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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을 착취하다 - 서민을 위한 대출인가 21세기형 고리대금업인가, 소액 금융의 배신
휴 싱클레어 지음, 이수경.이지연 옮김 / 민음사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누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는가
휴 싱클레어, 『빈곤을 착취하다(민음사, 2015)』
흔히들 사랑과 기침과 가난은 숨길수록 더 드러나는 것이라고 한다. 사실 이 셋 중에서 드러났을 때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것은 가난이다. 하지만 선천적인 가난은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 아니며, 게으름과 나태함의 결과도, 부끄러워하거나 숨겨야할 대상도 아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가난해지려는 사람은 없다. 때때로 가난은 불편함을 넘어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련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가난은 우리를 인간 이하의 삶으로 내몰고 매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선사하며 꿈과 희망, 사랑 따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생지옥으로 이끈다. 이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이유는 꿈을 꾸며 인간답게 살기 위함이다. 아니, 살기 위함이다. 이렇게 가난한 자들의 꿈을 이뤄주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한 게 소액금융이다.
방글라데시의 무하마드 유누스는 1983년 빈곤퇴치를 위해 빈민들에게 담보 없이 소액대출을 제공해주는 그라민 은행을 세웠다. 그라민 은행에서 소액대출을 받은 빈민들이 소규모 자영업을 시작해 자립을 이루고, 빈곤에서 벗어난다는 구상은 그야말로 완벽하다. 그라민 은행을 필두로 세계 각국은 소액금융 제도를 도입해 운영하기 시작했다. 여러 대학에 소액금융 과목이 개설되고 소액금융 전문 MBA까지 생겨났으니 그야말로 ‘차세대 유망 산업’이라 여겨질 만하다. 그렇다면 소액금융이 시작되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 과연 가난한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었을까? 소액금융으로 돈을 빌린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로 자립을 이루고 가난에서 벗어나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있을까? 이 질문에 휴 싱클레어는 단호히 “NO”라고 답한다.
싱클레어는 10년 간 세계 각지를 다니며 소액금융 업계의 여러 기관들과 일하면서 다양한 관점에서 업계의 현실을 목격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액 대출로 재봉틀을 장만해 자립을 일구는 빈곤층 여성이라는 아름답게 포장된 이미지에 숨겨진 맹점과 허점”을 철저히 파헤치고 고발한다.
“좋은 의도에서 출발한 소액금융은 큰 손 투자자들과 새로 출현한 닷컴 기업들에 의해 점차 장악되었고 언론의 과장된 보도로 물들기 시작했다. 빈곤 퇴치 효과는 미미할 뿐이었다. 일부 대출 고객에게는 소액금융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저주가 되었고 때로는 대출금이 그들을 자살로 몰고 가는 경우도 있었다.(p.41)”
소액금융은 빈곤을 퇴치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빈곤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어가고 있었다! 싱클레어의 고발이 설득력 있는 이유는 그가 멕시코, 모잠비크, 나이지리아, 네덜란드, 몽골 등지를 직접 발로 뛰며 알아낸 증거와 기록을 고스란히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가 나이지리아 라포(LAPO, 빈곤국제기구)의 실상, 즉 나이지리아 전역의 IT 시스템은 엉망으로 설치되어 있었고 연 100퍼센트가 넘는 이자율로 대출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고객들도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한 후 겪은 일들은 법정드라마를 방불케 할 정도다. 그는 나이지리아 라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리고, 조작된 평가로 투자금을 모은 회사의 잘못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트리플점프에서 해고되고 소송에 휘말렸다. 그로 인해 라포는 연일 신문 1면에 오르내렸고, 소액금융계는 대형 스캔들에 휩싸였다.
싱클레어는 회사의 협박과 회유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왜곡하거나 조작하지 않았다. 그리고 누가 봐도 이길 것 같지 않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을 시작했다. 법정에 가기까지의 과정과 법정 안에서의 이야기는 소액금융을 둘러싼 이권이 어디까지 연결되어 있는지, 자신들의 허물을 덮기 위해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그들이 더 이상 ‘빈민 퇴치’라는 이상을 위해 일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행히 그는 법정에서 승리했지만, 씁쓸하게도 라포의 투자자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소액금융의 썩은 뿌리는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다. 싱클레어는 말한다. 가난한 자들의 꿈과 희망을 미끼로 대출을 조장하는 자들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고. 그렇다. 소액금융은 전 세계의 빈곤을 해결해 줄 종교도, 만병통치약도 아니다. 빈곤을 착취하는 자들에게 꿈을 저당 잡히지 말라는 그의 말이 긴 여운을 남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