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꽃 김별아 조선 여인 3부작
김별아 지음 / 해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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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복일까, 저주일까? 누군가는 일생에 단 한 번, 단 한 사람밖에 사랑하지 못하도록 결정지어 태어난다. 의지도 아니고 선택도 아니다. 훌륭한 성품과 높은 도덕심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운명일 뿐이다. 녹주와 서로는 한마음 한 몸으로 꽁꽁 묶였다. 그 잔인하고도 견고한 운명의 사슬에 기꺼이 포박되었다. 141p

   모처럼 봤다. 사랑이 바로 삶이라는 이들을. 사랑으로 충만한 그 순간에만 살아있음을 느꼈기에 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사랑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을. 불가항력의 것으로 맺어질 것처럼 만났으나 같은 힘으로 엇갈려야만 했던 안타까운 연인을 만났다. 비로소 하나가 된 시간은 혼자서 그리워했던 시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짧아서 보는 내 마음이 이리도 미어지는데 당사자는 오죽했을까. 그러나 그녀는 기꺼이 몸을 던졌다. 죽음의 양면인 위험한 사랑에. 그것만이 그녀의 삶이었으므로.

 

   특별할 수밖에 없는 인연이었다. 불구덩이에 가족을 다 잃고 홀로 살아남은 일곱 살 여자아이의 절망과 공포를 어떻게 다 말할 수 있을까. 말도 못하는 아이에게 서로는 녹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 순간 녹주는 새로 태어났다. 서로가 지어준 운명으로. 어머니 ‘이씨 부인’의 극성스런 학구열로 정승동으로 공부를 하러 다니는 서로의 속도 엉망인 건 마찬가지였다. 촌놈이라 욕을 먹고 명문가 자제들의 발에 밟히고, 오물을 뒤집어쓰면서도 아무 내색도 하지 못했던 열한 살의 그 속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까. 똥 부스러기가 말라붙은 서로의 옷을 빨며 그가 홀로 삼킨 눈물을 대신 흘려주던 건 다름 아닌 녹주였다. 깊은 곳에 감춰 둔 절망과 외로움을 알아봐주고 헤아려주고 다독여준 건 단 둘 뿐이었다.

 

 

 

   조심스런 손길로 빨래를 하던 녹주가 땀을 훔치는 듯 눈물을 닦았다. 버드나무 그늘 아래 오도카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서로는 자기 대신 우는 녹주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얼룩은 아무 일도 아니다. 옷은 금방 마른다. 하지만,”

 

   빨래한 도포를 바위에 펼쳐 말리고 녹주는 서로에게 다가왔다. 치어다보노라니 오뚝 선 노주의 어깨 너머로 햇발이 따가웠다. 눈살을 구기며 고개를 떨어뜨리는 서로의 손목을 녹주가 옴켜쥐었다.

   “우리는 그 사이에 마음을 말리러 가자!” 83p

 

 

   “꿈속에 나도 나왔느냐?”

   “너? 네가 왜?”

   “왜라니? 참말 섭섭하다! 내 꿈엔 언제나 네가 나오는데, 넌 내 꿈을 안 꾼단 말이냐?”

   “……” 93p

 

   엇갈림도 운명이었기에 애처로운 것이다. 녹주의 피리소리만으로도 서로는 그녀의 마음을 다 알아들었다. 녹주는 괴롭힘에 익숙한 겁쟁이였던 서로의 마음을 말려주고 지지 않도록 해주었다. 녹주가 뱀에 물렸을 때는 독뱀인 줄 알고, 그리 알았기에 상처를 빨았던 서로였다. 그렇게 영혼마저 사를 듯한 불의 꽃이 피었(141p)음에도 이뤄지지 못한 둘을 어찌해야 할지. 긴긴 세월 도달하지 못한 그 마음, 사그라지지도 않는 그 마음을 어쩌면 좋을지. ‘이씨 부인’도 그들의 운명이라면 운명이겠다. 둘 사이에 굳건하게 자리한 큰 바위. 결국 녹주는 불문에 귀의했다. 수경심이라는 새 법명을 얻고 절망과 망상과 번뇌의 하루(153p)를 보냈다. 녹주를 잃은 서로는 농탕질에 빠졌다. 생이별 후의 황망함을 욕정 때문이라고 생각했(159p)던 것이다. 그가 계속 기방을 출입하자 이씨 부인과 조반(서로의 아버지)은 혼사를 서둘렀다. 망석중 놀이하듯 혼례를 치렀다. 그들의 재회는 7년 만에 이뤄졌다. 조반의 장례에 조문을 간 녹주는 그곳에서 그의 아내와 아이를 봤다. 그 날로 헤어진 둘은 십오 년이 흘러서야 다시 만났다. 녹주는 제 아비 뻘의 늙은이인 이귀산의 후처가 되어 있었다.

