없는 혈육과 투석기를 함께 배치함으로써 친부와의 관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과 그것이 불가함에 따른 절망이 두드러졌다.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문장이 역시 마음에 들었다. 획기적이랄까, 기발한 무언가는 없지만 탄탄하게 잘 쌓인 탑을 보는 기분이었다.

 

 

   8. 마치며. 작년 2012년 제3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4950원에 구입해서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아, 대박, 5천원도 안 주고 굉장한 걸 샀어! 수상 작품 일곱 편 모두 신나게 읽었던 나에게 그 책은 말 그대로 ‘득템’이었다. 2013년 제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을 나는 역시 4950원에 샀다. 아주 솔직히 말하면 나는 3회가 더 재미있었지만 그래도 득템한 기분은 여전하다. 책이 출판되고 1년 동안은 특별보급가인 5,500원에 판매되고 있다. 커피 한 잔 값에 무려 일곱 편이나 되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벌써부터 2014년 판이 기다려진다.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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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나의 불행 너에게 덜어 줄게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14
마르탱 파주 지음, 배형은 옮김 / 내인생의책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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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행을 평등하게 나눠주는 기계’를 만들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봤다.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이 얼마나 많다고 생각을 했기에 그런 무모한 도전을 했을까. “왜 맨날 똑같은 사람만 불행해야 해?” 라는 이 아이들을 어쩌면 좋을까.

 

   만 열 세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네 명의 아이들은 모임을 만들었다. 그것도 일명 부적응자 클럽. 나(마르탱), 바카리, 프레드, 에르완은 “우리 대 나머지 세상 전부.”(10p) 라는 정신으로 산다. 그들은 자주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세상에 만만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고작 중학생인 그들에게 불행은 이미 너무 익숙한 것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이제는 새로운 불행이 기러기 떼처럼 몰려오기까지 했다. 모든 게 다 우울한 분위기로 변해갔다.

 

   아이들이 처음으로 무모한 행동을 한 것은 보나세라 선생님의 정직 처분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희한한 보나세라 선생님이 자신들과 동류라고 느끼고 부적응자 클럽의 명예회원으로 임명하기까지 했었다. 습관적으로 의욕을 잃고 축 늘어지곤 했(41p)던 아이들이 분노로 인해 생겨난 폭발적인 에너지로 행동을 했다. 교장선생님께 보나세라 선생님을 변호하는 편지를 썼던 것. 이 대목에선 아이들의 진지한 호소가 눈에 띈다. 편지를 받은 교장선생님도 당황했을 것이다.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술을 마시는 게 좋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건 누구보다 보나세라 선생님 자신에게 안된 일이고, 선생님은 도움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런 일에서 우리가 보호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다. 선생님이 술을 마시기 때문에 우리가 나쁜 본을 배우게 된다는 구실로 선생님을 자르는 건 최악의 위선이라는 뜻이다. 나쁜 본은 사회를 통해, 전쟁을 통해, 부패를 통해, 너도나도 돈과 소비를 최고라도 여기는 세상을 통해 날마다 배우고 있다. 우리 우울한 천재 선생님에게 배우는 게 아니란 말이다. - 본문 42p

 

 

 

 

   사건은 에르완이 구타를 당하면서 더 심각해진다. 막연히 감돌던 위협적인 분위기가 현실이 되었고 학교는 더욱 불안한 곳이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에르완은 ‘불행을 평등하게 나눠주는 기계’를 만들어냈다. 미친 짓이라고, 정의가 아닌 공격성의 힘으로 균형을 잡으려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나’는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그 기계가 정말 작동하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고 있었(79p) 던 것을 보아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은 마찬가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에르완이 만든 기계의 성공여부와 상관없이 나는 그 시도에 큰 의미를 두고 싶다. 물론 타인에게 공격적인 방법이었기에 나쁜 방법이라는 데엔 동의하지만 고통을 밖으로 드러낸(93p) 것은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니까.

 

   분명 보통의 아이들은 아니다. 음악을 잘하는 프레드, 수학과 물리에 미쳐있는 바카리, 발명가 에르완. 그리고 예술을 좋아하는 나, 마르탱.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이미 삶에서 중요한 발견을 이룬 게 아닐까. 게다가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친구가 있다는 건 행운이며 행복이다. 어떤 불공정한 일과 더러운 불행 앞에서도 서로의 손을 꼭 잡고 헤쳐 나가기를. 무슨 짓을 해도 밉지 않을 악동들. 그건 그들의 마음이 못 돼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좀 삐뚤어졌으면 어떠냐. 나쁘지 않으면 됐지. 원래 특별한 사람들은 좀 특이하게 사는 법.

 

   111p의 얇은 책이다. 간결한 문장으로 읽기 쉽다. 귀여운 악동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책 속에는 제법 심각한 문제들이 나온다. 따돌림, 학교폭력, 음주교사, 아이를 방치한 아버지, 아버지의 실업으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학생 같은 문제들. 어둡고 무거운 문제들이 어둡고 무겁지 않게 나온다. 아무래도 귀여운 아이들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그들을 귀여워하다 그들의 문제도 귀여워해버린 걸지도. 좀 곤란한 일이다. 문제는 문제대로 진지하게 다시 봐야겠다.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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