 

   “관상감에서 일하는 이들이 그러더라. 별보다 그 별을 찾아 검은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다고…….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시간보다 그를 그리워하는 시간이 더 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그래도 나는 너를 사랑한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있어도…… 사랑한다!” 256p

   운명은 끝까지 그들을. 녹주는 지쳤다. 이귀산과 공허한 관계로 살아가는 것도 그의 옆에서 허깨비처럼 살아가는 것에도. 더 이상 무엇에도 희망을 걸 수 없는 폐허(271p)가 되어버린 그녀는 죽으려 했다. 그러나 운명은 짓궂은 놀음을 멈추지 않았다. 하필 그 때 서로의 서신이 도착한 것이다. 죽음 앞에서 그녀는 생으로 돌아섰다. 사랑을 택했다. 서로에게 갔다. 그것이 죽음의 다른 얼굴인 것을 알면서도. 그런 녹주를 보며 작가는 말했다.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단 한순간도 스스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행복한 순간에 가장 무서운 파국을 떠올릴지라도, 목숨을 걸고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토록 어리석은 사랑이 그녀가 생애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285p

 

   “사랑이 없어도 사람은 살 수 있을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우리가 잘못된 걸까?”

   땀에 젖어 뺨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가만히 떼어주며, 서로가 대답했다.

   “우린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이라면 악(惡)일 테고, 악이라면 이처럼 한없이 행복할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 없이도 잘들 살아가지 않느냐? 안전한 금 안에서 정절과 지조를 지키며 근엄함 태도로…….”

   “아니, 모두가 그런 척하는 거다. 다들 어떻게든 사랑하고 있을 거다. 그걸 필사적으로 숨기며 들키지 않을 뿐이지. 사랑하지 않고는 아무도 살 수 없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그건 다만 사는 시늉을 하는 것뿐이다.”

   서로의 말에 녹주가 웃었다. 녹주의 미소를 따라 서로도 웃었다. 삶은 그토록 짧은 순간에 있었다. 그들은 다만 일말의 시늉도 없는 선명한 한때를 살 뿐이었다. 289p

   그들이 잘못된 걸까? 결국 밀회는 들통 나고 그들은 파국을 맞는다. 젊은 임금은 후에 후회하게 될 줄 모르고 율문 밖의 형벌로 처결했다. 서로는 파직해 유배하고 녹주는 사흘 동안 저자에 세웠다가 참수하라는 처분이었다.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에 살아있을 수 있었던 그 짧은 시간이 정말이지 너무도 짧아서 나는 더 안타까워죽겠는데도 녹주는 기꺼이 죽음을 맞았다. 기꺼이. 찰나에 지나지 않을지나 누구의 것도 아닌 나의 삶을 살고 싶기에, 누구에게도 미룰 수 없는 죽음을 기꺼이 껴안습니다.(327p) 라며.

 

   처음부터 짝이었는데 그게 엇갈리니 슬프고 비로소 이뤄졌는데 부정한 관계여서 안타깝다. 불륜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단, 그들은 이미 끔찍한 대가를 치렀으니까 그 죄에 관해서는 내가 더할 말이 없을 뿐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고서도 죽지 못하고 20년을 살아내야 했던 서로의 삶을 쓰게 그려보며 둘의 옛 시절을 기억해주는 수밖에는. 너희는 사랑이었다, 알아주는 수밖에는.

 

   끝으로. 옛 느낌 물씬 나는 작가만의 단어들이 빼곡하다. 거기에 막혀서 재미를 못 보고 덮어버린 역사소설도 꽤 되는데 김별아의 <불의 꽃>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모르는 말이라도 문맥상 이해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었고 몇몇 단어들은 신기하게도 곱씹어볼수록 제 맛이 느껴져 소설의 분위기를 더했다. 이 소설은 사랑이라는 죄목으로 국가의 처벌을 받은 조선 여성 3부작의 두 번째 소설이란다. 그렇다면 3번째 이야기가 또 있다는 뜻. ‘기꺼이’ 패배한 어리석고 용감하고 뜨거운 여성들의 이야기(338p)가 기대된다. 그녀가 덧붙인 작가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를 믿지 않는다면, 그들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사랑을 믿지 않는다면, 이 이야기는 뻔하디 뻔하고 그렇고 그런 것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336p) 녹주와 서로의 이야기를 슬픈 사랑이야기로 볼지 흔해빠진 불륜이야기로 볼지는 읽는 자의 선택이다. 단, 나처럼 사랑이야기에 가깝게 본 경우라면 마지막 길 위에서 참수형을 맞는 녹주의 독백에 가슴이 쓰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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